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암살사건 파헤친 다큐 '암살자들', 예술영화관 상영 불발영진위 "심사기준 미달"… 배급사 "인권 다룬 예술영화 맞다" 반발
  • ▲ 김정남 암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암살자들' 포스터. ⓒ사진 제공 = 더쿱·왓챠·Kth
    ▲ 김정남 암살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 '암살자들' 포스터. ⓒ사진 제공 = 더쿱·왓챠·Kth
    북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이 암살된 사건을 파헤친 다큐멘터리 '암살자들(Assassins)'이 지난달 10일 영화진흥위원회(이하 영진위)로부터 '예술영화'로 인정받지 못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 영화가 '독창성'이나 뛰어난 '미학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워 심사대상이 되지 않는다는 게 공식적인 불인정 사유다.

    예술영화는 상업영화와 달리 예술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고 만들어진 영화를 가리킨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공공기관인 영진위는 문화콘텐츠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 매월 예술영화를 선정, 해당 작품들의 '예술영화 전용관' 상영을 지원하고 있다.

    다큐멘터리가 일반 극장에서 블록버스터 등 상업영화들을 제치고 상영관을 확보하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에 따라 이달 중순 개봉을 목표로 이 영화를 들여온 수입·배급사 측에 빨간불이 켜졌다.

    '암살자들'의 수입 및 공동배급을 맡은 더쿱과 왓챠, 제공사 Kth는 지난 7일 입장문을 내고 영진위에 '암살자들'의 예술영화 불인정 사유와 명확한 심사기준을 공개할 것을 촉구했다.

    배급사 측은 "'암살자들'은 지난해 선댄스영화제에서 첫 공개 돼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으로,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작품성으로 호평받은 웰메이드 다큐멘터리"라며 외국도 아닌 국내에서 예술영화로 인정받지 못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입장이다.

    영진위 "정치적 배경과 무관… 심사기준 미달로 '불허'"

    영진위가 내세운 예술영화 심사기준은 ▲작품의 영화 미학적 가치가 뛰어난 국내외 작가 영화 ▲소재, 주제, 표현방법 등에 있어 기존 영화와는 다른 새로운 특색을 보이는 창의적, 실험적인 작품 ▲국내에서 거의 상영된 바 없는 개인, 집단, 사회, 국가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으로서 문화 간 지속적 교류, 생각의 자유로운 유통, 문화다양성의 확대에 기여하는 작품 ▲예술적 관점,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문화유산으로서의 보존 가치가 있는 작품 등이다.

    배급사 측에 따르면 영진위는 "예술영화인정 심의 결과, 위원회 과반 이상 의견으로, 심사기준 제1항 1, 2, 3, 4호에 따라 불인정을 결정했다"고 지난달 17일 배급사 측에 통지했다.

    배급사 관계자는 "'암살자들'은 유튜브 몰래 카메라 촬영으로 착각하고 살인을 저지른 두 여성의 실제 증언과 살인의 결과가 불러온 국제적인 문제를 통해 '인권'이라는 본연의 가치에 관해 이야기한 작품"이라며 "어떤 부분에서 심사기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영진위 관계자는 14일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오로지 심사기준에 따라 예술영화 불인정이 결정된 것"이라며 "내용이나 특정 장면, 혹은 제작 규모 등으로 불인정 결정이 내려진 게 아니다"라고 밝혔다.

    또한 일각에서 이번 결정을 두고 '북한 눈치보기 아니냐'고 지적한 것에 대해서도 "정치적인 문제는 전혀 상관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소속 김승수 국민의힘 의원실 관계자는 "'김일성 회고록'은 출판을 허용하면서, 사실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다큐멘터리로 외국 영화제(선댄스영화제)에도 초청된 작품을 예술영화가 아니라고 해석한 것은 예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침해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심사 과정이 공정하게 진행됐는지를 살펴보기 위해 소위원회 회의록 열람 등을 영진위에 요청한 상태"라고 말했다.

    배급사 측은 지난 1일 영진위에 예술영화 재심사 신청을 냈다. '암살자들'의 예술영화 여부를 재검토하는 영진위 예술영화인정소위원회는 이달 말 열릴 예정이다.

    말레이시아 법원 "두 여성, 살인범 아냐" 전격 석방

    논란이 된 '암살자들'은 2014년 제30회 선댄스영화제에서 '더 케이스 어게인스트 8'로 감독상을 받은 라이언 화이트 감독의 네 번째 작품이다. 미국 감독이 연출하고 미국 제작사가 만든 미국 영화다. 지난해 12월 미국에서 개봉한 '암살자들'은 로튼토마토 신선도 98%, 팝콘지수 94% 등으로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김정남이 2017년 2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 국제공항에서 두 여성에 의해 피살된 사건을 재구성한 '암살자들'은 암살사건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암살에 연루된 두 여성의 관점에서 제작된 영화다.

    당시 김정남에게 화학무기인 VX 신경작용제 테러를 가한 이들은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28)과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25)였다. 두 사람은 김정남을 암살한 혐의로 기소됐다.

    경호원도 없이 홀로 서 있는 김정남에게 다가가 얼굴을 만지는 모습이 CCTV에 찍힌 이들에게 중형은 불가피해 보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2019년 3월과 5월 풀려나 자유의 몸이 됐다. 살해된 사람이 있고 가해자도 확인됐지만 말레이시아 법원은 이들이 살인범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유력한 용의자 두 명이 석방되면서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김정남 암살사건은 미제사건으로 종결됐다.

    어떻게 이들은 살인혐의를 벗고 2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까? 놀랍게도 두 사람은 "당시 몰래 카메라를 찍는 줄로만 알았다"며 자신들의 손에 묻은 약이 '독약'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유튜버 '미스터 와이' 주도… 범행 두 달 전부터 예행연습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은 지난달 4일 SBS와의 인터뷰에서 "그날도 다른 촬영일과 마찬가지로 재미있는 동영상을 촬영한다고 공항에 갔다"며 "'너하고 다른 여성 배우가 뒤에서 그 남성 배우를 놀라게 하면 된다'는 말만 듣고 그대로 했다"고 말했다.

    배우 지망생이었던 흐엉은 2016년 12월 커피숍 동료로부터 '미스터 와이'라는 유튜버를 만났다고 한다. 암살 사건이 있기 전까지 7~8차례에 걸쳐 공원 등지에서 몰래카메라 촬영을 했다는 흐엉은 "항상 손에 액체를 바른 뒤 사람 얼굴을 만지는 식으로 촬영이 진행됐다"고 설명했다.

    흐엉은 "왜 오렌지 주스나 무엇인가를 손에 뿌려야 하느냐고 물었더니 미스터 와이는 '그렇게 하면 더 웃기고 반응이 더 강하게 나온다'고 했다"고 전했다.

    사건 발생 후 더그 복 클락 기자를 통해 두 여성이 "리얼리티 TV쇼 장난인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는 사연을 접한 라이언 화이트 감독은 "얘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이 재판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3막 구조에 딱 맞아떨어진다는 걸 느꼈다"며 곧장 말레이시아행 비행기에 올랐다.

    BBC에 따르면 우여곡절 끝에 테러 장면이 담긴 CCTV 영상을 확보한 화이트 감독은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수천 시간 분량의 영상을 확인하고, 서로 다른 나라에 사는 두 여성의 가족을 인터뷰했다.

    그 와중에 흐엉인 척 가짜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어 자신에게 접근한 사람도 있었다고 밝힌 화이트 감독은 "김정은과 그의 주변 인물들이 이번 암살 사건을 전 세계에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다"며 "북한 지도자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방해하면 가족이라고 해도 어떤 대가를 치르게 되는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화이트 감독이 연출한 '암살자들'은 다큐멘터리 배급사 도그우프와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등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