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동맹의 시작' 특별전시대통령기록관, 미국과 40여 차례 주고받은 70년 전 이승만 서한문 공개미국, 방위조약 우물쭈물거리자… 이승만, 반공포로 석방 '초강수 대응'아이젠하워 "무력시위 철회하라"… 댈러스 장관이 방위조약 협상 참여
  • ▲ 미국을 국빈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환영하고 있다. ⓒ대통령기록관 제공
    ▲ 미국을 국빈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환영하고 있다. ⓒ대통령기록관 제공
    "한미방위조약이 체결됐음으로 우리의 후손들은 앞으로 누대(屢代)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 1953년 8월9일 담화문 -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

    '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동맹의 시작' 전시회가 20일 세종특별자치시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 열렸다. 대통령기록관은 한미동맹 70주년을 맞아 12월20일까지 세 달간 특별전시를 개최한다.

    전시회는 한미동맹이 아무런 대가 없이 나온 것이 아니라 각고의 노력 끝에 얻어낸 값진 결과물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해 마련됐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외교 서한문은 1950년대 한미관계사를 넘어 한국 현대사를 이해할 수 있는 역사·기록학적 가치가 큰 기록물로 평가받는다.

    이에 본지는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생생한 현장을 알아보기 위해 세종시 대통령기록관을 찾았다. 서한문을 통해 △1950년대 정전협정 체결 △반공포로 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과 관련한 한미 간 일련의 협상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 ▲ 전시장 내 관람객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작성한 서한문을 보고 있다. ⓒ임준환 기자
    ▲ 전시장 내 관람객들이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작성한 서한문을 보고 있다. ⓒ임준환 기자
    "중공 잔류 허락하는 것은 대한민국에 사형선고나 다름없어"

    1953년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1950년 6월25일 북한의 기습납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은 국토 산하를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한반도 중부에서 전선이 고착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1951년 유엔군과 공산군 사이에 정전 논의가 시작됐다. 그러나 정전 논의가 포로 교환, 휴전선 위치문제 등으로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양측 간 합의점을 찾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전선이 고착된 지 2년 뒤인 1953년,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정전협상이 급진전됐다. 하지만 이 전 대통령은 정전 이후 미군이 철수한 한반도에서 언제든지 북한과 중공이 재남침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이 전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에게 방위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 전 대통령이 제안한 방위조약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냉전이 막 시작되던 당시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 재참전하게 될 것에 부담을 느낀 것이다.

    이 전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에게 여러 통의 서한을 보내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 전 대통령은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에게 보낸 서한에서 "앞으로 대한민국의 안전을 보장하고 극동의 안정을 위해서는 미국이 필리핀·일본·뉴질랜드와 이미 체결한 것과 유사한 상호방위조약을 반드시 맺어야 한다"며 "그러한 조약 없이는 우리 양국이 이미 치른 엄청난 희생이 무의미하게 계속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이 전 대통령은 "중공 세력의 한국 잔류를 허락하는 정전협정은 대한민국이 사형선고를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만약 제가 그러한 내용에 합의하더라도 차후의 전개로 인해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자들은 귀하를 강력하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 침략하지 않는다"며 "공산국가들이 귀하의 약점을 찾거나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세계는 전쟁의 벼랑 끝에 떠밀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 '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 동맹의 시작' 전회회 입간판. ⓒ임준환 기자
    ▲ '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 동맹의 시작' 전회회 입간판. ⓒ임준환 기자
    이승만, 방위조약 위해 초강수… 반공포로 석방으로 미국 '화들짝'

    이 전 대통령은 방위조약과 관련한 미국 정부의 우유부단한 태도에 1953년 6월18일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초강수를 둬 미국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은 대한민국 각지에 수용돼 있던 북한·중국 출신 포로 중 반공 성향을 가진 포로를 석방한 일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마음만 먹으면 휴전협상을 모두 엎어버릴 수 있다는 경각심을 미국에 심어줬다.

    결국 이 전 대통령의 대담한 도박은 성공했고, 미국으로 하여금 방위조약 협상 테이블에 나오게끔 만들었다.

    "미국, 한국의 군사적 행동 돕는다고 약속하라" 강력요구

    약 한 달 뒤인 7월24일 이 전 대통령은 덜레스 전 미 국무장관에게 '대한민국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공격받는다면 즉각적·자동적 군사지원을 한다'는 조항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포함해 달라는 서한문을 보냈다. 

    서한문에서 이 전 대통령은 "정전협상은 거의 체결되려 하고 있다. 그 전에 첫째, 대한민국이 외부의 적으로부터 공격받을 경우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군사지원을 한다는 조항을 포함할 것으로 기대해도 되겠는지 묻는다. 둘째, 정치회담이 90일 안에 결렬되면 미국이 한국과 함께 우리 땅에서 중공 침략자들을 몰아내는 군사적 노력을 재개할 것으로 기대해도 되겠는지 묻는다"고 적었다. "이를 약속할 수 없다면 (미국이 대한민국에) 물질적 지원과 일반적 경제원조를 제공할 것을 기대해도 되겠는지 묻는다"며 군사적·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다.

    이에 덜레스 전 장관은 다음날인 7월25일 '정전협정과 상호방위조약에 관한 미국의 입장을 표명한 서한'을 통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1953년 7월11일 이미 대한민국 정부의 입장을 언급하며 구체적인 보장을 했다"고 이 전 대통령에게 전했다.

    덜레스 전 국무장관은 서한에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 정부의 입장을 결단하기 전에 현재 불확실하게 남아있는 두 가지 중요한 문제에 대한 귀국의 답변을 아는 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한 것에 대해 놀랐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각하께서 결정하신 것으로 알았으며 우리의 답변을 알고 계신 것으로 생각했다"고 밝혔다.

    덜레스 전 국무장관은 그러면서 "만일 정전협정 위반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도발되지 않은 공격을 받는다면, 당연히 우리의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군사적 대응에 의지해도 된다"며 "그러한 공격은 대한민국에 대한 공격일 뿐 아니라 유엔군사령부와 그 휘하 미군에 대한 공격이기도 하다"고 안심시켰다.  

    아울러 덜레스 전 장관은 "미국은 역사상 그 어느 국가에도 귀국에 제공한 것처럼 많은 것을 제공한 적이 없다. 앞으로도 우리를 신뢰할 수 있다는 점을 약속한다"고 동맹 의지를 굳건히 했다.
  • ▲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가조인 문서. ⓒ임준환 기자
    ▲ 한미상호방위조약의 가조인 문서. ⓒ임준환 기자
    주한미군 주둔 합의… 서울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며칠 뒤인 1953년 8월8일, 양국은 미국의 군대가 한국에 주둔하는 것으로 합의하면서 서울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가조인했다.

    가조인 전날 1953년 8월7일 덜레스 전 장관은 이 전 대통령에게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관한 서한'을 보내 가조인 전 동맹 의지를 다시 한번 단단히 다졌다.

    덜레스 전 장관은 "양국 정부는 방위조약이 발효된 이후 우리의 공통된 임무 이행을 위한 것에 관해 조속히 협상할 것"이라며 "미국은 정전협정 전 정치회담에서 한국 대표와 유엔군사령부 측의 다른 대표들과 협조해 한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덜레스 전 장관은 "이 조약은 양국이 단합해서 함께 행동하도록 구성됐으며 '공산 침략'의 위협에 맞서 함께 싸웠던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더욱 단단하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대한민국은 자주적으로 내정문제를 통치할 수 있고 여기에는 북한의 공산 침략자들을 추방하는 것도 포함된다"며 "한·미는 공동의 위험에 대해 상호 간 협력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 ▲ 전시회장 내 자료. ⓒ임준환 기자
    ▲ 전시회장 내 자료. ⓒ임준환 기자
    대한민국 최초 외국과의 동맹 조약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1953년 10월1일, 대한민국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한미합의의사록에 따라 유엔군에 유지하는 조건으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공식 체결했다.

    이 전 대통령은 1953년 6월부터 약 4개월간 아이젠하워 전 미 대통령, 덜레스 전 미 국무장관과 서한 40여 편을 주고받으며 조약 체결을 위해 노력했다. 

    이 전 대통령은 정전협정 체결 이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희망했지만 협의가 난항을 겪으며 지연됐다. 

    한국이 공산세력에 재침략당할 경우 미국이 자동으로 한국에 군사를 지원한다는 조항에 양국 간 이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미국이 이 전 대통령의 뜻에 합의하면서 대한민국 최초의 외국과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1953년 10월1일 워싱턴D.C.에서 변영태 당시 외무부 장관과 존 포스터 덜레스 당시 미 국무장관의 조인하에 1954년 11월18일 발효됐다. 해당 조약에는 한국이 공격의 위협을 받을 때 미국이 원조한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이 전 대통령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면서 대한민국과 미국은 현재까지 군사적·경제적 동맹을 지키고 있다. 대한민국의 후대 대통령들 역시 이 전 대통령이 만들어온 기반에서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며 상호 교류해왔다.
  • ▲ '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 동맹의 시작' 전시회장 정면에 위치한 안내 글귀. ⓒ김성웅 기자
    ▲ '이승만 대통령 서한문으로 살펴보는 한미 동맹의 시작' 전시회장 정면에 위치한 안내 글귀. ⓒ김성웅 기자
    한미상호방위조약, 눈부신 경제발전의 토양이자 안보의 근간

    한미상호방위조약은 이 전 대통령의 공(功) 중 대표적 성공 사례로 꼽힌다. 방위조약으로 인해 북한과 중국은 현재까지도 전면 남침하지 않았다. 이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의 평화와 안정에 큰 기여를 한 셈이다.

    또 방위조약으로 인해 상당한 액수의 국방비를 절약했다. 이는 국가 역량을 경제개발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준 토양이 됐으며, 이로 인해 한강의 기적이 촉발되면서 눈부신 성장을 하게 됐다.

    방위조약은 한국에 투자하는 외국계 자본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수도 서울이 휴전선에서 불과 50km 떨어져 있는 불리한 안보 조건에도 '미국이 한국을 지켜준다'는 신뢰가 해외 투자 유치에 큰 기여를 했다.

    방위조약은 미국에도 긍정적 효과를 불어넣었다. 조약이 체결되던 1953년 당시 한국은 세계 최빈국으로서 미국 내에서도 '방위조약으로 얻는 미국의 이익이 적다'는 등의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한강의 기적'으로 한국이 엄청난 경제발전을 했고, 방위조약 체결 반세기 만에 미국을 필두로 하는 자유진영의 주요 국가로 부상했다. 이에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미국으로서도 모범적 선전 사례가 됐다.

    특히 방위조약은 동북아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일본에서 한반도로 확장시켰는데, 이는 최근 중국으로 인해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그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북한과 중국의 처지에서는 한반도의 적화통일을 좌절시킨 가장 실질적인 이유다. 북한·중국, 그리고 국내 좌파 세력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폐지하라고 요구하는 주장이 그 근거다.
  • ▲ 대통령기록관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책상과 사무용품 등을 재현해서 전시 중이다. ⓒ김성웅 기자
    ▲ 대통령기록관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책상과 사무용품 등을 재현해서 전시 중이다. ⓒ김성웅 기자
    "이승만 통해 자유민주주의 지킬 수 있었다… 서한 주고받는 과정 속 치열했던 역사 볼 수 있어"

    행사 관계자인 안대희 학예연구관은 "저희가 2020년도부터 이 전 대통령 서한문 복원작업을 했다"며 "그 작업이 올해 5월에 완료했는데 마침 한미동맹 70주년이기도 해서 전시를 통해서 국민들께 알리면 좋겠다는 취지에서 전시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안 연구관은 이번 전시회로 인해 국민들께 전달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는 본지의 질문에 "이 전 대통령의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다"라며 "서한문에는 끈질기게 (미국을) 설득해 내는 과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데, 그러한 수고를 국민들이 알아줬으면 한다"고 설명했다.

    최이호 행정안전부 대통령기록관 기록서비스과장은 "전시회를 통해 당시 이 전 대통령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한반도의 안전과 경제 재건을 위해 어떠한 헌신과 노력을 했는지 직접 볼 수 있게 됐다"면서 "이번 전시로 한미 대통령의 의사결정 과정을 많은 국민이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최 과장은 "저도 이번에 전시하면서 처음 알게 된 사실들이 많다. 한미동맹과 관련해 이 전 대통령부터 역대 대통령까지 내려온 역사적인 과정들을 알 수 있었다"며 "서한을 주고받는 과정 속에서 그 당시에 치열했던 역사적인 사실에 대해 알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아울러 최 과장은 "우리나라는 이 전 대통령을 통해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다"며 "우리가 미국과 함께 성장하고 동반 협력하면서 지금 그 토대 위에서 선진국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최 과장은 그러면서 "많은 국민들이 이번 전시회를 통해 그런 긍정적인 면도 볼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최 과장은 "25일부터 (가로등에) 현수기를 30대 정도 설치할 예정이고 10월부터는 서울 광화문 등에 있는 전광판에도 관련 자료를 홍보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전시회를 관람하러 온 최예령(56·여) 씨는 "우연히 한미상호방위조약 전시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인근이라 찾아왔다"며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고 안 좋은 점만 알고 있었는데 전시회를 통해 알게 된 정보는 새로웠다"고 말했다.

    최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서한문에 담긴 노력 덕분에 우리가 지금 편하게 살 수 있는 것 같다"면서도 "생각보다 규모도 작고 사람들도 많이 찾아오지 않아서 홍보를 더 해야 하지 않나 싶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 ▲ 미국의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선물로 줬던 낚싯대가 전시돼 있다. ⓒ김성웅 기자
    ▲ 미국의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이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선물로 줬던 낚싯대가 전시돼 있다. ⓒ김성웅 기자
    역대 대통령 선물로 보는 한미 간의 우호

    대한민국의 후대 대통령들은 이 전 대통령이 1960년 4월 임기를 마치고 나서도 미국과 끊임없이 친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 대표적 예시로 미국 대통령이 한국 대통령에게 보낸 선물이 있다.

    아이젠하워 전 대통령은 이 전 대통령에게 낚싯대를 선물했다. 최 과장은 "이승만 대통령은 낚시를 상당히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다. 주말에 경복궁 경회루나 광나루에서 낚시를 즐겨 했다고 전해진다"며 "이 전 대통령에게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미국 덜레스 법무장관을 통해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을 할 때 오면서 줬다"고 설명했다.  

    이 외에도 닉슨 전 대통령은 1969년 8월23일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아폴로 11호 달 착륙 기념패'를 전달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2013년 5월7일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미국 방문 기념 기념비석'을 선물했다.

    또 클린턴 전 대통령은 1999년 7월3일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미국 위인 초상화 전집'을 전달했고, 트럼프 전 대통령은 2018년 5월22일 문재인 전 대통령에게 앤디 워홀의 '시베리아 호랑이 판화'를 주기도 했다.

    이 같이 이번 전시회에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관한 역사적 산물뿐 아니라 역대 대통령들이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선물들도 관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