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으로 사실 왜곡하면 KBS 설 자리 없다"… 9일 사내 게시판에 간곡한 고언 남겨
  • ▲ 지난 9일 사의를 밝힌 KBS 황상무 전 앵커. ⓒKBS 뉴스 화면 캡처
    ▲ 지난 9일 사의를 밝힌 KBS 황상무 전 앵커. ⓒKBS 뉴스 화면 캡처
    KBS의 간판 앵커로 활약했던 황상무(56) 전 앵커가 지난 9일 KBS에 퇴사 의사를 밝히며 동료 선·후배들에게 마지막 고언(苦言)을 남겼다.

    지난 2년여간 벼랑 끝에 매달린 채 백척간두의 삶을 살아왔다고 밝힌 그는 "손을 놓는 순간 머리가 깨져 죽을지도 모르지만, 이게 제 운명이라고 받아들인다"면서 부디 KBS가 '화해'와 '통합'에 앞장서 달라고 당부했다.

    2015년부터 3년간 KBS 메인뉴스인 '뉴스9'를 진행했던 황 전 앵커는 2018년 4월 양승동 사장 취임 이후 앵커 자리에서 물러나 라디오뉴스팀에서 편집 업무를 맡아왔다.

    "수신료로 운영되는 회사가 '국민 절반', 적으로 돌려선 안 돼"


    황 전 앵커는 이날 KBS 사내 인터넷 게시판에 "시대상황이 변했고, 더 이상 제가 머물 공간이 없어졌다"며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몸담았던 KBS를 떠나려 한다"는 퇴사의 변(辯)을 올렸다.

    "2005년 5월 3일 피눈물을 삼키며 진행했던 아침뉴스가 생각난다. 불과 몇 시간 전, 어린 자식을 영안실에 넣어놓고 돌아선 직후였다"는 개인사를 공개하며 그만큼 혼신의 노력을 바쳤던 KBS였다고 회상은 그는 "우리 사회가 (작가 김훈의 말처럼) 지금 매일 욕지거리와 쌍소리 악다구니로 해가 뜨고 지는 세상이 됐는데, 이제는 그 한 가운데에 KBS가 있다"고 개탄했다.

    황 전 앵커는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회사가 한쪽 진영에 서서,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적으로 돌리거나 편가르고 이간질해선 안 된다"며 "이념으로 사실을 가리거나 왜곡하려 드는 순간, KBS는 설 자리가 없다"고 충고했다.

    이어 "상대를 쓸어버리겠다는 극단의 '적대정치'가 힘을 얻는 한, 이 땅에 킬핑필드를 재현하는 것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다"고 지적한 그는 "분노와 증오의 끝은 언제나 골육상쟁의 파국뿐이었다"며 "KBS가 이런 극단의 적대정치에 편승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질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 사회의 용서와 화해 치유와 통합은 KBS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소중한 가치"라고 역설한 황 전 앵커는 "KBS는 국민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을 지피고 긍정의 가치를 일깨워야 한다"며 "그것이 KBS가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제언했다.

    '입바른 소리'로 경영진·2노조에 미운털‥ 정권친화적 KBS 보도 비판


    강원도 춘천 출신으로 서울대 신문학과를 나온 황 전 앵커는 1991년 KBS에 입사해 춘천방송국 기자를 시작으로 사회부·통일부·정치부 기자, 뉴욕 특파원 등을 두루 거쳤다.

    2002∼2007년 'KBS 뉴스광장'을 진행했고, 2015년 1월부터 '뉴스9' 앵커 자리를 지켜오다 양승동 사장 취임 이후 라디오뉴스팀으로 발령 나 최근까지 편집업무를 담당해왔다.

    보수 성향의 황 전 앵커는 2016년부터 전국언론노동조합 KBS본부(2노조) 소속 후배 기자들과 마찰을 빚어왔다. 같은 해 KBS기자협회의 편향성을 지적한 'KBS기자협회의 정상화를 촉구하는 모임'에 본부장급 인사 중 유일하게 이름을 올려 화제를 모았고, 박근혜 정부의 국정교과서가 각계의 반발에 부딪힐 당시에도 "교과서에 이념을 넣으려고 들면 논쟁은 끝이 없고 우리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클로징 멘트로 주목을 받았다.

    또 지난해 7월 KBS '시사기획 창 - 복마전 태양광 사업' 편이 '청와대 외압' 논란에 휘말리자, 청와대와 KBS 경영진의 처신을 문제삼는 '어설픈 변명 속에 숨어 있는 그림 찾기'라는 성명에 동참했고, 지난 7월에는 '검언유착 오보 방송 진상규명을 위한 KBS인 연대서명'이라는 글에서 "KBS 뉴스가 정권에 미운 털이 박힌 윤석열 검찰총장 죽이기에 나선 현 정권의 편을 드는 것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음은 황상무 전 앵커가 올린 '퇴사의 변' 전문.

    존경하고 사랑하는 KBS 선후배 동료 여러분,
       
    저는 오늘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몸담았던 KBS를 떠나려고 합니다. 그동안 참으로 감사하고 고마웠습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될 지, 기약없이 떠나지만 고마웠던 기억만큼은 잊지 않겠습니다.

    막상 이 글을 쓰려니 주마등처럼 기억들이 스쳐갑니다. 2005년 5월 3일 피눈물을 삼키며 진행했던 아침뉴스가 생각납니다. 불과 몇 시간 전, 어린 자식을 영안실에 넣어놓고 돌아선 직후였습니다. 무엇이 저를 그렇게까지 일하도록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만큼 혼신의 노력을 바쳤던 KBS였습니다.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이라고 믿었던 제 삶의 안식처였습니다.

    하지만, 이제 KBS에 대한 저의 의탁을 접으려고 합니다. 시대상황이 변했고 더 이상은 제가 머물 공간이 없어졌습니다. 저의 애정은 변함없지만 그건 사랑이 아니라 스토킹에 불과할 겁니다. 그래서 떠나고자 합니다. ‘떠날 때는 말없이’를 실천하려고 했는데, 송구스럽습니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아껴주고키워줬던 조직이기에, 인사는 드리고 가는 게 도리라고 여겨 몇 자 적습니다.

    “우리 사회는 지금 매일 욕지거리와 쌍소리 악다구니로 해가 뜨고 지는 세상이 됐습니다.” 작가 김훈의 말입니다. 말 그대로 온갖 말이 난무하는 사회입니다. 불행하게도 그 한 가운데에 KBS가 있습니다. 스스로 자초한 일입니다.

    현대사회에 진리는 없습니다. 사실이 있을 뿐입니다. 이익이 중첩되어 첨예하게 엇갈리는 다원 사회에서 한쪽에서 말하는 정의는 다른 쪽에서는 불의가 되고, 견강부회, 곡학아세일 뿐입니다. 요즘 말로 내로남불입니다. 이른바 진영논리만이 횡행하는 시대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늘날 방향을 모른 채 진영 간의 난투극 시대로 접어든 데는, 진리가 없는데 서로 자신들의 주장을 진리라고 우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론은 사실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사실과 자신의 이념이 부딪칠 때, 과감히 이념을 버리고 사실을 택해야 합니다. 제가 신입사원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던 말입니다. 이는 KBS의 숙명입니다. 이념으로 사실을 가리거나 왜곡하려 드는 순간, KBS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국민의 수신료로 운영되는 회사가 한쪽 진영에 서면, 나머지 절반의 국민을 적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국민을 편가르고 이간질하는 일입니다. 스스로를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로 만들고, 편들고자 했던 바로 그들로부터 업신여김이나 당할 뿐입니다.  

    우리는 곡절의 현대사를 헤쳐 왔습니다. 우리 사회 극단적 진영논리의 근저에는 망국과 식민, 해방과 분단, 전쟁과 독재,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거치며 이분법으로 세상을 재단해 온 암울한 역사적 유산이 있습니다. 사회 전체가 깊은 상처를 입었고 치유하지 못한 채 살아왔습니다. 그 안에 사는 개인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최근 날마다 벌어지는 분노와 저주의 악다구니를 듣노라면, 우리는 좌.우 양손에 이념의 촛불을 들고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폭주 기관차 같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좌나 우, 진보나 보수라는 틀로서는 결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날이면 날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날선 주장들에서 여실히 확인됩니다. 명백한 사실조차 부정하고 내로남불을 쏟아내며 욕설과 저주로 증오만을 키우고 있습니다. 이성은 없고 극단의 감정만 있습니다. 문제해결이 아니라 문제를 키우는 ‘소용돌이’일 뿐입니다. 사실은 무시되고 조롱받으며, 주장과 선동만이 힘을 얻습니다. 과거에 대한 고찰, 현재의 성찰, 미래에의 통찰은 설 자리를 잃었습니다. 극도로 분노하는 이들이 생기고, 동시에 극도로 좌절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이렇게 상대를 쓸어버리겠다는 극단의 적대정치가 힘을 얻는 한, 이 땅에 킬핑필드를 재현하는 것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습니다.

    KBS는 이런 극단의 적대정치에 편승해서는 안됩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분노의 불을 질러서는 안됩니다. 분노와 증오의 끝은 언제나 골육상쟁의 파국뿐이었습니다. 역사에서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습니다.

    KBS는 국민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을 지펴야 합니다. 긍정의 가치를 일깨워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용서와 화해 치유와 통합은 KBS가 결코 포기해서는 안되는 소중한 가치입니다. KBS가 우리 역사의 저주, 보복의 악순환을 끊어야 합니다. 자학사관을 버리고 과거 들추기를 접고 미래로의 전진을 역설해야 합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산을 발굴하고 키워서 이를 중심으로 단합하고 국민의 자긍심을 높여야 합니다. 우리가 피흘려 쟁취한 이 땅의 민주주의를 자랑스럽게 여기듯이, 변방의 약소국을 지키기 위해 굴욕을 마다않고 노심초사 살아왔던 선조들의 헌신, 세계 최빈국을 신흥 선진국으로 만들어 온 선배들의 노고를 존중하고 평가해야 합니다. 조롱과 경멸, 능멸과 조소, 비아냥을 접고 배려와 존중, 예의와 염치, 정중한 말투를 되찾아야 합니다. 어렵고 힘든 길이지만 꿋꿋이 그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게 수신료로 운영되는 KBS의 존재 이윱니다. KBS가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지난 2년 여, 벼랑 끝에 매달린 채 백척간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제는 손을 놓으려고 합니다. 천 길 낭떠러지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저 돌과 바위투성이뿐이어서 낙하가 끝나는 순간 머리가 깨지고 뇌수가 터져서 처참하게 죽을지도 모릅니다. 운이 좋아 아래에 깊은 소(沼)가 있더라도 과연 수면까지 다시 헤엄쳐 올라올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습니다. 저도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손을 놓아야 하고, 그게 제 운명이려니 하고 받아들이기로 했을 뿐입니다.

    말이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고맙고 감사한 기억만을 안고 가겠습니다. 어디서든 KBS를 사랑하며 지켜보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20. 11. 9.  황상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