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뮤지컬 '베르테르' 공연 장면.ⓒCJ ENM
    ▲ 뮤지컬 '베르테르' 공연 장면.ⓒCJ ENM
    사랑해선 안 될 사람을 사랑해서… 발하임에서 우연히 롯데를 만나 첫 눈에 반한 베르테르는 그녀에게 약혼자 알베르트가 있음을 알고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채 떠난다. 그는 긴 여행 끝에 발하임으로 돌아오지만 롯데가 결혼했다는 소식에 절망하며, 결국 만발한 해바라기 속에서 죽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열정을 불태운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서간체 소설 '젊은 베르테의 슬픔'을 원작으로 탄생한 창작뮤지컬 '베르테르'가 올해로 20년을 맞았다. 2000년 초연 이후 그 동안 엄기준, 조승우, 김다현, 송창의, 박건형, 임태경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거쳐 갔다.

    이번 20주년 기념공연에서 처음 베르테르 역을 맡은 카이(본명 정기열). 인생을 건 애절한 사랑에 빠진 남자가 된 그는 "개인적으로 20주년이라고 해서 특별한 건 없어요. 오랫동안 살아 숨쉬는 작품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게 기쁨이죠. 매 순간, 매 무대마다 최선의 감정으로 임하는 자세는 다른 작품과 다르지 않아요"라고 밝혔다.

    작가 고선웅의 각색을 통해 무대에 옮긴 뮤지컬은 롯데를 향한 베르테르의 숭고한 사랑 이야기를 정민선 작곡가의 서정적인 음악으로 풀어낸다. 한폭의 수채화 같은 무대, 현악기 중심의 실내악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아름다운 선율은 한 남자의 순애보를 극적으로 끌어올린다.

    감미로운 목소리로 걸음걸이와 표정, 눈빛 하나까지 신경 쓰며 무대를 빛내고 있는 카이는 깊은 흡입력으로 베르테르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전체적으로 여백의 미가 있는 수묵화 같은 작품이에요. 그 공간을 보이진 않더라도 감정의 공기로 채워야하는데 배우인 제 역량이겠죠."
  • ▲ 뮤지컬 '베르테르' 공연 장면.ⓒCJ ENM
    ▲ 뮤지컬 '베르테르' 공연 장면.ⓒCJ ENM
    완벽주의자로 소문 난 카이는 '베르테르'를 위해 잊고 지냈던 사랑의 희노애락을 회상하며 캐릭터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 "다락방의 한 상자 안에 묵혀뒀던 먼지가 쌓인 옛 사진들을 꺼내보니 힘들어지더라. '그때 왜 그랬을까.' 사랑의 여운과 많은 감정들이 안개처럼 올라오라더고요. 공연이 끝나고 집에 가는 길이 제일 힘든 작품이에요. 머리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랄까."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 해맑을 수 있는지. 당신의 그 미소만큼씩 내 마음은 납처럼 가라앉는데…(중략) 나 그대 이제 이별 고하려는데, 내 입술이 얼음처럼 붙어버리면. 나 그대를 차마 떠나려는데, 내 발길이 붙어서 뗄 수가 없으면." - 뮤지컬 '베르테르' 1막 '발길을 뗄 수 없으면' 중에서

    롯데와 알베르트의 행복을 지켜볼 수 없어 쓸쓸하게 돌아서야 하는 베르테르. 카이는 우수에 찬 눈빛으로 가슴 저릿한 아픔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성큼성큼 걸어갔다. 카이의 '베르테르'는 품격과 절제가 공존하는, 사랑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진 로맨티스트다.

    그는 '롯데' 역의 이지혜·김예원에 대해 "이지혜는 뮤지컬 배우다보니 연기 패턴이 넓고 스케일이 커요. 김예원은 매체 연기를 많이 해서 섬세하고 집중력이 강해요"라며 "상대에 따라 서로 주고 받는 호흡이 달라서 참 재미있어요"라고 말했다.

    "오 황홀경이여. 오 타올라 사라질 세상의 생명들아. 내말에 귀 기울여라. 가령 말하자면 내가 죽을지라도 죽어 사라질지라도… 오직 그대는 나와 단 둘이만이 함께 있어다오." - 뮤지컬 '베르테르' 2막 '자석산의 전설 Reprise' 중에서
  • ▲ 배우 카이 프로필 컷.ⓒEMK 엔터테인먼트
    ▲ 배우 카이 프로필 컷.ⓒEMK 엔터테인먼트
    롯데가 1막에서 들려주는 자석산에서 난파당한 왕자 이야기는 베르테르의 비극적인 결말을 암시한다. 2막 마지막 장면에서 베르테르는 죽음을 앞두고 클롭슈토크 시의 한 구절을 읇조리며, 이후 노란 해바라기들이 힘없이 쓰러진다. 해바라기는 '숭배, 기다림'이라는 꽃말처럼 베르테르가 롯데에게 바치는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이다.

    "베르테르의 죽음은 사랑의 고통을 잊기 위함이 아닌, 가장 고귀한 희생이고 최고의 용기라고 생각해요. 주눅들거나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게 아니라 편안한 모습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려고 했어요. 조광화 연출께서 커튼콜 때 아주 기쁜 웃음을 지어달라고 주문했는데, 죽음을 환희로 해석했던 것 같아요."

    서울대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한 카이는 2008년 팝페라로 가수로 데뷔해 20011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통해 뮤지컬계에 첫 발을 내딛었다. 2015년 '팬텀'에서 첫 타이틀 롤을 맡은 이후 '레베카', 벤허', '프랑켄슈타인', '엑스칼리버' 등 연달아 대형 작품에 출연하며 국내 최정상 배우로 자리 매김했다.

    현재 MBC 예능프로그램 '복면가왕'에서 고정패널로 활약 중이며, 그림에 대한 남다른 조예로 부산시립미술관 홍보대사이기도 하다. 카이의 활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2015년부터 문화소회계층 청소년들에게 직접 구매한 공연 티켓을 전달하는 '뮤드림'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 유튜브 채널 '카이클래식'을 개설하는 등 선한 영향력을 펼치고 있다.

    스스로를 몽상가라고 부르는 카이는 "머릿속에 아이디어가 많고, 조금씩 실현해 나가고 있어요. 노래를 부르는 한 사람으로서 음악으로 소통할 수 있는 매개체가 많지 않다는 걸 알고 '카이클래식'을 만들었어요. 구독자와 상관없이 저만의 스타일로 클래식의 본질을 이야기해요.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서 죽을 때까지 하고 싶어요"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