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영령들은 어떤 심정으로 무너져가는 이 나라를 바라보고 있을까
  • ▲ 김규나 작가.ⓒ제공=김규나 작가
    ▲ 김규나 작가.ⓒ제공=김규나 작가
    제2차 세계대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투입된 밀러 대위(톰 행크스)와 병사들은 치열한 전투 끝에 임무를 완수한다. 그러나 사지를 겨우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느낄 여유도 없이 다시 적진 속으로 뛰어든다. 그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임무는 독일군 점령지에 고립된 라이언 일병을 무사히 데려오는 것.

    대원들은 불만이다.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것이 군인의 명예라지만 대통령이나 대장을 구출하는 것도 아니고 대령이나 대위, 심지어 말년 병장을 구하러 가는 것도 아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웃고 울던 전우들이 눈 깜짝할 사이 죽어나가는 전쟁터,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판에 얼굴도 모르고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일병 하나를 위해 왜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일까.

    사실 영화는 그 답을 손에 쥐어주고 시작한다. 라이언 일병은 평범한 미국 가정의 4형제 중 막내아들이다. 문제는 4형제가 다 참전했고 그 중 셋이 전사했다는 것. 이를 안타깝게 여긴 사령관은 그 어머니에게 아들을 하나라도 살려 보내는 게 국가의 도리라고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대원들과 관객의 의문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다른 병사들의 목숨은 라이언 일병의 목숨보다 못한가? 그들이 죽으면 그 어머니의 가슴은 누가 위로해줄 것인가?

    1998년에 발표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전쟁영화의 대명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촬영기법이나 배우들의 열연, 감동적인 스토리 전개 방식 때문만은 아니다. “왜 여덟 명이 한 명을 구하러 가야 하죠?” 병사들의 질문은 관객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고 끝없이 맴을 돈다. 묵묵히 작전을 이끌지만 답을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대원들을 설득하고 통솔해야 할 밀러 대위 역시 마찬가지다. 적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병사들이 “죽고 싶지 않아요. 엄마, 엄마. 집에 가고 싶어요”라고 울부짖으며 죽어갈 때마다 그는 이 말도 안 되는 임무, 아니 참혹한 전쟁의 의미를 찾아내려 애쓴다.

    6·25전쟁 발발한 지 69주년

    올해는 북한의 남침으로 6·25전쟁이 발발한 지 69주년 되는 해이다. 당시 우리 군 전사자는 13만8000여 명, 부상자와 실종자를 합한 사상자는 60만9000여 명이다. 세계 각지에서 파견된 유엔군 전사자는 5만8000여 명, 부상자와 실종자를 포함해 54만6000여 명의 인명피해를 입었다. 무기도 제대로 없던 한국군과 그를 돕겠다고 온 유엔군, 그들이 있었기에 대한민국의 영토와 자유를 지킬 수 있었다.

    어느 누구의 목숨도 다른 누구의 목숨보다 더 귀하거나 덜 귀하지 않다. 그런데도 왜 나와 전우의 목숨을 희생해서라도 라이언 일병을 구하러 가야 하는 것일까? 이 질문은 유엔사령부는 왜 공산화 위기에 놓인 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을 살려서 다시 자유의 품에 안겨주라는 명령을 내린 것일까 하는 질문으로 이어질 수 있다. 피부색도, 언어도 다른 세계 각국의 연합군은 왜 타국만리까지 날아와 소중한 목숨을 잃어야 했던 것일까.

    전쟁터에서는 그 누구라도 라이언 일병이 될 수 있다. 국가는 그 누구라도 라이언 일병과 같은 처지가 된 병사를 구하러 대원들을 보낸다. 이것이 국가와 군인 사이에 존재해야 할 신뢰이다. 라이언 일병을 구하려다 희생된 병사들과 그 가족은 국가가 반드시 책임지고 보살핀다. 이것은 국가가 지켜야 하는 엄중한 의무이다. 이러한 국가의 약속은 대표적으로 "Leave no man behind(단 한 명의 병사도 적진에 내버려두지 않는다)" "You are not forgotten(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이라는 JPAC(미국 국방부 산하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의 구호로 상징되고 실현된다. 영화에서는 남북전쟁 당시 참전했던 다섯 아들을 모두 잃은 어느 어머니에게 링컨 대통령이 보낸 편지로 그 약속을 증명한다.

    “저는 부인께서 전장에서 장렬히 싸우다 전사한 다섯 형제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어떠한 말로도 아들을 잃은 부인의 슬픔을 달래드릴 수 없음을 알고 있습니다만, 위로를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국가와 전우를 위해 전사했습니다. 이에 대한 심심한 조의를 표합니다. 긍지를 가지시고 아드님의 기억을 고이 간직하십시오. 그들의 죽음은 크나큰 손실이었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에이브러햄 링컨.”

  • ▲ 6·25 전쟁 당시 조국하늘을 수호하기 위해 출격하는 F-51D 전투기 편대.ⓒ공군
    ▲ 6·25 전쟁 당시 조국하늘을 수호하기 위해 출격하는 F-51D 전투기 편대.ⓒ공군
    해괴한 공간에서 빚어진 해괴한 반응

    얼마 전 청와대는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들을 점심식사에 초대했다. 6·25전쟁 참전용사와 천안함 폭침, 연평해전의 유가족을 5·18과 관련된 사람들과 같은 공간에 앉게 한 것도 이상해 보였지만, 행사 안내 팸플릿은 더욱 괴이한 것이었다. 백두산 천지와 평양 능라경기장에서 함께한 문(文)과 김(金)의 다정한 사진 두 장이 자랑스럽다는 듯 프린트돼 있었다. 우리나라 전쟁용사와 전사자는 김일성·김정일·김정은과 맞서 싸운 당사자들이다. 그 가족은 세습 3대의 총칼 앞에서 아버지와 남편과 아들을 잃은 피해자들이다. 그런데 이 해괴한 상황이 논란이 되자 청와대 한 관계자는 “비극적 희생자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도록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를 추진하는 것”인데 뭐가 문제가 되느냐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이상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6·25를 일으킨 북한 수뇌부 중 한 명이었던 김원봉이 국군의 뿌리라며 훈장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남북은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 없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슬픈 역사를 가졌을 뿐’이라는 괴상한 문장으로 북한의 남침 사실을 적극 부정하며 우리도 가해자라는 논리를 교묘하게 펼치는 사람. 자유 대한민국의 안보를 끝없이 위협해온 북한과 누구보다 가까이 지낸 어떤 이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는다고 일반 국민을 매도하는 사람들. 장례식장에 보내온 김정은의 조화를 영구보존하겠다는 무리들. 상황이 이렇다 보니 6월25일 당일에는 또 어떤 망언들이 난무할지 많은 국민이 우려하고 있다.

    구하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는 나라

    어느 국민이 이런 나라를 믿고 아들을 군에 보내고 싶을까. 구하기는커녕 부상당하고 숨진 라이언 일병은 쳐다보지도 않는 나라. 군인과 그 가족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나라. 어느 누가 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할까.

    라이언 일병은 자신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은 밀러 대위와 여섯 대원들의 몫까지 열심히 살아내려고 매일 매순간 노력했을 것이다. 구부정한 노인이 되어서야 대위의 무덤을 마주한 그는 고마웠다고 그래서 열심히 살았다고, 자신의 삶이 그들 마음에 들었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그만, 평생 등에 짊어지고 살아야 했던 그 무거운 짐을, 전우들의 목숨의 무게를 내려놓아도 되겠느냐고 물으며 울먹인다.

    ‘살아라. 우리의 피와 목숨으로 지킨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며 잘 살아가라’는 수많은 전사자들의 유지를 받들어 피땀 흘려 일으킨 대한민국. 그러나 이제는 어찌 손 쓸 수도 없게 되어버렸다며 울먹이는 이 땅의 수많은 라이언 일병들의 탄식과 눈물이 강이 되어 흐르고 있다. 호국영령들은 어떤 심정으로 무너져가는 이 나라를 바라보고 있을까. 모쪼록 여기가 끝이 아니길,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는 길이 열리길 염치없이 바라고 또 바랄 뿐이다.

    *소설가 김규나(장편소설 <트러스트미> <체리 레몬 칵테일>, 산문집 <대한민국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