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부가 집을 떠나니 뜻 이루기 전엔 돌아오지 않으리(丈夫出家生不還 장부출가생불환)

    1930년 3월6일 노모와 아내, 두 아들을 남긴 채 의사(義士)는 홀연히 길을 떠났다. 그리고 2년 23일이 지난 1932년 4월29일 오전. 중국 상해 홍구(虹口)공원(지금의 노신공원). 일본의 천장절 겸 전승 축하 기념식 단상을 향해 의사는 몸을 날렸다. 그리고 신민지 조선 민족의 분노가 담긴 폭탄을 던졌다.

    상해 일본 거류민 단장 가와바타와 상해 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이 현장에서 폭사했다. 일본군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 제9사단장 우에다 중장, 주중 공사 시게미쓰 등은 중상을 입었다. 죽음을 각오한 거사. 의사는 몸을 피하려 하지 않았다. 일제 군경에 현장에서 검거됐다.

    당시 중국 신문은 의사의 모습을 이렇게 보도했다.

    (폭탄이 터진 후) 회오리바람이 소용돌이치는 군중들 사이에 조선 사람이 있었다. 그는 군경들에 의해 구타당해 쓰러졌다. 주먹, 군화, 몽둥이가 그의 몸을 난타했다. 만일 한 사람이 죽게 된다면 바로 그 조선인이었을 것이다. 그는 회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곧 그 회색 양복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다.

    잠시 후 그 한국인은 땅바닥에 쓰러졌는데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총검을 가진 군경들이 그가 쓰러져 있는 곳에 비상 경계선을 치고 군중들로부터 그를 차단했다. 군경들이 비상경계선 안에서 그를 감시했다. 곧 차 한 대가 나타났다. 그 조선인은 (일본군에 의해) 머리와 다리가 들려 짐짝처럼 통째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 그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매헌 윤봉길 의사. 그는 그가 소망한 뜻을 이루고 그해 12월19일 일제에 의해 총살형을 당했다. 윤 의사는 거사 직전 백범 김구 선생에게 몇 통의 유서를 남겼다. 그중엔 식민지배에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남긴 글이 있다.

    고향에 계신 부모 형제 동포여! 더 살고 싶은 것이 인정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택해야 할 오직 한 번의 가장 좋은 기회를 포착했습니다.
    백 년을 살기보다 조국의 영광을 지키는 이 기회를 택했습니다.
    안녕히, 안녕히들 계십시오.
    ” 

    두 아들에게 남긴 글도 있다.

  • ▲ 윤봉길 의사 유서' ⓒ 뉴데일리
    ▲ 윤봉길 의사 유서' ⓒ 뉴데일리

    <강보에 싸인 두 병정(兵丁) 모순과 담에게>
    너이도 만일 피가 잇고 뼈가 잇다면 반다시 조선을 위하야 용감한 투사가 되여라.
    태극의 기발을 놉피 드날니고 나의 빈 무덤 압헤 차저와 한잔 술을 부어노으라.
    그리고 너의들은 아비 업슴을 슬퍼하지 말어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잇스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하기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잇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푸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듸손이 잇다.
    바라건대 너의 어머니는 그의 어머니가 되고 너의들은 그 사람이 되여라.

    6월21일로 탄신 101주년을 맞는 윤 의사를 기념하는 학술대회가 지난 19일 서울 양재동 매헌윤봉길의사 기념관에서 열렸다. 김희곤 안동대 교수(안동독립기념관장)가 ‘윤 의사와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을, 김상기 충남대 교수(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가 ‘윤 의사의 가나자와(金擇) 순국과 순국 현지 학술조사’를, 윤병석 매헌연구원장(인하대 명예교수)은 ‘윤 의사 탄신 전후 민족수난과 일본 역사왜곡 및 독도 침탈 기도’에 대해 각각 강연을 했다.

  • ▲ 김희곤 안동대 교수 ⓒ 뉴데일리
    ▲ 김희곤 안동대 교수 ⓒ 뉴데일리

    윤 의사의 의거가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의 불씨를 당겼다는 내용을 발표한 김희곤 안동대 교수를 만났다.

    “윤 의사의 거사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만 고통 받던 전 세계의 식민 치하 사람들에게 반침략전(反侵略戰)의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을 높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반침략전 모델이란 힘이 약해 나라를 빼앗긴 국민이 침략에 맞서는 투쟁 방법을 말한다. 즉 윤 의사의 의거는 힘 약한 국민들에게 몸소 스스로를 내던져 무력으로 항쟁하라는 모범을 보인 것이라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런 면에서 윤 의사의 의거는 다른 식민지 백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일깨웠고 세계사적으로도 많은 영향을 준 쾌거였습니다.”

    김 교수는 의열투쟁과 테러는 엄연히 다르다고 했다.

    “과거에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한국인 피랍사건을 두고 ‘납치한 아프가니스탄인들이 그들 입장에선 김구나 윤봉길과 뭐가 다르냐’고 말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테러는 목적 달성을 위해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희생시킵니다. 하지만 의열투쟁은 적으로서 노려야할 목표와 싸우는 것이지 선량한 시민들을 다치게 하지는 않습니다.”

    김 교수는 윤 의사의 의거가 갖는 세계사적 의미도 다양하다고 말했다.

    “의거로 1932년 일본의 상해 침공 승리의 의미가 상당히 약화됐습니다. 또 일제의 농간으로 일어난 만보산 사건으로 악화된 중국과의 관계가 회복하는 실마리도 윤 의사의 의거에서 찾아야 합니다.”

    만보산 사건을 중국 길림성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의 가벼운 농업용수 분쟁이 일제의 공작으로 두 민족간 유혈충돌로 확대된 사건. 이 일로 악화된 감정이 윤 의사의 의거로 해소되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설명이다.

    “실제로 중국 내에서의 항일 의식이 높아졌고 당시 장개석(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임시정부 지원도 이루어지게 됐습니다. 임시정부의 독립투쟁 활성화에도 큰 도움이 된 의거였습니다.”

    윤 의사는 처형 직전 일본인들에게 한 마디 남겼다.

    아직은 우리가 힘이 약하여 외세의 지배를 면치 못하고 있지만 세계대세에 의하여 나라의 독립은 머지않아 꼭 실현되리라 믿어마지 않소. 대한 남아로서 할 일을 하고 미련 없이 떠나가오.”

    의사는 그렇게 홀연히 떠났다.

  • ▲ 윤봉길 의사의 순국 직전(위)과 순국 후의 모습. 이마에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 뉴데일리
    ▲ 윤봉길 의사의 순국 직전(위)과 순국 후의 모습. 이마에 총알 자국이 선명하다. ⓒ 뉴데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