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14일자 오피니언면 이 신문 이재호 논설위원이 쓴 '박근혜표 통일방안 아직없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가대하며 소개합니다.

    대선 주자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통일방안을 갖고 싶을 것이다. 민족의 운명이 걸린 문제에 나름대로의 해법을 갖고 있다면 개인적으로도 가슴 뿌듯한 일이겠지만, 정치적으로도 큰 자산일 터이다. 경제, 경제 하지만 통일문제는 여전히 호소력이 큰 이슈다.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지난주 자신의 통일방안을 내놓았다. 평화정착-경제통일-정치통일의 순으로 가자는 ‘3단계 평화통일론’이 그것인데 솔직히 기대에 못 미친다. 유력 대선 주자의 선거공약이기도 해서 건드리기가 조심스럽지만 몇 가지 지적을 안 할 수 없다. 박 전 대표는 물론 다른 대선 주자들에게도 참고가 됐으면 한다.

    3단계 평화통일론은 특별히 새로울 게 없다. 전형적인 기능주의 통일론으로 1989년 9월 11일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과 기본 방향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도 ‘화해·협력과 공존·공영의 터를 닦은 후 남북연합을 거쳐 단일 통일국가로 간다’고 돼 있다. 여기서의 ‘화해·협력과 공존·공영’이 박 전 대표의 ‘평화정착과 경제통일’의 단계에 해당될 터이다. 정교함이나 현실성은 오히려 떨어진다.

    경제통일이라고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지 분명치 않다. 단순히 경제교류와 협력이 증가했다고 해서 경제통일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부 정책수단이 나와 봐야 알겠지만 그렇다고 별로 달라질 것 같지도 않다. 경제통합에서 정치통합으로 나아간 유럽연합(EU)을 염두에 둔 듯하나 EU는 국가 대 국가의 문제였고, 우리는 분단된 민족 내부의 문제여서 비교의 맥락이 다르다.

    국어학자 의견도 구한 이흥구

    정치통일은 더 모호하다. 어떤 상태가 정치통일인가. 연합인가, 연방인가. 아니면 단일 국가로서의 완전한 통일인가. ‘경제’에서 ‘정치’로 넘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경제통일과 정치통일이 중첩되면서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 박 전 대표나 그의 브레인들이 대중의 가슴에 호소하기 위해 일부러 알기 쉽게 구호성 통일방안을 만든 것이라면 또 몰라도 지금 상태로는 적실성이 있는 통일방안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다.

    명색이 ‘통일의 설계도’라면 자기 철학을 갖고 좀 더 철저히 준비하고 검토했어야 했다. 남북문제를 비교적 잘 알고, 가장 먼저 통일방안을 내놓을 만큼 소신도 있다는 점은 평가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 나오게 된 과정을 되짚어 보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이 방안을 만든 이홍구 당시 통일부 장관은 서울대 교수로 있을 때부터 복지공동체(Korean Commonwealth) 연구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를 기초로 통일방안을 구상했다. ‘공동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그는 북한의 통일방안인 고려연방제의 ‘연방’까지도 싸 버릴 수 있는 보자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공동체가 바로 그 보자기였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의 ‘한’자도 굳이 한글로 썼다. 한자(漢字)를 쓰게 되면 ‘한(韓)’을 써야 하는데 이 경우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한(韓)’이 되므로 북한을 불필요하게 자극할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심하게 신경을 썼다. 더욱 완벽한 통일방안을 위해 그는 많은 전문가와 각계각층 인사들의 조언을 구했고, 심지어는 국어학자들의 의견까지도 들었다. 그렇게 만들었기에 20년이 다 되는 오늘까지도 정부의 통일방안으로 살아 있는 것이다(통일방안과 대북정책을 혼동하지 말기 바란다).

    ‘차별화’ 중압감에서 벗어나야

    박 전 대표는 통일론의 역사를 좀 더 천착할 필요가 있다. 한민족공동체통일방안은 탈냉전의 국제기류 속에서 정권에 관계없이 우리 통일정책의 대종을 이뤄 왔다. 그렇다면 그 기초 위에서 그동안 달라진 남북관계와 주변정세의 질적 변화를 고려해 더욱 정교하고 실현 가능성이 있는 통일방안을 내놓아야 한다.

    모든 정책이 그렇듯이 통일방안도 진화하는 것이다. “뭔가 차별화해야 한다”는 공연한 중압감 때문에 거칠고 생경한 통일방안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 왜 거꾸로 가려고 하는가. 그보다는, 남북 간 신뢰는 어떻게 확대할 것인가, 통일에 필요한 국제협조는 어떻게 얻어낼 것인가를 놓고 고뇌하고, 고뇌의 흔적을 새 통일방안에 담아야 한다. 그것이 대선 주자로서 통일문제를 다루는 참된 자세일 것이다. 자신의 고유 브랜드를 붙일 수 있는 통일방안 만들기가 어디 그리 쉬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