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3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전영기 논설위원이 쓴 시론 <'박근혜 주미대사'의 상상력>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박근혜(56)는 경계선상에서 끊임없이 정체성 투쟁을 벌여왔습니다. 22세에 갑자기 ‘영부인’ 역할을 해야 했습니다. 30대의 대부분을 ‘독재자의 딸’로 연금당하듯 살았습니다. 46세에 정치를 시작할 때까지 그는 온통 부모의 명예를 회복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남은 가족을 지키는 일도 그의 몫이었죠. 그땐 ‘박근혜의 가족’이 박근혜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박근혜는 정치인이 돼서야 자기 정체성을 찾았습니다. 대구 달성 국회의원(1998년)→제왕적 이회창 총재에 도전(2002)→김정일과 회동(2002)→탄핵 역풍에서 한나라당 구원(2004)→노무현 대통령과의 격전(2005)→얼굴 테러 사건(2006)→이명박 후보와 경선 승부(2007)→친박 당선자 복당 투쟁(2008).

    사건이 정체성을 만드는 걸까요. 이런 사건들을 겪으면서 박근혜의 정체성은 확장됐습니다. 그는 ‘TK(대구·경북)의 희망’ ‘한나라당의 상징’ ‘선거의 여인’으로 경계를 넓혀갔습니다. ‘약속하면 지키는 원칙과 신뢰의 정치인’은 박근혜의 고유 브랜드가 됐습니다. 통일외교안보 가치에 투철하다는 인상도 주었습니다.

    박근혜가 넘지 못한 경계선도 있습니다. 이명박과 경쟁에서 졌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는 실적이 부족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비즈니스와 서울시장 때 보여줬던 일+프로그램+성취의 실적이 약합니다. 2007년의 대권 승부는 한마디로 ‘이명박의 실적’이 ‘박근혜의 원칙’을 이긴 겁니다. 박근혜는 이제 원칙의 경계선을 실적의 세계로 넓혀야 합니다.

    실적의 기회는 어디에 있을까요. 7월 한나라당 전당대회의 당권입니까? 차기 개각 때 총리입니까? 둘 다 아니라고 봅니다. 당권은 기회가 아니라 무덤이 될 것입니다. 당권은 박근혜를 기껏해야 ‘한나라당의 지도자’ 아니면 ‘친박 세력의 포로’로 묶어둘 겁니다. 총리 자리는 그 자체로 실적을 쌓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이 ‘박근혜 총리’에게 자유재량권을 얼마나 부여할 수 있을까요. 국민의 사랑을 받는 두 정치 거물이 나란히 앉아있기에 국무회의장은 너무 좁지 않을까요. 박근혜의 원칙적인 성격에 이 대통령이 헌법에 규정된 총리 권한을 침범하면 일대 충돌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이명박-박근혜보다 훨씬 정치에 능란했던 김대중 대통령-김종필 총리 공동정권이 티격태격하다 2년 만에 무너진 걸 보십시오.

    이쯤에서 눈을 바깥으로 돌려 정치적 상상력의 여행을 해보시면 어떨까요. 박근혜 주미대사-.

    박근혜가 친박 세력 복당문제를 해결하고 이 대통령과 화해의 시간을 가진 뒤 연말께 워싱턴 주재 한국대사로 부임하는 상상입니다. 오바마든 메케인이든 미국에 새 대통령이 뽑혀 한창 취임식 준비를 하고 있을 때죠. 미국의 새 대통령은 한국의 대권주자를 무척 반길 겁니다. 한·미동맹의 업그레이드를 ‘박근혜 대사’ 이상 상징하는 사건은 없을 테니까요. 미국의 정치권과 CNN·뉴욕 타임스 같은 언론이 박근혜를 집중 조명하겠죠.

    차기 미국 대통령은 김정일 위원장의 북한을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조치를 취할 겁니다. 그 다음 평양에 미국대사관이 들어갑니다. 지구상 마지막 ‘은둔의 왕국’이 개방되는 거죠. 숨가쁜 세기의 드라마가 펼쳐질 건 불보듯 환하죠. 주미대사 박근혜는 주인공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북한-미국 최고 의사결정권자들을 연쇄적으로 만나 설득하고 조정할 수 있는 유일한 실력자이기 때문입니다. 단숨에 지구촌 전체에 주목받는 정치지도자로 뜰 겁니다. 위험도 있습니다. 워낙 예민한 상황이라 상처만 입고 나가떨어질 수 있죠. 그래도 이런 모험은 해볼 만합니다. 박근혜가 자기 전문분야를 살려 ‘한반도 평화 관리자’의 실적을 쌓을 수 있는 유일한 길처럼 보이니까요.

    유쾌한 상상력이 현실화되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조건이 동시에 충족돼야 합니다. ①이 대통령이 박근혜에게 주미대사를 제안할 것 ②친박 정치세력이 박근혜를 자유롭게 놔줄 것 ③박근혜가 국회의원 직을 포기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