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 최대 휴먼스토리 전하고 싶어, 기념공원 조성 도와 달라”
  • ▲ 정원의 7배가 넘는 1만4,000여명을 태우고, 기적적으로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한, 흥남철수작전 당시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조형물.ⓒ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정원의 7배가 넘는 1만4,000여명을 태우고, 기적적으로 거제도 장승포에 도착한, 흥남철수작전 당시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 조형물.ⓒ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경남 거제=김정래 기자]

    “6.25 한국동란과 1.4후퇴.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동토(凍土)의 땅, <장진호전투>의 패전과 철수는 우리 자유민들에게는 크나큰 절망이었다.

    실낱같은 희망으로 미군과 국군을 따라 흥남부두에 모인 북한 피란민들은 또 한 번 절망을 만난다.

    남쪽을 향해 떠나는 미군 수송선들은, 후퇴하는 미군과 국군을 태우기에도 부족했으나, 김백일 육군 1군단장, 현봉학 통역관(재미 의학자), 알몬드 미군 10군단장, 포니 미국 대령, 피란선박을 운전한 라루 선장 등의 헌신과 노력으로, 불가능하게 여겨졌던 피란민 승선의 길이 열렸다.

    그렇게 기적과 같은 탈출이 이뤄지면서, 10만 여명의 북한 동포가 자유대한으로 넘어올 수 있었다. 이것이 <흥남철수작전>이고, 인류사에 영원히 빛나는 [휴먼스토리] 탄생의 시작이다”

       - 거제 <평화가축병원> 이경필 원장


    1950년 12월 25일 성탄절. 북한 흥남부두를 떠난 미군의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한 명의 남자아이가 태어났다.

    세계 전쟁사에 길이 남을 흥남철수작전 과정에서, 그것도 미군과 국군, 북한에서 자유를 그리며 목숨을 걸고 탈출한 피란민들로 북적인 배 안에서 태어난 이 아이는, 출생 자체가 [기적]이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은, 이 아이에게 <김치(Kimchi) 5>란 별명을 붙여줬다. 흥남부두를 떠난 미군 수송선에서 태어난 아이는 모두 합해 5명. 라루 선장은 이 아이들에게도 각각 <김치 1>부터 <김치 4>까지의 이름을 지어줬다.

    <김치(Kimchi) 5>, 누구보다 태어난 여정이 특별했던 이 아이는, 자신이 태어난 미군 수송선이 피란민들을 내려놓은 거제에서 자랐다.

    본명은 이경필, 올해 65세 거제 장승포에 있는 <평화가축병원> 원장.
    크리스마스에 태어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는 애칭으로 평생 불려온 이 원장의 기억 속 흥남철수작전은, 그의 말대로 인류사에 길이 남을 한편의 빛나는 [휴먼스토리]로 남아 있다.

    그런 그가 최근 언론을 통해 자신의 꿈을 밝히기 시작했다.

    잊혀지기엔 너무나 특별한 <흥남철수작전>. 이 장쾌한 휴먼드라마를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기념 공원]을 만들고 싶다는게 그가 밝힌 꿈의 핵심이다.

  • ▲ 거제 평화가축병원 이경필 원장. 1950년 크리스마스, 흥남철수작전 마지막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그에게 , 이 배의 선장 라루는 ‘김치(Kimchi) 5’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거제 평화가축병원 이경필 원장. 1950년 크리스마스, 흥남철수작전 마지막 미군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태어난 그에게 , 이 배의 선장 라루는 ‘김치(Kimchi) 5’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자유의 좌표를 찾아서

    <흥남철수작전>이 벌어지기 전인 1950년 12월 어느 날, 이경필 원장의 할머니는 UN군과 국군이 중공군에 밀려 퇴각하자 아들과 만삭의 며느리에게 "자유의 땅으로 떠나라"고 말한다.

    그리고 본인은 "고향과 집을 지키겠다"고 말했다. 이 말이 이 원장의 할머니와 부모가 나눈 생애 마지막 대화였다.

    65년 전, 이 원장의 자유를 향한 인생 행로는 이렇게 시작됐다.

    이 원장은 태어나면서부터 참혹한 전쟁의 역사 한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이 원장은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말한다. 어머니의 뱃속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긴박함도, 추위도 몰랐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원장은 “전쟁으로 인해, 스스로 평화와 은혜, 나눔이라는 소명을 갖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이 원장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생전에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한 말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이 평화의 땅에서 살게 된 것은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교수, 그리고 많은 미군들의 도움과 거제도 사람들의 따뜻한 정성이 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도움받은 은혜를 잊지 말고, 은혜를 갚을 줄 아는 사람이 되라.”


    <흥남철수작전> 당시, 이 원장의 부모님이 탄 피란선 <매러디스 빅토리>호의 수용인원은 최대 3,000명, 그러나 당시 이 배에 탄 인원은 무려 1만4,000명이 넘었다.

    <흥남철수작전>이 전쟁사 최고의 휴먼스토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10만명이 넘는 피란민의 탈출은, 미군과 국군의 목숨을 건 인류애가 빚어낸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다.

    이 기적의 액소더스를 거쳐 이 원장의 가족은 평생을 거제도에서 살았다. 이 원장의 부모는 사진관 등을 하며 3남 1녀를 훌륭히 키워냈다.

    전쟁의 역경 속에서, 자유의 좌표를 찾아 몸부림쳐온 이 원장의 집안은 4대에 걸쳐 [평화와 자유]라는 인류애를 몸소 실천하고 있다.

    1대 할머니는 자식과 며느리, 언제 태어날지 모르는 손자 이경필과 생이별을 하며 자신의 후손들을 자유의 땅으로 보냈다.

    2대인 이 원장의 부모님은 <평화사진관>, <평화식당>을 운영하며 자식들에게 평화와 나눔, 은혜의 소중함을 교육했다. 3대인 이원장 자신도 <평화가축병원>을 운영하며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고 있다. 4대인 이원장의 장남은 공군사관학교를 나와 공군 중령(편대장)으로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키고 있다(이 원장의 아들은 공군 조종사들이 기체 이상 등을 이유로 긴급 탈출을 하는 경우, 해당 조종사를 구조하는 헬기 편대장을 맡고 있다).


    광복 70주년 맞아, ‘기념공원’ 조성이 꿈

    이경필 원장의 하루는 눈 코 뜰 사이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흥남철수작전>을 기리기 위한 [기념공원 조성사업] 추진 현황을 살피는 한편, <메러디스 빅토리>호(중국에 고철로 팔린 뒤, 해체돼 없어짐)와 같은 임무를 수행했던 <레인 빅토리>호를 미국에서 사오기 위한 활동에 한창이다.

    여기에 본업인 가축병원 일도 봐야한다.
    이 원장은 주 진료종목은 소와 돼지 등 대형동물이다. 이 탓에 병원 내 진료보다 외곽 지역으로 출장이 많다. 하루에도 20~30Km는 다반사로 왕진한다. 주변에서는 이 원장을 두고, [바보 수의사]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다.

    이 원장의 식을 줄 모르는 열정에 꿈만 같았던 [기념공원 조성사업]은 한발 두발 나아가고 있다.

    이미 이 원장은 <흥남철수작전 기념공원> 조성을 위해, 거제시 장승포동 70번지에 면적 99,000m²에 이르는 부지를 확보했다. 이곳에는 총사업비 280억원을 들여 <흥남철수작전>을 기념하는 상징조형물, 전망대 등을 세울 계획이다. <레인 빅토리>호 인수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이 배도 이 곳에 자리를 잡을 예정이다.

  •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배에 오르는 피란민들을 표현한 조형물을 가리키며,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의 절박함과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작전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호와 배에 오르는 피란민들을 표현한 조형물을 가리키며,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의 절박함과 급박했던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 원장의 목표는 기념공원을 통해, 피난민의 애환과 생활상을 조명하고, 전쟁과 평화, 자유의 소중함을 느낄 수 있는 체험교육의 장을 마련하는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 관람객이 곧 1,000만명도 넘을 거라고 한다.
    어려운 시절 모두가 하나 돼 가족을 지키자고 했던 아버지 세대에 대한 헌사를 이야기로 담고 있어서 기분이 참 좋은 영화였다.

    다만, 영화에서 흥남철수작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우리 피난민을 실은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거제도 장승포가 아닌 부산으로 도착하는 것처럼 묘사돼 아쉽기는 했다.

    <흥남철수작전>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장소가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 이경필 원장


    아쉬운 것은 또 있다. 이 원장의 열정과 노력에도 기념공원 조성사업은 점차 추진력이 약해지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김백일 장군을 친일파로 몰아 세우는 선동이다. 공원 조성을 반대하는 좌파단체들은 <흥남철수작전>에서 공을 세운 김백일 장군이 친일 인사이기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폄훼한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를 위한 집회와 소송을 벌이기도 했다.

  • ▲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 선 이경필 원장. 이 원장은“1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들에게 자유의 땅과 생명을 준 김백일 장군의 정신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먼저 생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김백일 장군 동상 앞에 선 이경필 원장. 이 원장은“1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들에게 자유의 땅과 생명을 준 김백일 장군의 정신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먼저 생각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에 대해 지난 해 <흥남철수기념사업회>는 거제시장을 상대로,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 명령 및 철거집행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을 냈고, 대법원 승소 확정판결을 받아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백일 장군에 대한 친일파 비난공세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로 인해 이 원장의 숙원인 기념공원 조성사업도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 원장은 “김백일 장군에 대한 친일 논란은 대법원의 판결로 더 이상 논란의 여지가 있어서는 안 되는 사안”이라며, “10만 명에 이르는 피란민들에게 자유의 땅과 생명을 준 김백일 장군의 정신은 그 어떤 가치보다도 먼저 생각돼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피난민 구한 ‘포니 장군’ 후손, “한국은 제2의 고향”

    이 원장은, 지난해 정전 60주년을 맞아 한국 국방부의 초청 및 방송국 다큐멘터리 촬영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이때 이 원장은 오바마 미국 대통령을 방문해 한미동맹의 굳건함을 확인하는 한편, 한국전쟁이 무승부가 아닌 한국의 승리임을 확신했다고 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한국전쟁의 결과로 5,000만 명의 한국인들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릴 수 있게 됐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고 극찬하는데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

       - 이경필 원장


    이후 이 원장은 평화와 은혜, 나눔의 감사와 실천의 뜻으로 2개의 감사패를 준비했다.

    이 원장은 [미국의 영웅](American Hero)에 대한 감사패를 미국 재향군인회장에게 전달했고, 다른 하나는 흥남철수 작전 당시 자유를 찾아 <메러디스 빅토리> 호에 올랐던 피란민을 구출한 故 에드워드 포니 준장(당시 대령)의 증손자 벤 포니에게 전달했다.

  •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기념비에서 김백일 1군단장, 현봉학 통역관(재미 의학자), 알몬드 10군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 라루 선장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 이경필 원장이, 흥남철수 기념비에서 김백일 1군단장, 현봉학 통역관(재미 의학자), 알몬드 10군단장, 에드워드 포니 대령, 라루 선장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뉴데일리 정재훈 기자

    이 원장은 “감사패를 전달하는 자리에서, 포니 준장의 증손자인 벤 포니가 한국전쟁과 <흥남철수작전>에 대해서 할아버지에게 들어 자세히 알고 있다”며, “한국을 사랑한다고 울먹이면서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고 싶다. 한국의 대학으로 공부를 하러 가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고 전했다.

    이 원장은 “젊은 청년 벤 포니를 보며 이제 우리도 도움을 주고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갚아야할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밝혔다.

    현재, 포니 준장의 증손자 벤 포니는 서울대학교 국제대학원에 재학 중이다.
    벤 포니는 올해 초 입학해 첫 학기를 마쳤으며, <한국전쟁기념재단 참전용사 후손 장학생>으로 선발돼 등록금과 생활비를 지원받았다.

    이 원장도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벤 포니가 자신과 만난 이후, 스스로의 말대로 한국을 제2의 조국으로 삼고, 한국의 청소년들에게 안보의식을 일깨우고, 한국전쟁과 흥남철수작전에 대해 알리는 일을 하는 것에 자랑스러워했다.

  • ▲ 이경필 원장은 지난해 12월2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현봉학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56), 헬렌 현(53)씨,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씨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 사진 tv조선 화면 캡처
    ▲ 이경필 원장은 지난해 12월2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현봉학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56), 헬렌 현(53)씨,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씨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 사진 tv조선 화면 캡처

    이경필 원장은 현봉학 박사의 딸들과 포니 대령의 손자도 직접 만나 감사패를 전했다.

    이 원장은 지난해 12월25일,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서 현봉학 박사의 딸인 에스더 현(56), 헬렌 현(53)씨,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 포니(51)씨와 감동적인 상봉을 했다.

    현씨와 포니씨는 이 자리에서 “당신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선물이군요.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화답했다.

    이들은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통해서 흥남철수작전과 ‘김치 5’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이경필 원장과의 만남을 반겼다.

    이들의 생일 축하인사에 이경필 원장은 “흥남에서 떠난 피란민 10만명 중 마지막 배에서 태어난 끝둥이가 바로 저입니다. 그날 수송선으로 후송된 10만명이 이제는 증손자까지 100만명이 됐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원장은 “15년 전에야 처음으로 제가 흥남 철수 중 배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며 “작년에 미국을 찾아가 포니 대령의 묘역을 참배했다”고 전했다.

    이 자리에서 현 박사의 딸인 에스더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포니 대령의 손자를 만났다고 들었지만 직접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헬렌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돼서야 얼마나 자랑스러운 분인지 자세히 알게 됐다”며 “훌륭한 일을 했지만 자신의 행동이 이산가족을 만든 건 아닌지 속상해하셨다”고 말했다.

    포니 대령의 손자인 네드씨는 1998년 현봉학 박사를 만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현 박사를 만나고 나서야 자신의 할아버지가 했던 일을 알았다고 털어놨다.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깊은 감명을 받은 네드씨는 흥남철수작전을 주제로 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인연으로 한국을 찾은 네드씨의 아들은 한국에 매료돼 서울대 국제대학원에서 4년 째 공부를 하고 있다.

    이경필 원장과 현 박사의 딸, 포니 대령의 손자는 ‘처음 만났지만 가족 같은 기분“이라며 친근함을 나타냈다.

    지난해 12월 국가보훈처는 현봉학 박사를 ‘이 달의 전쟁영웅’으로 선정했다. 전투병이 아닌 통역병이었던 그가 전쟁영웅으로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김치(Kimchi) 5’ 이경필, ‘김치1~4’ 근황은?

    이 원장은 <흥남철수작전>의 마지막 수송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서, 피란민 10만명 중 마지막 신생아로 태어났다. 같은 날, <메러디스 빅토리>호에는 크리스마스가 생일인 [김치 형제]가 4명 더 있었다.

    이 원장은 현재 <김치 1> 이외에는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김치 1>과는 지난해 만난 것이 마지막이라고 했다.

    서울에 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김치 1>은, 언론에의 노출을 상당히 부담스러워 한다고 했다.

    이 원장은 나머지 [김치 형제]들에 대해 “그저 들리는 소문으로 ‘외국에서 살고 있다’, ‘벌써 세상을 떠났다’고 듣는 정도이고,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말했다.


    10만 피란민과 그 가족을 구한 영웅,
    김백일현봉학, 포니 대령, 라루 선장

    “피란민 배에 태우지 못하면 미군 앞에서 배라도 가르자”


    세계 전사에 유래가 없는 민간인 구출 작전인 흥남철수작전은 1950년 12월 12일 시작됐다.

    동원된 수송선은 모두 193척, 작전 막바지 미군과 한국군 수뇌부의 설득 끝에 맥아더 사령부가 흥남부두에 모인 10만여명의 피란민 전원을 구조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한국과 일본에 있던 민간 선박이 징발돼 작전에 투입됐다.

    이경필 원장을 태우고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떠난 7,600톤급 미국 상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도 부산에 있다가 흥남부두로 온 수송선 중 하나였다.

    미군이 처음부터 한국의 피란민을 구조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철수작전 초기 미군의 관심은 장진호 부근에서 중공군에 포위돼 막대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미 해병 1사단 1만2천명을 안전하게 철수시키는 일이었다.

    미군은 이를 위해 해군과 공군의 화력을 총 동원해 중공군의 남하를 저지했다. 미 해군 1사단 병력이 안전하게 흥남까지 퇴각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다.

    이때, 미군은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난다.

    미군과 한국군의 철수 소식을 들은 북한 주민들이 퇴각하는 미군의 뒤를 따라 행렬을 이루기 시작한 것.

    피란민들은 미 해병대의 후미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를 썼고, 뒤늦게 철수한 미군 공병대는 피란민들과 뒤섞여 행진했다.

    피란민들의 상황은 비참했다. 눈 위에서 불도 없이 밤을 지새우며 미군을 따라 왔다. 철수를 앞둔 흥남부두는 미군과 한국군, 피란민들로 뒤엉켜 아수라장이었다.

    미 해병 1사단을 시작으로 군대의 승선이 속속 이뤄졌다. 부두에 모인 피란민들은 수송선에 털 수 있을 것이라는 기약도 없이 부두를 떠나는 수송선을 바라봐야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군의 방어선은 축소됐고,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격은 거세졌다.

    피란민들에 대한 수송계획 자체가 처음부터 없었던 미군 수뇌부는 미군과 국군의 철수상황에만 관심을 가질 뿐이었다.

    이때, 처음 미 10군단장 알몬드 장군에게 피란민 구출을 호소한 이가 현봉학 박사다.
    미 1ㅣ군단 민사부 고문이자 통역관으로 있던 현봉학 박사의 고향은 함흥이었다. 현 복사는 피란민 구출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 ▲ 현봉학 박사.ⓒ 국가보훈처
    ▲ 현봉학 박사.ⓒ 국가보훈처

    현 박사는 알몬드 장군의 부참모장인 포니 대령(작고, 이후 준장 진급)을 만나 도움을 청했고, 포니 대령은 현 박사의 손길을 흔쾌히 잡아 줬다.

  • ▲ 에드워드 포니 대령.ⓒ 사진 연합뉴스
    ▲ 에드워드 포니 대령.ⓒ 사진 연합뉴스

    포니 대령과 함께 알몬드 장군을 만난 현 박사는, 피란민 구출을 간절히 호소했다.

    “장군님. 이들은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는 자들입니다. 지난 5년 간 그들은 공산주의자와 대항해서 싸웠습니다. 유엔군을 도와준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포니 대령도 힘을 보탰다.

    “그들(피란민)은 생명의 위험을 각오하고 우리를 도왔습니다”

    현봉학 박사와 포니 대령의 호소에 알몬드 장군의 반응은 미온적이었다.

    알몬드 장군은 “당신들의 의견에 동의하지만 현재로서는 군대조차 제대로 탈출할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다. 확신 할 수가 없다”며, “맥아더 사령부에 건의해 보겠다”고 말했다.

    - 월간조선, 영화 '국제시장'의 배경, 世界史의 결정적 순간 - 흥남철수 作戰


    현봉학 박사는 이후에도 여러 차례 알몬드 장군에게 호소를 했다.

    미군의 미온적인 반응과 달리 흥남에 모인 한국군 지휘부는 처음부터 피란민과 함께 하겠다는 의지가 확고했다.

    육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은 최악의 경우, 자신들이 피란민들을 엄호하면서 걸어서 퇴각하겠다고 배수진을 쳤다.

  • ▲ 김백일 장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백일 장군.ⓒ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와 관련된 정일권 전 육군참모총장의 회고록 한 부분.

    김백일 장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야 군인이니까 민간인 배를 타고 빠져나갈 수 있겠지.
    여기 북한 동포들은 어디로 가나, 산으로 가나 바다로 가나.
    울면서 제발 이남으로 데려가 달라는 거야.
    북괴놈들이 무지막지하게 보복을 하고 있다는 거야.
    알몬드는 군대 수송이 먼저라고 하겠지.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동포들을 배에 태우겠네.
    그러니까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거든 잘 수습이나 해주게.


    김백일 장군은 12월 19일 흥남 1군단 사령부에서 피란민 수송대책 회의를 열었다.
    수도사단장 송요찬 준장, 군단 민사처장 유원식 중령 등 참모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김백일 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끝까지 미군과 교섭을 벌여야 한다.
    수십만 명의 목숨이 달린 일이다.
    정 못 하겠다고 하면 그 사람들 앞에서 배라도 갈라야 한다.
    정 안 되면 차라리 우리 총으로 쏴 죽이는 편이 났다.
    어차피 북괴놈들에게 당할 테니 말이다.
    최악의 경우 우리가 피란민들을 직접 데리고 가야 한다.
    미국이 영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 국군 1군단이 피란민을 엄호하면서
    육로로 후퇴하자.

    - 1950년 12월19일, 김백일 육군 1군단장


    김백일 장군의 말에 참모들도 모두 동의했다.

    김백일 장군의 민사참모였던 유원식 중령은, 국군의 이런 계획을 접한 알몬드 장군 측은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현봉학 박사와 포니 대령의 거듭된 호소와 김백일 장군을 비롯한 국군 1군단 지휘부의 확고한 의지에 알몬드 장군은 마음을 돌렸다.

    그러나 피란민 구출은 이후에도 고비를 겪어야만 했다.

    피란민 전면 철수가 결정되면서 한국과 일본에있던 민간 선박들이 징발돼 흥남부도에 모였으나, 수송선이 피란민을 얼마나 구조할 것인지는 개별 선박에 타고 있던 선장과 선원들의 의지에 달려있었다.

    12월20일 부산에서 올라온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흥남항으로 들어섰다.

    라루 선장의 증언.

    처참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북한 피란민들이 선창에 떼를 지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레로 나르거나, 들것, 혹은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은 모두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들의 옆에는 놀란 병아리들처럼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뒤에는 그들을 죽이거나 포로로 하려는 중공군이 있었고, 그들 앞에는 넓은 바다가 펼쳐져 있을 뿐이었습니다.

    닻을 내리자 美 10군단 존 차일즈 대령이 승선했다.

    우리가 당신에게 피란민을 태우라고 명령할 수는 없소,
    당신이 자원하여 얼마라도 태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고 싶소.
    상급선원과 의논해 결정을 내려 줄 것을 부탁하오.

  •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 출처 월간조선
    ▲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라루 선장.ⓒ 출처 월간조선


    이 말을 들은 라루 선장은 누구와 상의하지도 않고 배를 부두에 댈 것을 명령했다.

    12월22일 밤 9시부터 피란민 승선이 시작되었다.

    라루 선장은 일등항해사에게 “피란민을 승선시키시오, 1만명이 되면 나에게 보고하시오”하고 지시했다.

    승선은 다음날 오전 11시가 되어도 끝나지 않았다. 최종 승선을 마쳤을 때 1만4,000명이 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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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빅토리호의 정원은 최대 3,000명, 정원의 7배가 넘는 피란민을 태운 빅토리호는 3일간의 항해 끝에 거제 장승포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리고 이 배에 탔던 이경필 원장의 부모는 12월 25일 배 안에서, 이 원장을 낳았다.

    김백일 장군이 일본군에 복무한 경력이 있다는 이유로 친일 논란에 휘말려, 그 동상에 페인트가 뿌려지는 모욕을 당했을 때, 이경필 원장을 비롯한 피란민 가족들이 김 장군의 명예회복에 앞장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흥남부두에서 수송선을 탄 10만명이 넘는 피란민들에게, 김백일 장군과 현봉학 박사, 포니 대령과 알몬드 장군은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이 없다.

    이들의 영웅담을 가장 잘 알고 있는 피란민들에게, 김백일 장군 동상에 대한 테러는 참을 수 없는 치욕이다.

    거제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서 있는 김백일 장군의 동상은, 피란민과 그 후손들의 노력으로 철거의 위기에서 벗어났다.

    2013년 10월 16일 대법원 1부(주심 박병대 대법관)는 ‘사단법인 흥남철수작전기념사업회’가 거제시장을 상대로 낸, ‘김백일 장군 동상 철거명령 및 철거집행 처분 취소소송’ 상고심에서, 동상을 철거하지 않아도 된다고 한 원심 판결을 확정했다.

    앞서 2011년 7월 당시 거제시장은, 일부 좌파단체의 의견을 받아들여 기념사업회 측에 동상의 철거를 요구하고, 불응하는 경우 강제철거에 나서겠다는 계고장을 보냈다.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에 설치된 김백일 장군의 동상은 2011년 5월 기념사업회가 세웠다.

    거제시의 요구에 기념사업회는 동상 철거의 부당함을 강조하면서 소송을 냈고 1심과 2심은 물론 대법원도 기념사업회측의 손을 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