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6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진 논설위원이 쓴 '촛불과 태양'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다시 국민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쇠고기 재협상을 정권에 명령했다. 국민의 이름으로 명령한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도 일본에서 “국민이 싫어하면 안 하는 게 옳다”고 했다. 그렇다면 국민이란 누구인가. 하나인가 여럿인가. 여론조사는 국민인가. 촛불을 들지 않은 이는 국민인가 아닌가.

    여론조사에서 70~80%가 재협상을 지지한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물음은 얼마나 정교했고 답변은 얼마나 진지했을까. “추가 협의를 통해 30개월 이상 쇠고기가 들어오지 않게 돼도 꼭 재협상을 해야 하나요? 재협상을 하면 미국이 자동차 재협상을 요구할 수 있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이 흔들린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는데 그래도 재협상을 해야 하나요? 지금까지 미국산 쇠고기를 먹고 인간광우병에 걸린 미국인은 한 명도 없습니다. 미국인은 30개월 이상 쇠고기를 먹습니다. 그래도 30개월 이상은 안 되나요?” 이렇게 물어도 대답이 같을까. 1969년 닉슨이 대통령에 취임했을 때 대다수 미국인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고 철군하기를 바라는 것으로 여론조사에서 나타났다. 하지만 철군이 패배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단서를 붙여서 물었을 때는 불과 9%만이 찬성했다고 한다.

    재협상을 지지하는 70~80% 안에는 여러 국민이 있다. 어느 한식집 여종업원은 내게 말했다. “인터넷에서 보니까 수도하고 가스 요금이 마구 오른대요. 제 월급이 얼만데… 이명박 미워요. 그래서 친구랑 촛불 갔어요.” 광장에서 초등학교 1년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 2명이 서명록에 썼다. “이명박 싫어. 미친 소 싫어.” 옆에서 엄마들이 박수를 쳤다. 폭력시위로 구속된 2명은 일용직 노동자와 노숙자다. 쇠고기 걱정보다는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더 무거운 사람들이다. 70~80% 안에는 여종업원도, 엄마도, 노동자도, 노숙자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공기업 노조원도 모두 있다. 허위정보에 속아 세상을 잘못 알고 있거나 다른 이유로 자기 인생이 불만인 사람들을 빼면 진정한 재협상론자는 얼마나 될까. 그런데도 대통령은 국민의 이름으로 재협상을 해야 하는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를 침공할 때 내세운 가장 큰 이유는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국민은 속은 것이다. 이라크전에서 죽은 미군은 3000명이 넘었다. CNN 조사 결과 이라크전을 시작할 때 전쟁 지지도는 72%였다. 지금은 32%다. 그래도 부시는 철군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유럽의 재건을 도왔듯이 이라크의 재건을 도와야 한다고 국민을 설득한다. 미군이 철수하면 폭력이 이라크 전역에 난무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대통령이 그렇게 버텨도 시위대가 백악관 담장을 넘으려 했다는 뉴스는 없다.

    쇠고기 사태가 터지기 전 한·미 FTA 지지는 50%가 넘었다. 반대는 30%였다. 그러나 지금은 뒤바뀌어 반대가 50%고 찬성이 30%다. 그렇다면 대통령는 FTA를 포기해야 하는가.

    국민에는 두 종류가 있다. 진실과 결합한 국민과 그렇지 않은 국민이다. 진실과 결합하면 진정한 피플 파워(people power)다. 필리핀에서 독재정권을 무너뜨렸고 루마니아에서 차우셰스쿠를 처형했다. 1987년 한국에선 민주혁명을 이뤄냈다. 그러나 진실과 결합하지 못하고 허위정보나 괴담에 이끌리면 국민이 아니라 다중(多衆)이다. 진실의 질량보다는 숫자로 움직인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몽테스키외(1689~1755)는 “시민들은 사라질 수 있지만 인간은 남는다”고 말했다. 정보가 왜곡된 시민은 사라질 수 있지만 진실은 남는다. 대중은 복잡한 존재다. 양파와도 같아 한 명씩 한 명씩 벗겨내면 다 이유가 다르고 욕망이 다르다. 지도자는 촛불만 보지 말고 진실의 태양을 봐야 한다. 진실의 힘을 믿고 파도 앞에 서야 한다. 언젠가는 파도가 가라앉을 거란 확신을 가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