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사가' 박영규가 쓴 조선의 질병과 의료, 명의 이야기500년 조선시대 의료의 모든 것… '조선 메디컬 백과사전'
  • 2019년 12월 중국 우한에서부터 시작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2년째 맹위를 떨치고 있다. '화이자'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의 백신이 개발됐지만 대다수 국가들은 여전히 '코로나19 팬데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상태다.

    그런데 놀랍게도 조선시대에는 이러한 전염병이 거의 매년 찾아와 '팬데믹'이 일상이었다. 현대 의학으로는 간단하게 치료하는 질병이 이 시대에는 공포의 병마로 인식됐다.

    지금이야 간단한 외과 시술로 제거할 수 있는 '종기'가 당시에는 최고의 의료 혜택을 받았던 왕들을 사망으로 몰고 갔다. '감기' 또한 의외로 혹독해서 오래 지속되는 경우 '과경(過經)'이라고 부르며 몹시 두려워했다.

    고작 감기로 생사가 갈렸던 조선시대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질병에 대처했을까? 역병으로 온 나라가 팬데믹에 빠지면 무엇으로 이겨냈을까?

    10가지 질병으로 본 조선시대 생로병사 풍속도


    '메디컬 조선 - 우리가 몰랐던 조선의 질병과 의료, 명의 이야기(도서출판 김영사 刊)'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체계적인 의료 시스템을 세우고 백성을 구제해온 조선인들의 질병에 대한 끈질긴 투쟁기다.

    ▲의학 교육의 산실 '전의감(典醫監)'과 대표 서민 병원 '혜민서(惠民署)' 등의 의료 시설부터 ▲세종의 '소갈증'과 송시열의 '치질' 등 조선 땅을 휩쓴 10대 질병과 그 치료법 ▲왕들이 앓았던 질병과 사인(死因) ▲그리고 의술로 이름을 날린 명의와 각종 의서까지.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500년 조선 의료의 모든 것을 흥미롭게 담아냈다.

    저자 박영규는 역사 대중화 열풍을 일으킨 밀리언셀러 실록사가로서 정치·사회·문화 등 주제의 경계 없이 다채로운 조선사를 집필해왔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조선의 질병과 의료에 초점을 맞춰 우리 역사의 새로운 얼굴을 조명했다.

    마음의 병인 '심열증(心熱證)'에 시달린 왕들, 의료사고로 사망한 효종과 찰밥이 목에 걸려 죽은 선조 등 구중궁궐의 사연부터 감기에 걸렸을 때 꼭 지켜야 할 금기 사항, 신비의 약재 '흡독석(吸毒石)' 등 민간의 대증요법과 생활상까지 조선의 생로병사 풍속도를 생생하게 그렸다.

    "왕은 격무와 스트레스에 시달려 장수하지 못했다?" "문종은 원래부터 병약했다?" "조선 왕실에는 종기 인자가 있었다?" 같은 잘못된 오해들도 바로잡는다.

    무료 찜질소에 행려병자 구제 시설까지… 多 의료 기관 운영


    오늘날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0세가 넘는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사람이 80세 이상 산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조선의 평균 수명은 기껏해야 30대 중반에 불과했고, 장수의 기준은 고작 환갑을 넘기는 것이었다.

    매년 찾아오는 전염병 등 각종 질병의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은 서민들이 무료로 이용할 수 있는 찜질 치료소(한증소: 汗蒸所)와 행려병자 구제를 위한 시설(활인서: 活人署) 등 여러 의료 기관을 운영했다.  

    또 전의감과 혜민서를 위시해 체계적으로 의관과 의녀를 양성했다. 덕분에 '허준'이나 '대장금' 등 시대를 풍미한 명의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 민간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의서 '구급간이방(救急簡易方)'과 동양의학을 대표하는 걸작 '동의보감(東醫寶鑑)' 같은 의서를 편찬, 전국에 반포해 모든 백성이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조선인들은 질병의 공격에 무기력하게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이들이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 끈질기게 분투하는 모습은 팬데믹 시대를 지나고 있는 요즘의 우리를 떠올리게 한다. 500년 전 조선인들이 겪은 위기와 그 극복 과정을 담은 이 책을 통해 우리 사회가 직면한 갈등의 일면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시대 팬데믹 대처… '거리 두기'가 유일한 방법


    당시 사람들은 팬데믹 같은 거대한 역병에서 어떻게 살아남았을까? 백신이 없었기 때문에 강력한 '사회적 거리 두기'만이 전염병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돈 있는 양반들은 산속에 피신처를 구해 그곳으로 달아났고, 거리 두기와 봉쇄의 단계를 넘어 역병 때문에 아예 마을을 버리고 산으로 피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도 1급 감염병으로 분류되는 '천연두(天然痘)'가 유행하면서 제사뿐 아니라 결혼과 같은 잔치도 금했으며, 심지어 부부간 동침도 하지 못하도록 했다.

    나라에서는 외출을 금지하는 봉쇄령과 접촉 금지령을 내렸다. 연산군 시기에는 원자가 천연두를 앓는 중에 국상이 생기자 곡읍(哭泣, 소리 내어 슬프게 우는 것)을 중지하고 궐문을 닫아걸었다.

    천연두가 만연한 시기에 숙종이 교외에서 청나라 사신을 만나려고 하자 당시 대사헌이던 윤휴가 임금의 거둥을 강력하게 반대하기도 했다. 거리 두기는 중국 사신이 왔을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

    피해망상증으로 진료조차 거부한 인조… 번침 치료만 받아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인조는 의심이 많아 쉽게 다른 사람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필체를 누군가 흉내 내어 모반의 도구로 사용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자식에게도 친필로 편지를 보내지 않았다. 병을 앓는 사실 역시 철저히 숨겨서 의관이 진찰을 권유해도 항상 거절했고, 설사 의관을 부르더라도 철저히 입단속을 시켜 병명이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했다.

    그런 인조가 유일하게 총애한 의관은 '번침(燔鍼)'의 달인 이형익이었다. 불에 달군 침을 의미하는 번침은 극히 위험한 처방이었고, 내의원에서는 이를 사술(邪術)로 치부하며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조는 자신의 오랜 병마가 그의 침을 맞은 후 호전됐다며, 임종의 순간까지 오직 이형익만을 곁에 두고 번침 치료를 받았다. 그런 까닭에 인조가 도대체 무슨 병을 앓다가 생을 마감했는지 '조선왕조실록'에조차 기록되지 않았다.

    조선 최초의 백신은 누가, 어떻게 도입했을까?

    18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천연두 예방접종법인 '종두법(種痘法)'이 처음으로 조선에 도입되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정약용이다.

    그는 자신의 의서 '마과회통(麻科會通)'에 '인두종법(人痘種法)'을 소개했다. 이는 천연두를 앓는 사람에게서 '두즙(痘汁)', 즉 진물을 취해 인체에 주입하는 방법이다. 소의 두즙을 접종하는 '우두종법(牛痘種法)'도 함께 기술했는데, 인두종법에 비해 훨씬 안전하지만 서양에서 들어왔다는 이유로 배척돼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못했다.

    이후 한동안 종두법이 중단됐다가 1876년 강화도 조약에 따른 개항 이후 지석영에 의해 널리 퍼져, 천연두 극복의 시금석을 마련하게 됐다.

    ■ 저자 소개

    박영규 = '역사 대중화의 기수', '실록사가'라는 찬사를 받은 대중 역사 저술가. 누적 200만부 판매를 기록한 밀리언셀러 '한 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을 출간한 이후 '한 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고구려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신라왕조실록', '한 권으로 읽는 세종대왕실록', '한 권으로 읽는 대한민국 대통령실록', '한 권으로 읽는 일제강점실록' 등 20여년간 9권의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시리즈를 펴냈다.

    최근에는 '크리미널 조선', '에로틱 조선',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 '조선 관청 기행', '조선 명저 기행' 등 새로운 주제를 통해 조선을 재조명하는 역사 교양서를 집필해오고 있다. 그 외 저작으로 역사서인 '환관과 궁녀', '춘추전국사', '박영규의 고대사 갤러리', 역사문화 에세이 '특별한 한국인', 동서양철학사 '생각 박물관', 불교 선담집 '깨침의 순간' 등이 있다.

    1998년 중편소설 '식물도감 만드는 시간'으로 '문예중앙' 신인문학상을 받고 소설가로 등단한 이후 대하소설 '책략', '그 남자의 물고기', '길 위의 황제'에 이어, 조선 정조의 암살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밀찰살인'을 썼다. 기존의 집필 주제에서 한 걸음 진보한 '인문학 리스타트'는 인류의 역사와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경제·사회·종교·철학 전반의 발자취를 하나의 흐름으로 꿰뚫어 독자들에게 폭넓은 인문교양 지식과 통찰을 안긴다. 수년간 역사 문학 교육원 '이산서당'을 운영했으며 현재 '다산학교'를 설립해 대안 교육을 실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