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전문가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 조선인 노동자 수기 공개… "진실 만이 양국 화해시켜"
  • 2018년 10월, 한국 대법원은 2014년 사망한 여모 씨 등 4명이 일본 신일철주금(新日鐵住金)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소송 재상고심에서 신일철주금이 피해자들에게 각각 1억원씩 배상하라는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일제 강제징용 배상 소송'으로 명명된 이 재판에서 원고들은 당연히 일제시대 당시 '징용공'이어야 했다. 하지만 원고들 중에서 '실제 징용공'이었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국·북한 전문 연구가 니시오카 쓰토무(西岡力) 교수(모라로지연구소 및 레이타쿠대학)가 쓴 '날조된 징용공 문제(でっちあげの徴用工問題)'는 이처럼 일제시대 징용공 문제와 관련해 우리들이 원천적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실관계부터 바로 잡으며 시작한다.

    "강제징용 배상 소송인데, 원고 중 '실제 징용공'은 없어"


    니시오카 교수에 따르면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은 국제법 논리를 근본적으로 무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다.

    한국의 법질서를, 다른 법질서를 적용받는 일본의 기관과 기업에 강제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1965년에 체결된 한일조약과 한일협정을 깨겠다는 것으로 일본 입장에선 '국교 파기' 선전포고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다.

    니시오카 교수는 한국인들이 일단 이 현실부터 이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 사법부의 판결은 일본의 특정 정권이 수용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대법원 판결의 법리상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일제시대 그 자체'를 불법화해버린 데 있다.

    '일본 통치불법론'은 한국인들의 국민 정서는 만족시킬 수 있는지 몰라도 이를 공식화했을 경우 필연적으로 일본에 공식적인 '무한책임'을 지우게 되는 문제점을 갖는다. 징용공뿐만 아니라 당시 살았던 모든 조선인들이 일본에 공식적 배상을 받을 권리가 생기고, 일본은 그 후손들에게 국가총생산에 버금가는 천문학적인 배상을 해줘도 모자랄 것이다.

    따라서 일본이 이를 수용할 리 만무하다. 한국이 이 문제를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한다면 남은 방법은 사실상 무력밖에 없게 된다. 이것이 과연 양국을 위해 바람직한 일일까?

    "한일기본조약 무시된다면 일본이 한국에 청구할 재산권 더 많아"


    니시오카 교수는 일제시대 청산 문제와 관련해서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커다란 오해 하나를 지적한다.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서 재산상의 막대한 채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인들은 이 청구권이 이전 군사 정권에 의해 비정상적으로 처리됐으며, 문민 정권에서 이 문제가 바로잡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니시오카 교수는 "만약 과거 한일협정을 이제 와 뒤엎겠다면, 당시 일본이 포기했던 한국에 대한 막대한 청구권도 생각해 봐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의 청구권은 아니더라도 개인의 청구권은 여전히 남아 있다는 논리가 한국인들에게 오히려 부메랑이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일본은 국제법상 과거 조선반도에 남겨두고 간 공장이나 가옥 등, 부동산을 비롯한 여러 재산권이 있었지만 한일협정 때 국교 정상화를 위해 이를 완전히 포기했다.

    니시오카 교수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의 각종 재산이 많았겠는가, 조선인들의 각종 재산이 많았겠는가"라고 묻는다. 양국의 국민들이 당시의 권리를 양국의 법정에 이제부터 마구 요구하기 시작한다면, 궁극적으로 어느 나라 국민들에게 더 좋은 일이 될지는 자명하다는 것이다.

    "200만 '일본 거주' 조선인 중 80%가 순수 이주노동자"


    니시오카 교수는 징용공 문제와 관련해 한국인의 전형적 인식인 '강제연행설'과 '노예노동설'도 전부 사실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오늘날 대다수 한국인들은 과거 조선인들이 일본에 건너가게 된 계기를 '강제연행'이라고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니시오카 교수는 이를 '착각'이라고 말한다. 실은 한일병합부터 조선반도의 수많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좋은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이다. 실제로 종전 당시 200만명에 달했던 일본 거주 조선인 가운데 80%가 '순수 이주노동자'로서 이들 중 상당수가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살았다.

    당시 조선에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거대한 흐름은 자료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게 '부정도항자(不正渡航者)'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5년 동안 무려 110만명이 일본으로 이주를 요구했고, 물밀듯한 요구에 이중 6할은 불허됐다. 그런 가운데 1930년부터 1942년까지 일본에서 발각된 부정도항자가 조선으로 송환된 경우만 3만4000명에 이른다. 소위 '전시동원'은 이런 거대한 이주 흐름의 1할 밖에 되지 않았다.

    이런 것부터가 '조선인 강제연행설'의 심각한 오류를 보여 주는 대목이라는 게 니시오카 교수의 주장이다.

    니시오카 교수에 따르면 사실 법적 강제력이 있는 '징용'은 조선인들에게는 1944년 9월 이후에나 적용됐으며, 실질적으로는 채 6개월도 추진되지 못했다. 물론 그 이전에 '모집'과 '관알선'이라는 전시동원정책이 있었지만, 이는 사실상 자발적 이주 노동 정책이었다. 더구나 '모집'과 '관알선', '징용'을 모두 합하더라도 이미 수십만명 규모의 순수 이주 노동자와는 규모에서 비교도 되지 않는다.

    "1933~1937년 110만명, 일본으로 이주 요구‥
    이중 6할은 불허"

    수만명에 달하는 '부정도항' 적발 사례만 보더라도 조선에서 일자리를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는 거대한 흐름을 살펴볼 수 있다. 이런 현실에서 일본이 조선에서 노예사냥을 하듯 노동자를 연행해 갔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게 니시오카 교수의 설명이다.

    '노예노동'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조선인이 수용소 같은 곳에서 무임금 강제노동에 시달렸다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이미지다. 임금은 정상적으로 지급됐으며, 민족 간 임금차별도 없었다.

    니시오카 교수는 이 책에서 '전시동원' 중에서도 가장 강한 법적 강제력을 갖고 있었다는 '징용'과 관련된 조선인 노동자들의 수기를 공개했다. 먼저 히로시마 도요공업에 징용됐던 정충해 씨의 경우다. 그는 1인당 2첩의 큰 방에다가 신형 침구를 제공받았으며, 전시 식량난 속에서도 삼시 세끼를 보장받았고, 140엔의 급료(당시 순사 초임이 45엔, 병사가 10엔)를 받았음을 고백한다. 저녁 식사 후에 잔치를 벌이고 도박도 즐겼다. 정씨는 일본인 전쟁미망인과 밀회도 즐긴다.

    요도시카단츄테츠 공장에 징용됐던 가네마야 쇼엔 씨(창씨개명)의 체험도 한국인이 갖고 있는 징용공 관련 이미지와 완전히 다르다. 가네야마 씨는 원 작업 현장에서 탈주를 하는데 탈주 이유가 작업 현장이 열악해서가 아니다. 동료 노동자와의 말다툼이 이유다. 가네야마 씨는 이후 자유노동자가 돼 일본 내 이런저런 작업 현장을 전전하는데, 그러면서도 고액의 임금을 받고 또 고가의 물건을 구입한다. 전시지만 담배, 막걸리, 소고기도 자유롭게 구한다.

    "오직 '진실'만이 한국과 일본 화해시킬 수 있어"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도서출판 미디어실크)'는 니시오카 교수의 '날조된 징용공 문제'를 '반일 종족주의' 공저자 이우연 박사(낙성대경제연구소)가 우리말로 번역한 책이다.

    나시오카 교수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보내는 글에서 "거짓말에 기초한 '반일 캠페인'을 벌이는 일본 내 학자와 활동가들이 한국에서 '양심 있는 일본인'이라고 칭찬받고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한일 간의 진정한 우호를 저해하고 한국을 대등하게 보지 않는 반한(反韓)세력"이라고 말한다.

    이어 "한국을 대등하게 보는 '애한파' 일본인이 한일의 역사인식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 책을 읽으면 잘 알게 될 것"이라며 "아무쪼록 이 책을 읽고 한국의 분별 있는 독자들이 과연 누가 한일 우호의 적인지를 깊이 생각해 준다면 정말로 기쁘겠다"고 부연한다.

    이 말처럼 저자는 무거운 주제를 담담한 심정으로 쉽게 풀어냈다. 무엇보다 솔직하다. 에두르지 않은 직설화법이다. 그래서 꿍꿍이가 없다.

    니시오카 교수는 1977년부터 한일 양국을 넘나들며 각종 교류 활동을 해 왔다. 그래서일까. 어지간한 한국인보다도 한국어를 더 유창하게 구사하는 '친한파(親韓派)'를 넘어 '애한파(愛韓派)'로 알려진 사람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지금 한일 양국은 위안부 문제를 넘어서 징용공 문제까지 극한 대치로 치닫고 있다. 양국의 국민감정이 이보다 더 나빠질 수가 없을 정도다.

    이에 그는 일단 일본인으로서 일본의 입장부터 솔직하게 전하는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오직 '진실'만이 일본과 한국을 화해시킬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온 작품이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다.

    ■ 저자 니시오카 쓰토무


    1977년 한국에 유학한 이후, 그는 40년 넘게 한국·북조선 연구에 매진해 왔다. 한국인을 만나면 "나는 '친한파'가 아니라 '애한파'입니다"라고 자신을 스스럼없이 소개할 만큼 한국인들에 대한 그의 생각은 명료하다.

    1956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국제기독교대학교와 쓰쿠바대학(筑波大学)에서 한국·북조선 지역 연구를 공부했다. 1982년부터 1984년까지 일본 외무성 전문조사원으로 주한 일본 대사관에 근무했으며, 1990년부터 2000년까지 겐다이 코리아(現代コリア) 편집장을, 1991년부터 2017년까지 도쿄기독교대학(東京基督教大学) 조교수와 교수를 역임했다.

    1997년 납치가족회를 지원하는 '구출회(북조선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 설립에 참여하고 현재 구출회 회장, 역사인식문제연구회 회장, 국가기본문제연구소의 연구원과 기획위원으로 활동 중이며, 제30회 '세이론(正論) 대상'을 수상했다.

    현 모라로지연구소(モラロジー研究所) 교수, 역사연구 실장, 레이타쿠대학(麗澤大学) 객원 교수, 구출회 회장을 맡아 자신의 생명까지도 담보하면서 실현해야 할 가치인 '선(善)'의 신념을 실천하고 있다.

    신작 '날조한, 징용공 없는 징용공 문제'는 직면한 역사를 대등하게 바라보지 않고, 선동에 의해 한일 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일본 좌익과 반일을 선동하는 불온한 이들에게 던지는 '양심'의 소리다.

    저서로 '일한 오해의 심연(日韓誤解の深淵)(아키서방, 1992)', '어둠에 도전한다! 납치·기아·위안부·반일을 어떻게 파악할까(闇に挑む! 拉致·飢餓·慰安婦·反日をどう把握するか)(도쿠마문고, 1998)', '테러 국가 북한에 속지 말아라(テロ国家北朝鮮に騙されるな)(PHP연구소, 2002)', '납치 가족과의 6년 전쟁: 적은 일본에도 있었다!(拉致家族との6年戦争: 敵は日本にもいた!)(후소샤, 2002)', '일한 역사문제의 진실(日韓「歴史問題」の真実)(PHP연구소, 2005)', '알기 쉬운 위안부 문제(よくわかる慰安婦問題)(소시샤, 2007)', '아사히신문 - 일본인에게 지은 대죄(朝日新聞「日本人への大罪)(고쿠출판, 2014)', '요코타 메구미와 납치 피해자들을 되돌려 받을 수 있는 것은 지금 뿐(横田めぐみさんたちを取り戻すのは今しかない)(PHP연구소, 2015)' 등 20여권이 있다.

    ■ 옮긴이 이우연


    성균관대학교에서 조선후기 이래 지금까지의 산림과 그 소유권의 변천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하버드대 방문연구원, 규슈대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는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이다. '한국의 산림 소유제도와 정책의 역사, 1600~1987(일조각, 2010)', 'Community, Commons and Natural Resource Management in Asia(Singapore National University Press, 2015, 공저)', '반일 종족주의(공저, 미래사, 2019)',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공저, 미래사, 2020)'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