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호문화재단, 26일 한국프레스센터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학술총회 개최홍후조 교수 "이승만은 분단 원흉, 김구는 통일 화신? 韓 교육 문제 많아"이철순 교수 "이승만정권, 중대한 위배는 없고 부분적 위배만 있었다"
  • ▲ 우호문화재단이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주제로 개최한 학술회의가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고 있다. ⓒ정상윤 기자
    ▲ 우호문화재단이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주제로 개최한 학술회의가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고 있다. ⓒ정상윤 기자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해방 전후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업적을 되새겨야 한다는 취지의 학술회의가 개최됐다. 

    우호문화재단은 26일 오후 2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학술회의를 열었다. 

    행사에는 4·19혁명을 주도한 이영일 전 국회의원을 비롯해 △고영주 자유민주당 대표 △김문수 경제사회노동위원장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 △오영섭 대한민국사연구소장 △김권정 청와대관리활용기획추진단 학예연구사 △서희경 서울대 한국정치연구소 연구원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 등이 참석했다. 이 외에도 150여 명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신철식 우호문화재단 이사장은 인사말에서 "우리나라의 근·현대사가 너무나도 충격적으로 왜곡·좌경화됐고, 대한민국의 정체성 확립과 올바른 역사를 세우기 위해 학술회의를 개최했다"고 설명했다.

    신 이사장은 "대한민국은 기적을 이뤄 세계가 인정하는 6대 강국 중 하나가 됐다"면서 "기적을 이루는 데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유시장경제주의를 택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축사를 맡은 이영일 전 의원은 "이승만 대통령이 우리나라에 자유민주주의를 심었다"며 "남·북한의 민족은 같지만, 국가가 다르고 현재 발전의 양상이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 전 의원은 "올해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지 70주년인데, 이 조약은 당시 가장 약한 나라의 대통령이 가장 강한 나라의 대통령을 만나 맺은 조약"이라고 소개했다. 

    이어 이 전 의원은 "요즘 우리나라의 주변 정세가 불투명하고 혼미하다 보니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보여준 지도력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친다"고 회고했다.

    고영주 대표는 "오늘은 과거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성명'을 발표한 날로, 학술총회 덕분에 이승만 대통령의 공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어 뜻 깊게 생각한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했던 일 중 가장 훌륭한 일은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한 일"이라고 언급했다. 

    고 대표는 "이승만은 이해관계에 따라 (민주주의를) 택한 것이 아니라, 그 무렵 공산주의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아 그렇게 행동한 것"이라며 "국민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체제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주제로 열린 우호문화재단 학술회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 이영일 전 국회의원이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주제로 열린 우호문화재단 학술회의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정상윤 기자
    "민주주의 사상·체제에 대한 연구 없어… 안타까움 커"

    학술회의 '해방 전 이승만의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 구상'의 발표를 맡은 오영섭 대한민국사연구소장은 "이승만은 자유민주주의 도입과 채택,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공업화·산업화 기반 구축 등 우리 역사에 영원히 기억될 유산을 남겼다"면서도 "여전히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체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없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오 소장은 "역설적으로,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를) 공기처럼 너무 자연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학문적으로 미흡한 부분을 낳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고 부연했다. 

    "해방 이후 '자유'를 미국이 가져다준 선물이라는 등 자조적이고 냉소적인 이야기들이 많다"고 전제한 오 소장은 "이와 달리 '자유'는 근대사회에 진입하면서 피와 땀과 눈물로 얻어진 역사적 성취물로서, 앞으로 이에 대한 깊은 연구가 나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 소장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목표는 반공·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통일 민족국가의 수립이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 ▲ 홍후조 교수가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주제로 열린 우호문화재단 학술회의에서 공개한 PPT 자료화면. ⓒ진선우 기자
    ▲ 홍후조 교수가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주제로 열린 우호문화재단 학술회의에서 공개한 PPT 자료화면. ⓒ진선우 기자
    "학생들, 편향된 교육 받아… '지적 정직성' 무너지고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인가? 소련식 민주주의인가?' 토론를 맡은 홍후조 고려대 교육학과 교수는 "자유가 모든 것의 '근본 가치'라는 것을 그동안 제대로 가르치고 배우지 못했다"며 "우리 교육은 자유민주주의를 통한 성장과 낙관주의 등 국민의 형성에 대해서는 안 가르치고 포스트 모더니즘을 먼저 가르친다"고 지적했다. 

    홍 교수는 "미국식·소련식 민주주의가 어느 새 남한식·북한식 민주주의로 바뀌었고, 이 부분이 다시 이승만과 김구로 치환돼 오늘날 진영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며 "학교교육에서도 아이들이 편향적인 교육을 받고 있다"고 우려했다.

    학교교육 문제와 관련, 홍 교수는 "현재 우리나라는 이승만을 독재자·가해자 프레임에 가둬 교육하고 있다"며 "이승만은 분단의 원흉, 김구는 통일의 화신으로 분리해서 가르치고 있다"고 개탄했다. 

    홍 교수는 "이승만과 김구가 아닌 이승만과 김일성을 대조해서 교육해야 하는데, AI 시대에 가장 중요한 '지적 정직성'이 무너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 ▲ 우호문화재단이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주제로 개최한 학술회의가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고 있다. ⓒ정상윤 기자
    ▲ 우호문화재단이 '이승만과 자유민주주의' 주제로 개최한 학술회의가 26일 오후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되고 있다. ⓒ정상윤 기자
    "이승만 정권이 자유민주주의 지킬 수 있었던 이유"

    '자유민주주의 관점에서 본 이승만정권' 토론를 맡은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승만정권을 단순히 독재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은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가로 막는다"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김일성 독재, 스탈린 독재, 히틀러 독재라는 말을 쉽게 쓰게 되는데, 이승만정권도 마치 동류의 독재인 것처럼 오해할 수 있어 위험하다"고 경계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1950년 이승만정권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던 이유를 이 교수는 "이승만의 개인적 신념에 따른 민주주의 교육의 실시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이 교수는 "메인웨어링의 자유롭고 경쟁적인 선거, 정치적 권리 및 시민적 자유, 보통선거권, 선출된 정부의 통치능력 범주에서 이승만정권은 '중대한 위배'는 없었고 '부분적인 위배'만 있었다"고 언급했다. 

    이 교수는 "해당 범주 가운데 어떤 하나라도 '중대한 위배'가 있었다면 권위주의 체제로 분류될 수 있는데, 그런 사례는 없었다"며 "1954년과 1958년 3, 4대 총선이 그런 사례로 분류될 수 있으나, 우선 정기적인 선거가 실시됐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 교수는 "두 번의 총선에서 부정선거 사례가 발견되기는 했으나, 이는 국민들의 권리의식 신장과 언론의 보도의 자유 때문에 많이 알려진 것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해당 사례 중에서 선거 결과를 크게 바꾼 사례는 거의 없기에, 메인웨어링의 분류에 따르면 '부분적인 위배' 정도로만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박정희 경제개발계획' 뿌리, 원조는 이승만

    '산업화 기틀 다져 자유민주주의 뿌리 내린 12년'이란 주제로 마지막 발표를 맡은 김용삼 건국이념보급회 이사는 "이승만 정부는 전쟁 와중에도 교육만큼은 각별한 관심을 쏟았다"며 "당시 정부의 문맹 퇴치 교육은 그야말로 국가 총력전"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이처럼 범국가적 차원에서 추진한 문맹 퇴치 사업 덕분에 문맹률은 1958년 4.1%까지 떨어졌다"고 설명했다.

    김 이사는 북한식 토지 개혁의 모순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이승만은 미국 유학과 오랜 기간 미국 생활을 통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 본질이 사유재산의 보호라는 원칙이 몸에 밴 지도자였다"면서 "농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아닌, '유상몰수 유상분배'여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이러한 이유로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이후, 농지 문제를 개혁하고자 경자유전(耕者有田), '농토는 농민에게 돌려준다'라는 구상을 하게 됐다"고 언급했다. 

    김 이사는 "박정희 시절 시행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원조는 이승만 정부 시절 수립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승만 시절 당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이 박정희 시절에 추진된 경제개발 계획에 큰 영향을 줬고, 초대 정부 시절 외국에 유학을 보낸 인재들이 속속 귀국해 경제개발계획 실행의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고 부연했다. 

    끝으로 김 이사는 "이승만 시대는 독재의 어두운 시대가 아니라, 참다운 인권과 개인의 자유가 만개한 자유민주주의 시대로 이행하는 데 큰 발판이 됐다"며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12년간 건국을 이뤘으며, 문맹 퇴치와 인재 양성을 통해 산업화로의 도약을 위한 기초를 닦는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