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윤영신 경제부 차장대우가 쓴 칼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난 늦봄의 기억이 생생하다. 해 질 녘이면 서울 도심에선 갑자기 차량 통행이 끊겼다. 그 공간을 사람들이 메웠다. 군중 속에는 헝클어진 머리와 남루한 옷차림의 남자들이 꽤 있었고, 그들의 눈동자에선 세상에 대한 원망과 증오가 읽혔다. 그들은 광우병 괴담을 퍼뜨려 체제를 흔들려는 좌파세력도, 새 보수정권에 타격을 가하려는 노동자들도 아니었다. 이 사회에서 삶의 희망을 잃고, 당장 먹고살 길마저 막막해진 무직자와 빈곤층 사람들이었다.

    100여 일의 촛불시위가 막을 내렸다. 불법시위 현장에서 검거된 1400여명 가운데 '무직자'로 분류된 사람이 21%였다. 직업이 애매하거나 파악되지 않은 사람까지 합하면 무직자군(群)은 37%로 불어난다. 촛불시위자 10명 중 서너 명은 일자리가 없거나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었다는 뜻이다.

    법과 공권력에게 그들은 진압돼야 할 '불법 시위자'이거나 '폭도'였다. 하지만 이제부터 이명박 대통령과 정부는 다른 관점으로 그들을 대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법과 질서를 파괴한 처벌 대상이면서 또한 우리 사회의 경쟁에서 밀려난 낙오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는 '이태백', '사오정'이라 불리는 우리 주변 사람들도 끼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처럼 삶의 한계선에 몰려 언제든 다시 거리로 뛰쳐나올 수 있는 '잠재적 촛불시위자'들이 우리 사회의 저층에 계속 쌓여가고 있다는 점이다.

    정권이 바뀐 후 그들이 피부로 느끼는 소외감은 더 커졌을 것이다. 새 정부가 들어선 후 유류세 환급 같은 대증 처방 외에 빈부격차를 줄이려는 정책이나 슬로건이 감소했고, 그들을 위한 국가 지도자의 따뜻한 말도 드물어졌다. '양극화'니 '사회 안전망'이니 하는 용어들도 점차 잊혀져 가는 분위기다. 양극화나 사회안전망은 좌파 정부만의 언어가 아니다. 시장경제를 하는 많은 국가들이 고민하고 있는 사회통합의 키워드들이다. 그런데도 지난 6개월여 동안 이명박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과 말에서 이런 단어를 찾기가 어렵다. '아래'를 향한 정치와 관심, 비전이 비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현 정부는 대기업과 부자들이 잘되면 성장의 열매가 자연스럽게 빈곤층 사람들에게도 돌아간다는 '트리클 다운(trickle down)' 효과를 빈곤층 정책의 기조로 삼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국경제는 트리클 다운에 의지할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다. 전후방 연관산업이 많아 일자리를 대량으로 만들었던 자동차나 조선 같은 굴뚝산업들은 땅값과 임금이 싸고 강성 노조가 없는 해외로 빠져나가고 있다. 그나마 커지고 있는 IT산업들은 고용 창출 능력이 떨어진다. 더구나 세계 경제가 침체기로 접어들고 있어 기업들의 성장 전망도 밝지가 않다. 이런 여건에서 현 정부가 5년간 트리클 다운에 의존하는 정책을 펼칠 경우 중산층은 더 얇아지고 빈곤층이 비대해지는 상황을 맞을 수 있다. 지난 10년간 우리나라에서 중산층 가구의 비중은 68.5%(1996년)에서 58.5%(2006년)로 급감한 반면 빈곤층은 11.25%에서 17.94%로 늘어났다(KDI).

    중산층이 무너진 경제에선 선진국을 기대할 수 없다. 이 대통령이 다시 해보겠다는 '고도성장'은 둘째 치고, 지속 가능한 경제기반과 성장잠재력마저 위협받게 된다. 이명박 정부가 성장으로 가기 위해 꼭 챙겨야 할 것은 지난 5년간 약해졌던 성장 드라이브를 복원시키는 것과 동시에, 중산층이 더 이상 취약해지지 않도록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그것도 시늉만 해선 안 된다. 우리 사회의 패자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부활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도록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걸 소홀히 한다면 이 대통령은 임기 말쯤 경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어려운 시기를 맞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