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28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란에 이 신문 김종혁 시회부문 부에티터가 쓴 '시민단체, 그 우상과 이성'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정부 초기인 2004년의 일이다. 기업 대외업무 담당자인 이모씨가 정부 부처를 찾아갔다. 불합리한 제도 개선을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담당 공무원은 고맙게도 하소연을 끝까지 들어줬다. 어처구니없는 건 그 다음이었다. 공무원은 미안한 표정으로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한 시민단체를 거명하며) 거기서 그 문제 다루는 분하고 한번 상의해 보세요"라고 말했다. 이씨는 "울컥 화가 치밀더라"고 회고했다. '언제부터, 무슨 권한으로 시민단체가 공무원 상전이 됐느냐'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이씨는 당시엔 그저 고이 물러나왔다고 했다.

    김대중(DJ)-노무현 두 대통령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는 많이 달라졌다. 정경유착과 부패가 상당 부분 감소한 것은 칭찬해야 하겠다. 돈 선거도 사라지는 추세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적지 않았다. 과거에 잘나갔던 인사들에게 "당신 뭐하고 살았어"라며 딱지 붙이고, 나와 의견이 다르면 수구꼴통으로 몰아세우는 '문화혁명' 분위기 같은 것 말이다.

    정체가 모호한 시민단체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 '시민'의 이름으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현실도 나는 'DJR(DJ+Rho) 정권'의 잘못 중 하나라고 본다. 그런 세상이 된 데는 음으로 양으로 두 정권의 지지와 협조가 있었다는 걸 부인하기 어렵다.

    이게 단순히 내 생각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지난달 22일 서울 대학로 흥사단 강당에서는 시민단체들의 자기 반성이 있었다. 한때 시민단체의 상징이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과 기독교윤리실천운동.녹색미래.흥사단 등이 고해성사에 나섰다. 박병옥 경실련 사무총장은 "시민단체가 정부 2중대라는 비판을 많이 받고 있어 충격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뒤늦게나마 그런 반성을 해 줘 정말 고맙다. 다만 진짜로 비난받을 '시민'단체들은 코웃음 치며 떨어져 있고, 그나마 나았다는 경실련 등이 나선 게 씁쓸할 뿐이다.

    기왕지사 말이 나왔으니 좀 더 솔직해지자. 요즘 시민단체가 진짜로 시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아직도 시민단체가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공정하다고 믿는가? 미안하지만 당신의 '정치감각+ 현실인식'은 크게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시민'이란 명칭만 붙이면 무소불위가 되는 게 요즘 현실이다. 그래도 용기를 내 따질 건 따져보자. 왜 일부 시민단체는 문제인가.

    우선 과도한 대표성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미군기지 이전 반대 시위 같은 건 수백 개의 시민단체가 참여한다. 숫자로 보면 어마어마해 보인다. 하지만 수십 개의 시민단체에 동시에 이름을 걸어놓은 사람이 적지 않다. 사무실 한두 군데에 수십 개의 시민단체가 모여 있는 경우도 있다. 이들이 과연 얼마나 많은 '시민'을 대표하는지 알 수가 없다.

    둘째로 폭력성이다. 한두 번도 아니고 걸핏하면 쇠파이프 들고 나오는 걸 시민단체라고 할 수 있는가. 상식으론 이해가 안 된다.

    셋째로 당파성이다. 연세대 유석춘 교수의 자료에 따르면 참여연대 임직원 416명 중에서 150명이 청와대와 정부 고위직 등 313개 공직을 맡았다고 한다. 노무현 정부에서 장.차관급 감투를 쓴 여성의 상당수가 여성단체연합 출신이다. 이쯤 되면 시민단체라는 표현이 민망하다. 차라리 친정부 싱크탱크라고 부르는 게 더 걸맞아 보인다.

    넷째로는 무책임성이다. 누구나 평가와 심판을 받는 게 세상 이치다. 정당은 선거로, 공무원은 인사고과로, 기업은 고객의 선택에 의해, 언론은 독자들에게 심판받는다. 하지만 시민단체는 속된 말로 그저 내지른다. 일단 공격한 뒤 '아니면 말고'식인 경우가 적지 않다.

    시민단체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려는 게 결코 아니다.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선 시민단체가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하지만 정치 권력과 사실상의 동거 관계에 있는 시민단체라면 그건 아니다. 그런 단체들에 부탁한다. 제발 '시민'이니 '여성'이니 '중립'이니 하는 말로 진짜 시민들 헷갈리게 하지 말라. 차라리 무슨 무슨 이익단체.정치단체.이념단체로 이름을 바꾸길 바란다. 그래야 진짜 시민들도 착시에서 벗어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