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초까지 북한 2인자… 김정일을 김일성 후계자로 추천, 세습독재 실마리초대 당 조직지도부장 때 반발하는 빨치산 출신 ‘갑산파’ 모조리 숙청'보천보전투' 항일 투쟁한 진짜 김일성은 김광서… 일본 육사 출신 북한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 만주 공산유격대 출신 소련군이 조만식에게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으로 소개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환영대회' 열어 김성주를 대중에 각인시켜일본군 "보천보 전투 직후, 중국 무송현에서 김일성 사망" 발표
  • ▲ 김일성 동생 김성주가 101세로 사망했다. 사진은 지난 2015년 조선중앙TV의 보도장면.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김일성 동생 김성주가 101세로 사망했다. 사진은 지난 2015년 조선중앙TV의 보도장면.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101세로 사망했다고 북한 관영매체들이 15일 보도했다. 김영주는 일제강점기 관동군의 통역을 맡은 ‘앞잡이’로도 알려졌으며, 김씨 일가 우상화와 세습독재에도 기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일성 막내 동생 김영주… 1970년대 김정일 후계 구도 추진 후 막후서 움직여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관영매체들은 이날 “김일성훈장·김정일훈장을 받은 공화국 영웅인 김영주 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명예부위원장이 서거했다”며 김정은이 "그의 서거에 깊은 애도를 표하며 화환을 보냈다”고 보도했다.

    북한 매체들은 “김영주는 당과 국가의 중요 직책에서 오랫동안 사업을 하며 당의 노선과 방침을 관철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투쟁하였으며, 사회주의 건설을 힘 있게 다그치고 우리식 국가사회제도를 공고하게 발전시키는 데 공헌했다”고 그를 추모했다.

    1920년생으로 알려진 김영주는 김일성의 막냇동생으로 초대 노동당 조직지도부장, 정무원 부총리 등을 지낸 김일성의 최측근이자 2인자였다. 김일성 세습독재 체제를 만드는 데도 공을 세웠다. 1970년대 초반 7·4남북공동성명을 만드는 데 공헌했지만 이후 건강이 매우 나빠져 김정일을 김일성의 후계자로 추천한 뒤 시골로 내려가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김영주는 김일성이 죽기 8개월 전인 1993년 12월 노동당 제6기 제21차 전원회의에서 국가 부주석에 임명됐지만 별다른 활동은 하지 않았다.

    관동군 통역이었던 김영주, 해방 후 소련에 붙어… 김일성 동료 숙청, 권력 세습 추진

    김영주는 일제시절 고등보통학교(현재의 대학교)를 졸업했다. 젊은 시절 중국을 침략했던 관동군 헌병 보조로 통역을 맡았다고 알려졌다. 당시 일본군 헌병의 통역은 보통 지원제로, 한국인의 심리를 잘 알기에 일본군보다 더 악질적으로 항일운동가를 적발해냈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1945년 해방 직후에는 소련군 군정이 실시한 시험에 합격, 소련으로 유학가 모스크바종합대 정치경제학부와 모스크바정치대학에서 법학 석사 학위를 받고 1953년 3월 북한으로 돌아갔다. 

    북한 귀국 후 김영주는 김일성을 등에 업고 권력 핵심부에서 활동했다. 1960년대 들어 갑산파가 김영주를 가리켜 “일제 부역자가 어떻게 조직지도부장이냐”고 반발하자 이들을 모두 숙청했다. 갑산파는 ‘보천보전투’를 비롯해 1930년대부터 김일성과 함께한 동료들이다.

    일각에서는 “김일성이 어릴 적부터 독립운동을 했는데 그의 막냇동생이 무슨 친일파였겠느냐”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으로 끌려가 통역을 한 것일 뿐이고, 그의 형은 독립운동가”라며 김영주의 친일활동을 과소평가하기도 한다.

    ‘가짜 김일성’ 김성주에 대한 학자, 해방 직후 목격자들의 증언들

    이런 주장은 김일성이 ‘진짜 김일성’일 때에만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북한 김일성이 ‘가짜’라는 주장과 증언은 상당히 많다. 2004년 3월 시사주간지 ‘미래한국’은 ‘가짜 김일성’과 관련해 당시까지 나온 주장과 여러 증언을 정리해 실었다.

    매체는 “보천보전투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김일성을 연구하다 수년 전 타계한 이명영 전 성균관대 정치학과 교수는 저서 <김일성 열전>을 통해 북한의 역사 조작을 밝힌 바 있다”고 지적했다. 이명영 교수는 책에서 “보천보전투의 김일성은 1887년 태어난 일본 육사 출신으로, 본명은 김광서”라며 “북한 김일성이 보천보 항일투쟁의 김일성으로 둔갑한 것은 소련이 해방 후 북한에서 공산정권 수립에 용이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명도 높은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1945년 8월 해방 전에 소련 지휘 아래 있던 만주 공산유격대 출신 김일성은 본명이 김성주이며, 북한에 처음 왔을 때는 김영환이라는 이름을 썼다”고 지적했다.

    매체에 따르면, 소련군은 1945년 10월11~12일 평양 시내 일식집 ‘다미야’라는 곳에서 조만식 선생이 위원장이던 평남인민정치위원회 회원들에게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소련군은 그해 10월14일 평양공설운동장에서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군중대회’를 열어 김성주로 하여금 김일성 행세를 하게 했다는 것이다.

    매체는 “(군중대회) 연설에 앞서 스티코프 점령군사령관(소련군 대장)이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했지만 참석자들은 33세의 젊은 김성주가 김일성 장군이라고 믿지 않았다”는 당시 군중대회 현장에 있었던 전 평안남도 지사 박인각 씨의 증언도 전했다.

    월북 후 北외무성 국장 지낸 박갑동 “보천보전투 참전자들, 김일성 가짜라 확인”

    또한 해방 당시 신문기자였다가 6·25전쟁 이후 월북, 북한 외무성 국장까지 지낸 박갑동 씨도 “평양에서 있었던 김일성 장군 환영식 사진을 보천보전투에 참전했던 박달·박금철에게 확인시켰더니 사진 속 인물(김성주)이 김일성이 아니라고 증언했다”며 “박달·박금철에 관해서는 보천보전투에 대한 일본 측 판결문인 ‘혜산사건 판결’에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이밖에 김일성을 연구하며 <김일성 평전>을 낸 바 있는 재일동포 출신 허동한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도 “1937년 보천보전투 후 김일성 장군을 뒤쫓던 일본군이 그해 11월, 중국 백산시 무송현에서 그가 죽었다고 공식 발표했다”면서 “그로부터 4개월 뒤 김일성 행세를 하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이 사람이 평소 우쭐대기 좋아하는 성격의 김성주였다”고 밝혔다고 매체는 전했다.

    즉,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주장 자체가 거짓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