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8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김대중 고문이 쓴 <언론 공격에 동원된 '총알'들>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일찍이 요즘처럼 언론에 종사한다는 것이 민망하고 죄스러웠던 적이 없다. 대통령직에 있는 사람이 눈만 뜨면 언론을 공격해대고 집권 세력 사람들이 나라꼴 잘 안 돼 가고 있는 것이 모두 언론 탓이라고 질책해대니 마치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기분이다. 더더욱 민망하고 황당한 것은 언론에 삿대질을 해대는 권력 주변의 공격수들이 대부분 과거에 같은 언론 직군에서 한솥밥을 먹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노 정권은 권력과 언론 간의 대립각을 날카롭게 세우면서 언론계 출신들로 ‘전선(前線)’을 메우고 있다. 그래서 대립의 구도는 ‘기자 대(對) 기자’의 양상으로 치달아 왔다. 권력의 입장에서 보면 기자로 기자를 치는 이이제이의 수법이고, 언론의 입장에서 보면 어제의 동료가 오늘의 적이 된 꼴이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권력의 공격 대상이 비판 언론에 국한되는 듯 했는데 요즘은 정권 말기적 현상인지는 몰라도 친여·비판을 가리지 않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과거 정권들도 언론에 종사하던 사람들을 데려가 요긴하게 활용했었다. 당시로서는 기자들이 상황 파악이 빠르고 시쳇말로 엘리트 의식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취재전선에서 형성된 친분관계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언론 종사자들로서도 영구히 언론에 ‘말뚝’ 박으란 법은 없다. 기회가 있으면 여러 분야로 지평을 넓혀 가는 것이 사회를 위해서도 좋을 수 있다. 그러나 권력이 기자들을 데려다 쓴 것은 본질적으로 인재 기용의 성격 못지 않게 그들로 하여금 친정(언론)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했던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문제는 그런 것이 이 정권 들어서 교활하게 느껴질 만큼 그리고 너무나 노골적으로 변질하고 있는 점이다. 과거에는 좋게 말해 전직(前職)의 영향력을, 나쁘게 말해 압력을 동원하려는 의도가 강했지만 이 정권에서는 전직을 언론을 공격하는 ‘총알’로 써먹고 있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언론 홍보가 아니라 언론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권력이 동원한 언론 출신들로는 영향력도 얻을 수 없고 공격의 효율성도 떨어진다. 과거 그들이 언론사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과 지명도를 누렸건 상관없이 그들이 지금 언론계에서 어느 만큼의 긍정 평가와 신뢰를 받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과거 정권에 들어간 전직들로 인해 언론사들이 적지 않은 고충을 겪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들 대부분은 자기들의 전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려고 했다. 기자들이 정보기관에 불려가 물리적·정신적 고통을 받았을 때 그들은 오히려 기자들이 크게 다치지 않도록 배려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청와대의 전면에 배치된 기자 출신 언론 공격수들은 자기들의 전직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니고 있는지조차 의문이다. ‘지성과 언론의 위기’를 거론하며 현직들에 대해 섬뜩할 만한 증오심을 드러내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비판 신문의 종사자들을 궁지로 몰며 자신들의 과거 동료들을 나라의 방해꾼으로 치부하는 데 쾌감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과거의 언론계 압박이 막후적이고 방어적이었다면 지금 전직들의 행태는 공개적이고 공격적이다. 노 정권이 대 언론관계에서 실패했다면 그 원인은 여기에 있는지도 모른다.

    정권 쪽 사람은 “기자들이 정보기관에 잡혀가는 일은 없지 않느냐”며 언필칭 ‘언론 자유’를 들먹이지만 과거의 권력자들에게는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기자들이 나라를 해친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들의 권력 유지를 위해, 나라의 안보(물론 그들의 관점에서)를 위해 좀 봐달라는 투였다. 그리고 권력의 압력과 회유에 굴복하지 않는 언론인에게 속으로는 존경한 사례도 있었다.

    지금 청와대와 전직 언론 종사자들의 언행을 보면 속이 뒤집어진다. 부동산문제가 심각한 시점에 컴퓨터 앞에 앉아 방송사에 승소한 공무원들에게 칭찬 메시지를 보내는 대통령, 언론 보도 태도를 불신하며 KTV를 보라며 북치고 있는 대통령은 그렇다 치자. 그를 향해 맞장구를 치듯 ‘언론의 위기’를 역설하며 자기들이 얼마 전까지 몸담았던, 어쩌면 그들의 오늘이 있도록 키워준(?) 친정을 향해 독설을 퍼붓는 언론계 출신 비서들을 보면서 이것이 한국 언론의 총체적 일그러짐인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온다. 정치권력이란 그들을 그렇게 써먹고 버리는 일회용 정도로 여기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언론계라는 것이 겨우 저런 수준이구나 하고 뒤에서 낄낄거리는 것 같아 얼굴이 달아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