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대 세습에도 그토록 못 견뎌했는데 3대 세습이라니. 도대체 이게 가능한 일인지 묻고 싶다.”

    탈북자 출신으로 동아일보에 근무하고 있는 주성하 기자가 3일 동아일보를 통해 ‘북의 친구들에게 쓴 회한의 편지’를 보냈다.

    그는 “오늘(2일) 아침 북한에서 3대 부자 세습이 공식 확인됐다는 기사를 읽는 순간 너희 생각이 먼저 났다”며 “함께 뜻을 모으던 옛일들이 떠올라 지금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우리의 운명에 새삼스레 더욱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그는 A라는 친구에게 “3년 동안 너를 지켜본 후 ‘넌 우리 사회를 어떻게 생각하니’라는 말을 처음 꺼냈다”며 “알다시피 이 말을 하는 순간 상대에게 자신의 목숨을 맡긴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남쪽에서 본 미국영화 ‘아일랜드’를 소개하며 “자신들이 사는 곳을 천국이라고 주입받은 복제인간들이 그 사실에 의문을 품자마자 죽임을 당하는 영화”라고 말했다. 이어 “그 영화를 보면서 당시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또 “지금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변한 가로등이 환한 주석궁 앞 거리에서 날이 새도록 우리 조국(북한)의 미래를 논했었지”라며 회상했다.

  • ▲ 신의주 강둑을 걷고 있는 북한 주민들. ⓒ 연합뉴스
    ▲ 신의주 강둑을 걷고 있는 북한 주민들. ⓒ 연합뉴스

    굶주림에 피골상접해 숨져가는 동포들의 모습에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다는 B에게는 “어느 날 ‘투쟁의 불씨가 되겠다’며 김일성 대학에서 삐라를 뿌리고 분신 자결하겠다고 한 너를 밤새도록 설득했다”며 “8촌까지 멸족당할게 뻔한 마당에 가족을 생각하자고 설득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주 기자는 “너는 지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라는 불안감이 자꾸 든다”며 “북한에서는 김일성대 출신이 처형되면 주민들에게 나쁜 영향을 준다며 공개총살이 아니라 비밀리에 처형된다고 들은바 있다”며 "어떻게든 살아있길 바란다"고 말을 아꼈다.

    또 금서를 잘 구해오던 동지라고 소개한 C에게 “북한에 100부 밖에 출판되지 않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이틀 밤을 새우며 베끼면서 처음 접해보는 자본주의 경제학에 매료됐던 때도 생각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도 자본주의도 꽤 괜찮은 사회라며 우리 조국의 사회주의가 갖는 모습에 대해 밤새워 토론했다”고 말했다.

  • ▲ 김일성 생일을 축하하는 북한 주민들. ⓒ 연합뉴스
    ▲ 김일성 생일을 축하하는 북한 주민들. ⓒ 연합뉴스

    그는 친구들에게 “당시 우리의 가장 큰 고민은 입으로는 ‘인민’이란 말을 달고 살면서 실제로는 사실상 봉건왕조인 정권이 얼마나 지속될까 하는 답답함이었다”며 “사회주의가 과연 인민을 위한 이상적인 사회인가라는 고민을 했다”고 털어놨다.

    그는 “10년 전 우린 김일성, 김정일 2대 세습에도 그토록 못 견뎌 했는데 3대 세습이라니. 너희들에게 3대 세습이 가능하냐고 묻고 싶다”며 “머릿속에선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겉으론 충성을 맹세하는 이 현실이 과연 얼마나 오래갈 수 있겠냐”며 회의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남한으로 탈북 후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왜 봉기가 일어나지 않느냐”고 물으면 “자유민주주의를 마음껏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니 이해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목숨을 바쳐 민주주의를 성취했는데 북한은 바보들이 사는 곳 아니냐”는 질문을 들을 때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다고 전했다.

    그는 “북한 사람들이 흘린 피는 남한 사람들보다 100배는 많을 것”이라며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사는 수십만 명의 정치범과 체제에 반항했다는 이유로 귀중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남한보다 훨씬 많다”고 말했다.

    또 “누구라도 북한에서 하루만 살아봐도 그런 질문을 할 수 없을 것”이라며 “남한 사람들은 광복 후 소련이 아닌 미국이 진주한 것과 억울하게 숨지면 이를 써줄 수 있는 언론환경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우리 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말할 권리는 한 번도 박탈되지 않았다는 사실과 자신이 분신해도 적어도 자신의 가족은 함께 몰살되지 않음에 감사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내가 평양에 돌아가는 날 이 글을 너희에게 보여주고 동시대를 살면서 우리가 이 순간 어떤 고민을 함께 했었는지 열띤 토론을 벌이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