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7일자 오피니언면 '아침논단'에 김영봉 중앙대 교수가 쓴 <10만원권의 '얼굴'과 자학사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내년부터 우리는 10만원권 새 지폐를 쓰게 된다. 건국한 지 61년을 맞이하며 탄생하는 새 고액권이니 지난 한 갑자(甲子)간 우리가 쌓은 부와 정신의 결정체(結晶體)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고액권은 회색 바탕에 백범 김구의 초상을 얹을 예정이다. 김구 선생은 어떻게 이 10만원권의 얼굴이 되었는가. 한국은행이 위촉한 10명의 화폐도안 자문위원이 작년 5월, 20명의 예비후보를 선정했다. 당시 여론조사에서는 박정희 이승만 두 전 대통령이 압도적 1·2위를 차지했지만 예비후보에도 끼지 못했다. 두 분이 "초상인물로는 가치가 있지만 찬반 양론이 거세질 것 같아" 임의로 후보 군에서 탈락시켰다고 한은측은 설명한다.

    그 다음 선정과정은 한은이 공개할 수 없다고 한다. 자문심사위원이 누구인지 알 수 없고 공청회도 일절 열리지 않았다. 한은측은 자문위원들이 "자유롭게 의견개진을 못할까봐" 명단을 숨겼고, 공청회는 "네거티브 토론이 될 우려가 있어서" 없앴다고 한다. 끝으로 민간위원 6명이 안창호, 2명이 김구를 지지했다는 소문이지만 "자문위원회는 단지 자문만 하는 기구이므로" 한은이 직권으로 김구를 선정했다는 것이다.

    이번 10만원권 초상인물 선정은 사실상 한국근대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를 뽑는 행사였다. 따라서 국민의 관심도 지대했으나 승부는 처음부터 짜놓은 경기(match-fixing)나 마찬가지였다. 보다시피 전 과정이 조작, 은폐되고 기가 막힌 변설로 분칠됐다. 도대체 국민을 무엇으로 보았기에 한은이 이런 폭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가. 향후 이 고액권 도안이 채택되건 안 되건, 한은의 방자한 도안 선정 과정은 반드시 감사(監査)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보다 놀라운 것이 이후 한국 사회가 보여준 의식마비증이다. 이런 날조가 있었는데도 누구도 재심사를 요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동안 이승만과 박정희를 부정하는 자학사관(自虐史觀)이 알게 모르게 뿌리내린 효과일 것이다. 우리 국민이 이명박씨를 차기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과거 좌파시대를 극복하고 새 시대정신을 세우고자 함에 있다. 이 당선자는 이 왜곡사태를 어찌할 것인지 최소한 입장표명을 해야 할 것이다.

    이번 초상 문제의 본질은 노무현 정권의 비뚤어진 과거사 인식을 유지시키는 점에 있다. 향후 10만원권은 우리의 대표적 화폐가 될 것이므로 그 초상의 영향력은 대단하다. 그래서 "오래 전부터 386 실세 집단이 화폐인물을 김구로 대체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며, 노 대통령의 극진한 김구 존경도 널리 알려진 바다. 이승만과 박정희를 원천 배제시킨 한은의 처사는 "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정의는 패배했고 기회주의가 득세했다"는 노 대통령의 역사관과 기 막히게 들어맞는다.

    21세기 선진한국을 지향하는 우리 국민에게 이런 편식(偏食)된 역사관은 도움이 될 수 없다. 화폐문제를 떠나서 이제는 과거 꺼려오던 대한민국 60년의 역사적 인물에 대해 바른 평가와 정보를 공급해야 할 때다. 우선 김구 선생은 평생 독립운동을 이끌고 민족통일에 진력한 애국자다. 그러나 남한 단독정부수립, 곧 지금 우리나라의 건국은 거부했다. 불행히도 이분은 일찍 암살당해 신생국가를 위해 일할 기회를 잃었고, 따라서 이승만 박정희와 같은 개인적 과오가 없다.

    반면 이승만 및 박정희 대통령은 부정선거, 장기집권, 독재자의 오명을 남겼다. 그러나 이승만은 온 국민이 눈뜬장님 같았던 98년 전 프린스턴 대학에서 '영세중립국론'으로 철학박사를 받은 세계적 지식인이며 현실적 지도자다. 이러한 그의 국제정세 판단력 때문에 남한단독의 대한민국이 탄생했으며, 그의 통치력과 외교력이 북의 위협, 전란과 기아에 금시라도 쓰러질 나라의 기반을 닦아 오늘에 이어지게 했다. 박정희는 강력한 통치력으로 경제발전시대를 이끌었다. 수백 년간 좌절, 나태와 가난에 찌든 국민은 그의 통치시대를 거치며 오늘의 격동과 열의에 찬 국민으로 일변(一變)했다.

    차기 정부의 의무는 단지 경제 살리기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국민이 바른 정신을 섭취할 수 있도록 다양하고 균형된 역사와 문화의 식단을 마련해야 한다. 이번 화폐도안도 그런 관점에서 재검토함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