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지검 '적폐청산' 수사, 피의사실 공표 잇달아..."엄격한 처벌·실효적 법률 필요"
  • ▲ 검찰. ⓒ정상윤 기자
    ▲ 검찰. ⓒ정상윤 기자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최근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와 이명박 전 대통령 재판, 삼성바이오로직스 분식회계 수사 등에서 검찰의 무책임한 피의사실 공표가 잇따른 탓이다. 피의사실 공표는 현행법상 '불법'임에도 사실상 사문화되면서 검찰의 수사 관행으로 자리잡아 법원 판결 전에 '여론재판'으로 악용된다는 지적이다.

    24일 법조계에 따르면 21일 서울고법 형사1부(정준영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이 전 대통령의 재판에서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검찰과 변호인 측의 공방이 오갔다. 이 전 대통령 측 변호인단은 "검찰이 항소심 막바지에 이르러서 피고인이 받은 삼성 뇌물이 추가로 있다는 내용을 언론에 보도하는 피의사실 공표를 강행했다"고 주장했다.

    MB 변호인 "검찰이 피의사실 공표" VS 검찰 "그런 적 없다"

    이에 검찰은 이례적으로 법정에서 변호인의 실명을 거론하며 "OOO 변호사께서는 무슨 근거로 검찰이 피의사실을 (언론에) 공표했다고 당당하게 말을 하시냐. 전직 대통령이 뇌물죄로 기소된 사건인 만큼 여러 언론인들이 관심 가지고 취재노력을 하고 있다"며 피의사실을 공표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했다.

    검찰이 이날 재판에서 피의사실 공표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인 이유는 최근 이어진 '적폐청산' 수사 과정에서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가 지속적인 지적을 받아온 탓이라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형법은 피의자의 인권 보호와 재판부의 유죄 심증 등을 막기 위해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지만 검찰은 공공연히 피의사실 공표를 지속했다.

    특히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는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서울중앙지검장) 지휘로 이뤄진 서울중앙지검의 적폐청산 수사에서 두드러진다. 검찰은 지난 14일 재판부에 이 전 대통령의 삼성 뇌물수수 혐의와 관련해 추가로 발견된 뇌물이 있다며 430만 달러(약 51억6000만원)을 뇌물액수로 추가하는 공소장 변경을 신청했다.

    검찰이 공식적으로 공소장 변경을 신청하기 전인 같은 달 11일 이미 언론을 통해 이 전 대통령의 뇌물이 더 있다는 내용의 기사가 연달아 보도됐다. <한겨레>는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송경호 부장검사)는 지난달 말 국민권익위원회로부터 이 전 대통령이 삼성으로부터 최소 수십억원의 뇌물을 더 받은 정황이 담긴 자료를 이첩받았다고 11일 밝혔다"고 보도했다.

    사법행정권 남용.삼성바이오 건도 '피의사실 공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로 구속기소 된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역시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 관행을 지적한 바 있다. 서울중앙지검이 양 전 대법원장을 수사하면서 그가 받은 여러 피의사실이 언론에 보도됐다. 임 전 차장은 자신의 첫 공판에서 "언론 보도를 통해 국민들과 판사들은 양승태 사법부가 엄청난 범죄자인 것처럼 인식하게 됐다. 피의사실 공표를 통한 여론 조성에 힘입어 기소에 이르게 됐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서울중앙지검이 수사하는 삼성바이오로직스의 분식회계 사건에서도 피의자들의 피의사실이 연일 언론을 통해 보도된다. <SBS>는 지난 10일 삼성이 지난해 5월 회의에서 삼성바이오의 분식회계 증거를 없애기로 결정한 뒤 해당 내용을 최고경영진에게 보고한 것을 검찰이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삼성 측은 이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내용이 일부 언론을 통해 무차별적으로 보도되고 있다. 이러한 추측성 보도가 다수 게재되면서 아직 진실규명의 초기단계임에도 불구하고 유죄라는 단정이 확산되어, 회사는 물론이고 투자자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피의사실 공표죄 사실상 사문화...기소 0건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가 이어지면서 법조계에서는 피의사실 공표를 금지하는 형법 조항이 사실상 사문화(死文化)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형법 제126조는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고 정했다.

    그러나 검찰 과거사위원회에 따르면 검찰이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1년간 총 347건(연평균 32건)의 피의사실 공표 사건이 접수됐지만 기소되거나 처벌된 사건은 0건이었다. 과거사위는 "검찰의 무분별한 피의사실 공표에 대한 엄격한 처벌과 이를 위한 실효적 법률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상기 법무부장관도 "피의사실 유출로 피의자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도록 주의하라"는 공문을 검찰에 내려보낸 바 있다.

    법조계 관계자는 "수사가 진행 중이거나 판결이 나오기 전일 경우 일반 독자는 보도된 피의사실의 진위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방도가 없다"며 "또 피의사실을 공표하는 검찰이 죄를 수사한다는 모순으로 사실상 피의사실 공표죄 조항이 사문화됐다는 지적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