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 박찬 트럼프에 '최고 존엄' 당혹… '비핵화' 없을 땐 2017년 11월로 돌아갈 듯
  • ▲ 28일 미북 단독회담이 결렬된 뒤 기자회견장에 나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트럼프 대통령의 표정이 눈길을 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8일 미북 단독회담이 결렬된 뒤 기자회견장에 나오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 트럼프 대통령의 표정이 눈길을 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 등이 크게 기대했던 2차 미북정상회담이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끝났다. 김정은과 협상이 결렬된 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단독기자회견을 열고 “아직 판이 깨진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북한 비핵화 협상, 앞으로 어찌 될까?

    트럼프의 ‘미치광이 전략’ vs 김정은의 ‘시간 끌기 전술’

    베트남 하노이에서 27일부터 열린 2차 미북정상회담 전 과정을 돌아보면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의 지향점이 드러난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전면적 비핵화를 최대한 빨리 이루고자 하고, 김정은은 트럼프의 임기 끝까지 어떻게든 시간을 끌면서 정권을 유지하고자 한다. 두 사람 모두 기준으로 삼는 한계점은 2020년 11월 미국 대선이다.

    이번 미북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1시간30분이나 협상 시간을 연장하다 결국 회담장을 뛰쳐나왔다. 북한 측으로서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지난 30년 동안 자신들에게 화를 내고 협상장을 뛰쳐나가는 상대를 본 적이 없다. 김정은은 더더욱 그렇다. 소위 ‘최고존엄’인 김정은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말을 무시하고 뛰쳐나간 사람을 본 적이 없을 것이다.

    김정은과 북한당국은 이번 회담에 임하면서 트럼프 대통령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자 상대를 얕잡아 보는 실책을 범했다. 과거 김정일 당시 클린턴·부시 정부와 협상할 때처럼 한 번에 하나씩 ‘살라미(salami) 전술’을 사용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북한 측은 1994년 10월 제네바 핵합의에 따른 영변 핵시설 사찰 수용과 석유 공급, 2008년 6월 영변 냉각탑 폭파로 미 국무부 지정 테러 지원국에서 해제된 일 등을 떠올렸을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과거 정권들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말로 당선됐다. 북한의 ‘살라미 전술’이나 ‘벼랑 끝 전술’은 통하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정치인들이 상당히 꺼려하는, 과거 닉슨이 사용했던 ‘미치광이 협상법’을 사용했다. 상대방으로 하여금 “미국 대통령이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니 조심하자, 함부로 건들지 말자”고 생각하도록 하는 닉슨의 외교전략을 자신에 맞게 바꾼 것이다.

    단적인 예가 2017년 11월까지 이어지던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간의 ‘입씨름(Verbal Fight)’이다. 당시 김정은이 “내 책상 위에는 핵 버튼이 있다”고 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내 책상에는 더 큰 핵 버튼이 있다”고 응수했다. 매우 유치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위협한 것이다.
  • ▲ 2018년 1월 김정은이 선전매체를 통해
    ▲ 2018년 1월 김정은이 선전매체를 통해 "내 책상에는 핵단추가 놓여있다"고 협박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내 것은 더 크고 작동까지 한다"는 트윗을 올렸다. ⓒTV조선 당시 관련보도 화면캡쳐.
    트럼프 대통령은 심지어 “언제든 선제타격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전략자산들을 한반도와 그 주변으로 보냈다. 그러고는 거듭 공격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언제’인지는 밝히지 않아 북한을 전전긍긍하게 만들었다. 김정은이 이때 경험을 잊지 않았다면 이번처럼 ‘대북제재 전면 해제’라는 카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들이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 만족시키려면 ‘말잔치’ 아닌 ‘실물’ 내놔야

    협상이 결렬되자 일부 언론은 “한반도 상황 시계 제로”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시계 제로’는 아닌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다음 번 대화에서는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 “지금의 이견은 시간이 지날수록 좁혀질 것”이라며 ‘판을 깨버린 것’은 아니라는 점을 거듭 강조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상황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미북정상회담 때로 회귀된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260여 일 동안 미국과 북한은 물론 한국·일본·중국·러시아까지 ‘비핵화’와 제재 해제를 두고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물론 모두가 동의하는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그 사이 트럼프 대통령은 전선(戰線)을 집중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분산시켰다. 특히 중국을 향한 압박은 다른 나라들까지 불안하게 만들 정도였다. 결국 중국은 비핵화 문제에서 함부로 북한 편을 들지 못하게 됐다. 일본과 러시아도 통상문제와 유럽에서의 탄도미사일 문제로 끼어들 틈이 없었다. 

    실질적인 전선은 한반도와 미국으로 좁혀졌다. 그러나 한국도 경제문제가 얽혀 과거처럼 북한 편을 들 수 없게 됐다. 결국 비핵화는 미국과 북한 사이의 문제가 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에게 ‘용단’을 내리라고 거듭 촉구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 말 가운데 “김정은은 아직 준비가 돼 있지 않다”고 말한 대목은 김정은이 아직 결단을 내릴 준비가 안 됐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과 단독회담에서 “핵실험도, 미사일 발사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대북제재를 전면 해제해줄 것을 요구한 것이 실수였다. 사업가인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비핵화 문제를 말할 때마다 ‘말로만 하는 협상’을 지양하고 ‘실물가치 교환’이 이뤄지는 협상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여기서 나온 대북제재 해제의 전제조건이 “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FFVD)”다.

    풍계리 핵실험장과 영변 핵시설, 동창리 미사일 엔진 시험장을 해체하고 폐기한다고 해서 ‘북한 비핵화’가 됐다고 인정하겠다는 게 아니다. 미국이 알아낸 모든 핵시설과 미사일기지, 생산공장을 미국과 제3국 관계자들이 직접 가서 비핵화 조치에 이어 ‘봉인’까지 하고, 이것이 지켜지는지 감시할 수 있는 체계가 갖춰지는 ‘실물’을 얻어야 대북제재를 모두 해제하는 것은 물론 경제발전 기회까지 주겠다는 말이다.
  • ▲ 2017년 11월 당시 한반도 인근에 온 미 해군 항모강습단들. 당시 한반도 근해에는 3개 항모 강습단이 몰려 들었다. ⓒ미해군 공개사진.
    ▲ 2017년 11월 당시 한반도 인근에 온 미 해군 항모강습단들. 당시 한반도 근해에는 3개 항모 강습단이 몰려 들었다. ⓒ미해군 공개사진.
    김정은과 북한 측은 혹시 칭찬받는 것을 좋아하는 트럼프 대통령이라면 ‘감언이설’로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아닐까. 트럼프 대통령 취임 뒤 “트럼프는 아부를 좋아한다”는 미국언론과 정치인들의 조롱과 비아냥거림이 많았다. 이를 곧이곧대로 믿고 아부했다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나라가 한둘이 아니었다.

    최악의 상황은 2017년으로 회귀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양보를 얻어내려면 진짜 비핵화를 하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쉬운 일은 아니다. 태영호 전 영국대사관 공사는 지난 26일 일본 NHK와 인터뷰에서 “김정은에게는 비핵화 의지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27일 <뉴욕타임스> 베이징지국장과 인터뷰에서는 “김정은의 목표는 트럼프 대통령과 회담에서 시간을 벌고 제재 해제를 얻어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태 전 공사는 “김정은은 수십 년 동안 가동돼 이미 폐기했어야 할 노후시설을 미국에 넘기는 대가로 제재를 풀고, 핵무기와 미사일을 지키려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의 책과 블로그에서도 “북한 핵무기와 탄도미사일은 김정은에게 체제 유지 수단이기 때문에 절대 포기하지 못한다”고 거듭 주장했다. 태 전 공사의 말처럼. 김정은은 비핵화를 실행하기 어렵다. 용기가 없어서다. 김정은이 무서워하는 것은 미국과 한국의 공격이 아니라 중국을 등에 업은 북한 내 세력이 자신에게 도전하는 것이다. 개혁개방을 못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는 게 일부 탈북자들의 지적이다.

    김정은이 비핵화를 하지 않고 시간을 끌 경우 북한 핵문제는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 산하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26일(현지시간) ‘2019년 세계경제를 위협하는 10가지 요인’이라는 보고서를 공개했다. 그 가운데 여섯 번째가 “북한이 비핵화를 두고 2020년까지 시간을 끌려 하면서 미국이 대북 선제타격을 하는 것”이다.

    김정은은 비핵화 조치를 지연시키면서 2019년까지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핵탄두 장착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완료하려 하고, 이 사실을 아는 트럼프 대통령은 결국 유화적 태도를 버리고 2017년 11월 이전의 강경한 태도로 돌아가 한반도 긴장이 급격히 고조된다. 이때 미국의 대북강경파들이 “북한이 진짜 핵보유국이 되기 전에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는 시나리오다.

    EIU는 보고서에서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순간 헤아리기 어려운 수준의 인명피해와 재산피해, 그로 인해 세계경제가 타격을 입을 것이라는 시나리오가 오히려 가장 강력한 전쟁억지력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런 상황을 막을 수 있는 길은 역시 김정은이 비핵화 조치를 하고, 한국과 미국의 품으로 들어오는 것 외에는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