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지식사회의 심각한 진실성 결여와 게으름

'대한민국 수립'에 관한 한국사회의 집단 기억상실증

강규형 명지대 교수 칼럼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6.12.20 09:56:24
강규형 명지대학교 교수

 

한국의 지식사회는 심각할 정도로 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 논쟁을 하다가 본인이 틀린 것을 알아도 승복하지 않는다. 본인의 지적 사기가 밝혀졌는데도 변명만 하고 진정한 사과는 하지 않는다. 얼마 전 원로 교수인 경희대 도정일 교수가 수십년 동안  본인이 받지도 않은 하와이 대학 박사학위를 사칭한 것이 드러났어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대처한다. 징계해야할 대학은 그런 행각을 오히려 덮어주기에 급급하고 있다, 문제를 지적한 교수는 되레 따돌림을 당했다.
진정한 학술토론도 이뤄지기 힘드니 한국지식사회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목소리 큰 사람들이나 추종세력이 많은 사람들은 아무리 틀린 애기를 해도 지적하는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학술회의에 단체로 몰려와 근거 없이 고함치고 윽박지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요즘 온갖 단체 언론 방송에서 갑자기 국정교과서 공개본의 “대한민국 수립”이란 단어를 불경한 표현으로 매도하고 있다. ’건국‘보다는 약하고 중립적인 이 표현이 ’친일세력 옹호‘니 뭐니하는 무시무시한 단어로 둔갑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 문제는 그냥 넘어가기에는 한국사회의 심각한 병리현상을 잘 보여주고 있기에 세밀히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이승만 박사가 1948년을 건국 또는 대한민국 수립이라 표현한 적이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근거가 약하다. 물론 이승만은 1919년의 의미를 강조하는 표현을 여러 번 했었다. 그래서 제헌헌법 전문(前文)에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 국민은 기미 3ㆍ1운동으로 대한 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라고 썼다. 제헌헌법 전문은 1987년 헌법과 달리 3.1운동만 언급하고 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데, 1919년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1945년 해방, 그리고 1948년 대한민국 탄생은 결코 대립되는 개념이 아니고, 상호 공존해야만 하는 존재이며 통합된 과정의 산물로 해석해야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부와 제헌의회는 1948년 8월 15일을 독립기념일로 명명했고 거기에 따라 1949년 8월 15일 “제1회 독립기념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으며 이승만 대통령은 기념사에서 “오늘은 민국(民國) 건설 제1회 기념일”이라 언급했다. 그런데 그해 6월에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에 회부됐고, 4대 국경일인 3.1절, 헌법공표기념일, 독립기념일, 개천절 중에 헌법공포기념일을 “제헌절”로 바꾸고 독립기념일을 “광복절”로 바꾸는 수정안이 9월에 통과되면서 독립기념일이 광복절로 바뀌었다. 4대 국경일을 절(節)로 통일하자는 취지였다. 따라서 1950년 8월 15일에는 제2회 광복절 기념식을 거행했고, 1951년 8월 15일에는 제3회 광복절 기념식이 거행됐다. 며칠 전 있었던 한 학술회의에서 이러한 발표를 들은 어떤 교수는 회의가 끝난 후 “그런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필자에게 얘기했다.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을 근거 없이 그냥 못 믿겠다고 하느니 차라리 “믿기 싫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솔직했을 법하다.

또한 교과서의 대한민국 수립이란 문구가 3.1운동, 임시정부, 독립운동을 모두 부정하는 것이라며 무차별적으로 비방하는 일부 학계와 언론의 행동은 더 해괴하다. 일단 대한민국에서 이런 것들의 소중한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다. “1948년 대한민국 건국설”을 주장한다고 해서 이러한 가치를 무시한다는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먼저 교육부가  2015년 9월에 '2015 개정 역사과 교육과정'을 확정할 때 '대한민국 수립'이란 표현을 사용할 것을 예고했는데 지금 와서 갑자기 이 용어를 가지고 논란이 일어나는 것이 의아하다. 더군다나 국정교과서 공개본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이 수립됐다"는 표현이 도대체 어떻게 임시정부를 부정하고 친일세력을 옹호했다는 것인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공개본의 그 대목을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더 중요한 사실은 1948년 대한민국 수립(또는 빈도수는 적지만 대한민국 건국)이란 단어는 이미 예전부터 교과서와 여러 책들에서 계속 써왔던 용어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시절의 교과서에도 물론 사용된 용어이다. 일각에서 우려하는 대한민국수립이란 표현은 건국절 논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국의 대표적인 한국사 개설서인 고(故) 이기백 교수의 '한국사신론'(일조각)도 1948년 8월15일을 '대한민국의 성립'이라 서술하고 있고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의 '다시 찾는 우리역사'(경세원)도 '대한민국 수립'으로 돼 있다. 1948년 설을 가장 격하게 부정하는 이만열 숙명여대 명예교수도 자신이 편찬한 ”한국사연표“ 290쪽에 그날을 ”대한민국 수립 선포“라고 명확히 표기했다.

교과서를 보자면 1차와 2차 교육과정에서도 이 단어는 압도적으로 많이 채택됐었다. 3차부터 6차까지의 국정교과서에서도, 7차 교육과정 한국근현대사 검인정교과서 6종 중 4종에서, 2011년부터 시행된 개정 한국사교과서에서도 6종 중 3종, 현행 교과서 중에서도 비상교육출판사 출판본에 ‘대한민국의 수립’이라 서술됐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교과서들과 책들은 “임정을 부정하고 친일세력을 옹호”한 사람들인가?

집단기억상실증에 걸린 것인가 아니면 지적인 자기기만에 빠진 것인가. 일부 역사학계와 정치권의 자가당착적 주장과 여기에 앵무새처럼 맹목적으로 동조한 일부 방송과 신문들은 깊이 반성하고 명확한 답변을 내놓아야 할 것이다. 한국좌파가 맹종하는 모택동(毛澤東)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조사하지 않으면 발언하지 마라” 어느 사안에 대해서건 조사하고 잘 알지 못하면 발언을 하지 말란 경구이다. 더 이상 ‘대한민국 수립’이란 단어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지적인 진실성을 결여한 사람들이라 얘기할 밖에 없다. 역대 교과서들과 관련 책들을 찾아보지도 않고 무작정 비판한 사람들은 모택동의 경구를 마음에 새겨라. 공부하고 알아보지 않았으면 아예 언급을 하지마시라.

- 강규형 명지대학교 교수

(본 칼럼은 조선일보 2016년 12월17일자에 게재된 칼럼을 필자가 수정증보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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