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 '중앙시평'에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쓴 '쇠고기 재협상에 신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쇠고기 재협상만이 현 정국을 돌파하는 길이라고 많은 사람들은 주장한다.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 간의 협상은 타결되었지만, 협상이 효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국내법으로 입법되어야 하는데, 쇠고기 수입검역 조건을 규정하는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의 고시가 아직 관보에 게재되지 않은 상태다. 70% 이상의 국민이 쇠고기 협상에 문제가 있다고 믿는 상황에서, 협상 내용을 그대로 고시로 옮기는 행위는 정치적인 자살 행위일 수 있다. 때문에 집권 여당 내에서도 재협상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득세하고 있다. 그렇다면 재협상은 불가피한가?

    재협상이란 현재 합의된 내용을 전면 무효화하고 새로 협상하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4월 18일 타결된 쇠고기 협상의 기본 전제는 지난해 5월 국제수역사무국이 미국을 광우병 통제 국가로 판정한 이후, 특정위험물질(SRM) 부위를 제거하면 연령에 상관없이 미국 쇠고기는 안전하다는 국제적 기준이다.

    재협상을 한다는 것은 이 기본적 전제를 부정하고 새로운 수입위생 조건을 짜겠다는 것이다. 협상에서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논리적 근거가 설득력있게 제시되지 못하면 요구는 관철되지 못한다. 특히 위생검역 조건을 다루는 협상은 더더욱 그러하다. 과다한 위생검역 조치는 위장된 무역장벽이라는 의구심을 늘 받아온 터이기 때문이다.

    국내에 광우병 연구가 제대로 축적되어 있지 않아 국제수역사무국에서 광우병 통제 등급조차 부여받지 못한 한국 정부가 어떠한 근거와 기준으로 재협상을 통해 요구를 관철시킬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한국 자동차의 안전성이 국제기구로부터 공인받고 이를 근거로 외국 정부가 한국 자동차를 전면 수입하기로 협정을 체결했다가 한국 자동차의 안전성을 의심하는 자국 여론에 밀려 협정파기를 선언하고 재협상을 요구한다면 어떠할지 상상해 보면, 쇠고기 재협상론이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님을 간파할 수 있다.

    한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재협상을 선언하면 몇 가지 어려움에 봉착한다. 첫째, 재협상의 결과가 어떨지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만약 일부에서 주장하는 모든 것을 다 얻어내지 못하는 재협상 결과는 오히려 사태를 걷잡을 수 없이 악화시킬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불신뿐 아니라 반미 감정의 확산까지 몰고 올 수 있다. 둘째, 쇠고기 재협상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구도 자체를 뒤흔들게 된다.

    민주당이 장악하고 있는 미국 하원은 지난해 한·미 FTA 협상 타결 후부터 자동차 부분의 한·미 간 심각한 무역역조를 맹비난하면서 재협상을 요구했다. 미국 쇠고기 수입 문제는 국제적 기준이라는 자유무역의 틀을 근거로 문제를 풀겠지만 자동차 재협상 요구는 자유무역의 틀을 훼손하는 것이라는 게 부시 행정부와 한국 정부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때문에 미 의회에 거듭되는 자동차 재협상 요구에도 미 행정부는 나서지 않아 왔다. 한국이 쇠고기 재협상을 선언하면, 필연적으로 미국의 자동차 재협상 요구를 불러오고, 한·미 FTA는 알 수 없는 상황으로 빠져들게 된다. 셋째, 한국의 재협상 요구는 현재 한국이 추진하고 있는 여러 FTA 협상에서 한국 정부의 대외신인도를 저하시켜 협상력을 하락시킬 우려가 있다.

    일전을 불사하듯이 기존 협정을 파기하고 재협상을 선언하는 것이 당장 자존심을 세우고 정국을 돌파하는 손쉬운 방편일 수는 있지만, 실현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은 재협상 주장은 오히려 더 큰 국가 자존심 추락과 국제관계 악화, 그리고 정국 마비를 가져올 우려가 크다. 전 세계를 상대로 하는 통상 대국인 한국으로서는 더더구나 신중한 접근이 요구된다.

    쇠고기 논란이 두 달째 되어가는 상황에서 아직 정부가 민간전문가로 구성된 독립적인 위원회를 발족시켰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독립적인 활동이 보장되고 객관적 연구환경이 보장돼, 국내의 광우병 논란에 대한 책임있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을 독립위원회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의 수입을 법으로 제한하자는 야당의 주장은 분명히 선후가 뒤바뀐 것이고, 문제를 풀기는커녕 더 악화시킬 뿐이다. 촛불의 열정을 넘어 냉정하고 실효성있는 대책을 모색할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