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영향권에 남겠다" 한달 만에… '코로나 지원' 요구하며 중국 손 들어줘
  • ▲ [마닐라=AP/뉴시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두테르테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각) 우한코로나 백신을 중국에 요구하며, 미중간 남중국해 갈등에서 발을 빼겠다는 취지로 국회에서 연설했다.ⓒ뉴시스
    ▲ [마닐라=AP/뉴시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 두테르테 대통령은 27일(현지시각) 우한코로나 백신을 중국에 요구하며, 미중간 남중국해 갈등에서 발을 빼겠다는 취지로 국회에서 연설했다.ⓒ뉴시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남중국해를 둘러싼 미·중 간 갈등 속에서 중국의 손을 들어주는 듯한 모양새다. 중국에 우한코로나 백신을 요청하는 대신,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또 미군의 남중국해 진출 교두보인 수빅만 기지를 미군에 개방하지 않겠다고도 밝혔다.

    필리핀은 지난 2월 미군 주둔의 근거가 되는 군사협정을 종료하겠다고 선언한 뒤 지난달에는 돌연 종료 절차를 중단했다. 미·중 갈등이 심각해지자 미군의 군사지원을 받아들이면서 중국을 견제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 것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그런데 두테르테 대통령은 27일에는 중국의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며 오락가락 행보를 또 반복했다. 

    두테르테 "중국은 무기 있고 우리는 없어… 남중국해 문제 손 떼야"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날 가진 국정연설에서 "중국도 영유권을 주장한다. 우리도 주장한다. 중국은 무기가 있다. 우리는 무기가 없다. 중국은 남중국해를 소유했다.(in possession of the property) 우리가 뭘 할 수 있나"라고 말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어 수빅만에 있던 옛 미 해군기지를 언급하며 "미국인들이 수빅으로 돌아오려고 한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나는 미국에 아무런 반감이 없다. 중국에도 아무런 반감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가 그곳에 기지를 두면 가장 파괴적인 것이 두 배로 커진다. 만일 전쟁이 터지면 필리핀 인종은 분명 사멸한다"고 말했다. 

    수빅만은 1992년까지 미 해군7함대가 주둔했던 곳으로, 지난달까지만 해도 수빅만에 미군이 다시 진주할 것이라는 미 현지 언론 보도가 있었다. 

    두테르테 "코로나 백신 나오면 달라고 중국에 간청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이어 우한코로나 위기 극복을 위해 중국에 의존해야 하는 형편이라고 고백했다. 그는 "백신을 가지게 되면 우리에게 제일 먼저 달라고 시진핑 주석에게 간청했다"며 "우리가 돈을 주고 사야 한다면 나중에 갚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의 이날 발언은 남중국해를 둘러싼 분쟁에서 국력상 중국보다 우위를 점할 수 없는 자국의 처지에 관해 자국민들의 용인을 구하면서, 동시에 우한코로나 백신을 중국으로부터 조달받기 위한 노력으로 풀이된다. 

    중앙방역대책본부에 따르면, 필리핀은 29일 기준 우한코로나 확진자가 8만2040명에 사망자는 1945명이다. 감염률은 인구 10만명당 75.9명으로, 남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인도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남중국해 필리핀 소유 아냐… "코로나 협조 위해 중국 체면 살려준 것"

    하지만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을 통해 필리핀이 남중국해 영유권을 포기한 것이라는 일각의 해석은 지나치다는 평가가 나온다. 필리핀은 자신의 소유도 아닌 남중국해를 중국에 넘길 권리도 없다. 

    최원목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본지와 통화에서 "문제의 발언은 중국이 남중국해를 사실상 지배(in possession)하는 데 반발할 힘이 없음을 시인한 것이지, 법적으로 소유권이 있음을 인정한 것이 아니다"라고 평가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중국의 군사력 우위를 인정하고 당분간 필리핀이 무력으로 이의를 제기하지는 않을 것임을 공언함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살려준 것이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취지는 아니라는 뜻이다.

    최 교수는 이어 "이중적 의미를 담은 고도의 외교적 표현을 통해 코로나 위기 극복에 중국의 협조를 유도하면서도 영유권에 관계된 법적 문제제기는 다시 미래의 과제로 남겨둔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남중국해 영유권과 관련한 중국의 주장은 2016년 7월 국제상설중재재판소의 중재 판정을 통해 이미 국제법적 근거를 상실했다는 평가다. 당시 재판소는 중국이 역사적으로 남중국해 일부 섬을 어느 정도 이용해왔다는 점은 인정하면서도 배타적 통제권은 부인했다. 

    재판소는 그러면서 "중국이 남중국해에 관한 역사적 권리를 주장할 법적 근거가 없다"고 판시했다. 미국은 이 같은 판결을 근거로 '항행의 자유’를 주장한다.

    中 "코로나 협력, 양국 관계 진전 계기"

    중국은 일단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을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왕원빈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8일 정례 브리핑에서 "우리는 두테르테 대통령의 발언을 높이 평가하며, 남중국해와 전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공동으로 수호하기 위한 우호적 협의를 통해 필리핀과 해양분쟁을 적절히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왕 대변인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호소한 우한코로나 백신 공급과 관련해서도 협조할 뜻을 내비쳤다. 왕 대변인은 "COVID-19 발발 이후 중국과 필리핀은 상호 원조를 통해 함께 해왔으며, 코로나 협력을 양국관계의 새로운 계기로 바꿨다. 필리핀은 우호적인 가까운 이웃으로, 우리가 백신 개발에 성공하면 필리핀의 필요를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이라고 밝혔다.

    두테르테, 취임 후 4년 내내 '오락가락'

    필리핀은 2016년 6월 두테르테 취임 이후 지난 4년간 친중 행보를 이어가면서도 미국의 손을 완전히 놓지는 못하는 어중간한 태도를 거듭 보였다. 지난 2월에는 미국과 합동군사훈련협정을 종료하기로 했다 지난달에는 그 종료 절차를 잠정중단하기로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애초 '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겠다'고 했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초청에도 미국은 한 차례도 찾지 않았다. 중국은 여섯 번 방문했다. 지난해 4월에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에 참석해 시 주석의 체면을 살려줬다. 그 대가로 중국은 필리핀에 240억 달러(약 24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한 상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