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억 이상 채무 탕감 신청 불황 여파로 3배나 늘어

    금융위기 여파로 자영업이 붕괴하면서 법원에 채무 탕감을 신청하는 5억원 이상 고액(高額) 채무자들이 급증하고 있다.

    특히 올 들어 법원을 찾는 고액 채무자 중에는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던 의사, 한의사, 변호사 등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이 전체의 절반 가까이나 되는 것으로 드러났다.

    빚 보증을 섰다가 부득이하게 물린 경우도 있지만 사무실을 새로 내거나 확장하려고 대출을 받았다가 갑작스러운 경기 침체에 속수무책이 된 경우가 대다수이다.

    치과의사 경력 20년이 넘은 신모씨는 빚 14억원을 갚을 능력이 없다며 올해 초 법원에 회생신청을 냈다.

    2006년 병원을 확장 이전하면서 시설비 등의 명목으로 3억원을 대출받은 게 화근이었다. 유지비는 계속 들어가는데, 환자는 찾아오지 않았다.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빚을 지고, '신용카드 돌려막기'까지 해봤지만 2008년 가을 밀어닥친 글로벌 금융위기는 결국 신씨를 막다른 골목으로 밀어넣었다.

    산부인과 의사인 이모씨는 몇 년 전 근처에 대형 병원이 들어서면서 유탄을 맞았다. 세계 최저를 달리는 출산율 때문에 가뜩이나 병원 유지가 어려운 터에 병원을 내면서 받은 대출원금과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로 빚은 10억원까지 쌓였다. 결국 이씨도 최근 서울중앙지법 파산부 문을 두드렸다.

    로펌(법률회사) 소속의 K변호사는 보증 빚에 물린 케이스. 부친 사업을 돕기 위해 보증을 섰지만 금융위기로 사업이 실패하면서 무려 42억원이나 되는 빚을 떠안게 됐다. K변호사는 남들이 부러워하는 억대 연봉을 받지만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없다"며 지난 4월 법원에 회생신청을 냈다.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최근까지 5억원 이상 채무를 지고 법원에 개인회생을 신청한 사람은 62명이다. 지난해 1~5월의 24명, 2007년 같은 기간의 13명과 비교하면 3~5배나 급증한 것이다.

    62명의 직업별 분포는 의사와 한의사가 28명(44%)으로 가장 많았고, 일반 자영업자가 20명(32%)으로 그 뒤를 이었다. 변호사는 2명(3%)이 법원에 회생신청을 했고, 회사원과 회사관리인도 각각 3명(5%)씩이 5억원이 넘는 빚 때문에 법원을 찾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의 평균 부채 액수는 약 38억8000만원으로 15억8000만원인 평균 자산보다 2.5배가량이나 많다. 100억원이 넘는 빚을 진 사람도 6명이나 됐다.

    법원은 개인회생을 신청한 사람들의 자산과 소득 등을 따져 일단 자산으로 빚 잔치를 하고 난 뒤엔 구체적인 빚 변제 계획을 세워주게 된다. 채권자 입장에선 채권 추심을 당장 할 수 없기 때문에 불만일 수 있지만, 길게 볼 때는 합리적일 수 있다는 것이 법원의 설명이다.

    채무자 역시 길게는 수십 년에 걸쳐서 법원에서 정해준 채무 변제 계획을 이행하면 되기 때문에 채무자들로부터의 시달림에서 다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

    자영업자와 전문직 종사자들의 회생신청이 올 들어 급증한 것은 지난해 가을 본격화된 경기 불황이 이들에게 직격탄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은행 대출로 기존 대출을 막는 방식으로 땜질을 해왔지만 가을부터 은행들이 본격적으로 대출을 회수하거나 돈 줄을 조이면서 둑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서울중앙지법 파산부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와 비교할 때 소액 채무 때문에 개인회생을 신청하는 사람은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카드대란' 등으로 인한 여파는 어느 정도 해소가 된 대신 지난해 금융위기로 인한 중산층의 붕괴가 본격화되고 있다는 의미다.

    고영한 서울중앙지법 파산수석 부장은 "은행들이 대출기한을 연장해주지 않으면서 대출액이 많았던 자영업 종사자들이 직접 피해를 보고 있다"며 "우리 사회 핵심 중산층의 붕괴가 현실화되고 있는 것 같아 씁쓸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