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보길 뉴데일리 대표, 선진화포럼 강연… 각국 지도자들에 보낸 이승만 편지도 공개
  • ▲ 인보길(78) 뉴데일리 대표가 지난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에서 열린 한국선진화포럼 시민아카데미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박성원 기자
    ▲ 인보길(78) 뉴데일리 대표가 지난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에서 열린 한국선진화포럼 시민아카데미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박성원 기자
    “100년 전 3·1운동의 기획자,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15일 오후 2시 한국선진화포럼의 시민아카데미 2기 3차 강연이 열린 서울 마포구 한국사회복지회관 6층 소회의실.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이라는 주제로 인보길(78) '뉴데일리' 대표의 강연이 2시간 넘게 이어졌다. 3·1운동 하면 민족대표 33인만 떠올리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3·1운동을 기획했다는 것이 인 대표 강연의 요지였다. 

    인 대표는 “기획자라는 말이 나온 이유를 보려면 이승만 대통령이 배재학당에 다니던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면서 ‘3·1운동 기획자’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이승만, 만민공동회 주동자… 3·1운동으로 이어지다   

    인 대표는 1919년 3·1운동으로 이어진 독립정신이 그 이전부터 서울 거리 곳곳에서 발현됐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승만이 배재학당을 다니던 때 거리시위, 운동, 투쟁 등 운동권의 원조 모습을 보였다”며 “서재필 박사가 (당시 조선에) 들어와서 독립협회를 조직했고, 이승만은 독립협회 청년지도자가 됐을 때 종로 네거리에서 거리강연회를 열었다”고 설명했다. 조선 독립을 열망하던 사람들이 몰려들어 ‘만민공동회’(1898년 독립협회가 주최한 민중집회)라고 불렸다고도 했다.  

    이 만민공동회의 주동자가 이승만 대통령이라고 인 대표는 강조했다. 그러면서 “(3·1운동이 발발하기 한 해 전인) 1918년부터 대한독립 의지를 열망했고, 세계에 빨리 (독립 의지를) 과시하라고 요구했다”며 “(1918년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해로, 그해 1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세계 정세는 이승만 대통령의 예상과 다르게 돌아갔다. 인 대표는 “(1차 세계대전) 패전국들이 가지고 있는 식민지만 독립시키라는 논의가 나오자, 이승만은 연합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조선독립을 과시하는 사람을 보내야 한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이승만 대통령이 준비한 것이1919년 4월 발표된 ‘필라델피아 독립선언’이라는 것이다. 인 대표는 그 증거물로 김성수·이명신이 쓴 회고록을 각각 제시했다. 
  • ▲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는 15일 한국선진화포럼 시민아카데미 강연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박성원 기자
    ▲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는 15일 한국선진화포럼 시민아카데미 강연에서 '대한민국 건국의 재인식'이라는 주제의 강연을 했다.ⓒ박성원 기자
    ‘3·1운동 기획자는 이승만’이라는 내용에 대한 토론도 열띤 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승만 대통령은 1910년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18년 당시 조선에 없었는데 (강연에서는) 1919년 3·1운동의 기획자라고 했다”며 “어떻게 기획자인지, 이승만과 3·1운동의 연결고리나 3·1운동을 도운 이들 중 이승만 대통령과 가깝다거나 이런 인물이 있었는가”라고 묻는 참석자도 있었다. 

    이에 인 대표는 “실제로 당시 이승만 대통령을 대행해서 활동한 사람은 이상재·황태영”이라며 “당시 33인 대표는 젊은 층 중심으로, 이들은 일부러 33인 대표에서 빠진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건국 후의 건국운동, 독립 후의 독립운동”

    인 대표는 강연이 끝날 무렵, 건국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행보도 되짚었다. ‘건국 후의 건국운동, 독립 후의 독립운동’이라는 소제였다. 

    그 사례로 인 대표는 1952년 5월 발생한 부산정치파동을 거론했다. 부산정치파동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통령직선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헌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을 강제 연행한 사건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기도 했다. 

    인 대표는 이 사건의 배경으로 “미국이 야당과 손잡고 국회 쿠데타를 음모하던 상황이었다”고 설명했다. 당시 대통령선거는 국회의원들이 선출하는 간선제 방식이었다. 인 대표는 “이승만이 (북한과) 휴전에 결사반대하는 등 미국의 말을 잘 안 들으니, 미국 말을 잘 듣는 사람으로 대통령을 바꾸자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이 같은 상황에서 간선제의 위험성을 설파하며 ‘직접선거’를 제안헀다는 것이다. 

    당시 개정 헌법 1조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내용 등이 담겼다. 인 대표는 “(이승만이) 이참에 우리가 완성시키자, 직선제만이 답이라고 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4·19 혁명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보낸 편지 내용도 공개됐다. 

    “이제 나는 기쁘다, 똑똑한 국민이 생겼으니 내가 위로받을 이유가 없다.” 

    이에 대해 인 대표는 “당시 전 세계 지도자들이 이승만에게 위로 편지를 보냈고, 중국 장개석에게 이승만이 한 답장 내용”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