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일 제106회 이승만 포럼… 1905~10년 미국 체류 6년간 이승만 강연 분석 결과
  • ▲ 17일 오후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이승만학당 주최로 열린 이승만 포럼에서 강연 중인 한서영 씨. ⓒ이기륭 기자
    ▲ 17일 오후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이승만학당 주최로 열린 이승만 포럼에서 강연 중인 한서영 씨. ⓒ이기륭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은 강연활동을 통해 미국의 언어와 문화를 학습하며 대중연설 능력을 키웠다."

    17일 오후 서울 정동제일교회 아펜젤러홀에서 이승만학당 주최로 열린 '제106회 이승만 포럼'에서 한서영(사진) 씨는 "이 전 대통령의 강연활동 경험은 향후 40년간 그의 정치활동에 굉장한 도움이 됐을 것"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이날 포럼의 주제강연 ‘미국유학 시기 이승만 강연활동의 양상과 함의’에 강연자로 나선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에서 경험한 수백 차례의 강연활동으로 국제적 정치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키울 수 있었다"며 "향후 그가 작성하는 외교문서에도 대중연설을 준비하며 키웠던 역량이 밑바탕이 됐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청원외교 위해 미국행… 강연으로 인맥 형성"

    한씨는 또 "처음 미국으로 건너가 루스벨트 대통령, 존 헤이 국무장관 등 비중 있는 인사들을 접했던 이 전 대통령은 강연활동을 통해 정계·학계·교육계의 주요 인사들이나 다양한 대중과 관계를 형성했다"며 "이 전 대통령 개인의 정치적 인맥을 확대하는 기회가 된 셈"이라고 주장했다.

    연세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과정을 이수 중인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조지워싱턴대학교에 입학한 1905년부터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을 때까지 미국 대중을 대상으로 전개한 강연활동을 분석했다. 이날 강연은 <국제정치논총>(59집-2호)에 게재된 그의 논문을 바탕으로 진행됐다.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미국으로 건너간 목적은 청원외교 때문"이라며 "고종 황제의 측근인 민영환과 한규설의 밀서를 딘스모어 하원의원에게 전달하고, 국무장관을 면담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당시 대한제국은 국제적으로 외교적 단절이 가속화하는 상황이었는데, 이 전 대통령은 공식적 외교접촉이 불가능해지자 유학생으로 체류했다"며 "이후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할 때까지 미국 대중을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했다"고 덧붙였다.

    이 전 대통령이 미국에 체류한 1905년부터 1910년까지 강연 횟수는 총 200회 정도라고 한씨는 주장했다. 그는 "이 전 대통령은 한 달에 적게는 1회, 많게는 13회까지 강연을 했다"며 "강연 횟수는 1907년과 1910년을 제외하면 해가 갈수록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이어 "1905년 1월8일 워싱턴D.C에 도착한 지 일주일 만에 ‘스미스교회(Mr. Smith's Church)’에서 강연을 하기도 했다"며 "초창기에는 워싱턴D.C를 중심으로 강연하다 점차 중·동부지역으로 확대했다"고 부연했다.

    국제 교류장을 강연장으로 '독립' 호소… 공공외교적 의미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이 교회를 비롯해 국제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강연장으로 삼았다고 소개했다. YMCA, 러스트홀국립훈련학교 선교사대회, 국제선교대회 등이 대상이었다. 장로교·감리교·침례교·루터교 등 교파를 넘나들며 강연하기도 했다.

    한씨는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교회들은 이 전 대통령을 통해 한국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했다"며 "이 전 대통령은 세계적 기독교 행사에 한국대표 자격으로 참석해 초국가적 대중을 상대로 한국을 알렸다"고 말했다. 1906년 7월 약 3000명의 각국 청년대표가 모였던 메사추세츠주 노스필드 ‘만국학도공회’와 1908년 3월 3500명의 각국 대표가 모인 ‘제1회 피츠버그 국제선교사대회’ 등을 대표적 사례로 제시했다.

    한씨는 이 전 대통령의 강연이 일본의 ‘한국 침략’ 상황을 전하고, 한국의 대외적 ‘독립’을 호소하는 공공외교적 의미를 갖고 있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당시 한국 상황을 알릴 수 있는 공식적 외교창구는 폐쇄된 상황이었다"며 "이승만의 강연활동은 일본의 한국에 대한 부정적 공공외교를 부각시키고, 미국사회에 형성된 일본 우호적 인식에 대항하는 공공외교적 의미가 있었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