• "10년 가까이 젊음 다 바친 회사, 법 때문에 나가야 한다는 게 이해 안돼"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비정규직보호법이 도리어 비정규직 해고를 촉진하는 현실에 대해 비정규직 근로자들은 어떤 심정일까. 비정규직법 시행 첫날인 1일 해고(고용계약 해지) 통보를 받은 비정규직들은 본지 취재에서 정부와 정치권이 아무 대책 없이 비정규직을 내몰고 있다며 원망했다. 이들은 "2년 연장이든 유예든 정치권이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주길 간절히 기대했지만 결국 해고됐다"며 "앞으로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야 할지 막막하다"고 말했다.

    "8년 일한 직장을 법 때문에 그만둬야 하나"

    오진호(35)씨는 2001년 KBS에 입사했다. 드라마 FD(연출보조)로 궂은일을 도맡으며 성실히 일했다.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2007년부터 드라마 제작국의 무대 감독(매니저)이 됐다. 인기사극 '천추태후'도 그의 손을 거친다. 하지만 오씨의 실력도 법 앞에 무력했고 1일 회사에서 해고됐다. "회사는 자회사로 가라거나, 다시 고용하겠다는 언급도 없었어요. 10년 가까이 제 젊음을 다 바친 회사를 법 때문에 나가야 한다는 게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오씨는 "정치권이 자꾸 논쟁만 하지 말고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주길 기대했다"며 "당장 우리 같은 실직자가 생겨날 수밖에 없는 만큼 유예든 연장이든 먼저 조치를 취한 뒤 계속 논의를 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KBS는 이달 말로 계약기간이 끝나는 비정규직 18명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출근해봤지만…"

    지난달 30일 계약이 만료된 주택공사 소속 시설관리원 권모(54)씨는 1일 오전 여느 때처럼 사무실로 출근했다고 했다. 이미 열흘 전 회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지만 국회에서 법 개정 논의를 진행 중인 만큼 혹시나 계속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미 사무실에 권씨 자리는 없었다.

    권씨는 "이제는 정말 해고된 것이 실감이 난다"며 "비정규직을 보호하겠다는 법 때문에 비정규직이 거리로 내몰리고 있다"고 했다. 주택공사는 이날 2년을 채운 비정규직 노동자 31명을 해고했다.

    "지금도 다시 일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포기 못하겠어요. 사업에 실패하고 힘들게 얻은 직장이니 일을 계속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내일 아침에도 회사로 출근을 하고 있을 것 같아요. 정치권이 빨리 해결책을 만들어줬으면 좋겠습니다. 비정규직 뉴스만 나오면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멍하니 쳐다봅니다." 권씨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법만 통과되면 계속 일할 수 있다고 했는데…"

    대전중앙병원 전기시설 관리사로 근무하던 김재천(41)씨도 이날 5년 만에 직장을 잃었다. 해고통보는 지난달 29일에야 받았다고 했다. 병원에서 조건부 계약 방침을 정했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6월 30일까지 지켜보자고 했어요. 유예든 연장이든 법만 통과되면 계속 고용하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결국 정치권이 도와주질 않네요."

    그는 갑작스럽게 받은 해고 통보이기 때문에 앞으로 뭘 할지 계획조차 세우지 못했다고 했다. "저만 바라보고 있는 중학교 3학년, 2학년 아이들과 아내를 생각하면 뭔가를 해야 하지만 너무 막막해서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다. 한국산재의료원 소속 병원에서 이날 해고된 사람은 김씨를 포함해 모두 28명이었다.

    "공공기관이 솔선수범해 달라"

    강원도 동해병원에서 의료기사(방사선)로 근무하다 이날 해고된 김태형(36)씨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가 대량 해고 사태를 한 달 앞두고 쫓기듯 논의를 시작한 정치권에 화가 난다"고 질타했다. 2005년 9월부터 병원에서 일했다는 김씨는 "함께 해고된 2명 모두 전문기술을 가진 특수인력이지만 공공기관이라는 이유로 정규직 전환 대신 모두 쫓겨났다"며 "법을 지켜야 할 공공기관이 법을 악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공기관은 정부 승인 없이 마음대로 일자리를 늘릴 수 없기 때문에 필요한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김씨는 해고됐지만 아직 실업급여를 신청하지 않았다. 그는 "실업급여를 신청하는 순간 부당 해고를 인정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정부가 거리에 내쫓긴 비정규직 노동자의 간절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며 "아직 복직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정부를 상대로 투쟁해나갈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