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 1만 해경직원들은 조갑제닷컴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海警을 두들기던 조선일보도 海警 및 소방청 해체 비판:

  •  "합리적이지도, 지속가능하지도 않다."

    趙甲濟  
   대한민국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士林(사림) 등 소위 먹물 먹은 양반계층(士)이 정권을 잡고    商工계층과 李舜臣 같은 군인들을 멸시하던 조선조의 정치행태로 돌아간 듯하다. 신판 양반계     층이 기자, 검사, 판사, 교수, 정치인, 지식인, 종교인이다. 바다와 선박을 잘 모르는 대통령에게   '해경해체'라는 속삭임을 들려준 자, 그대가 역적이다. 

與野 합의로 누더기 식의 海警(해경)해체안이 결정된 직후인 어제 오후 한 海警 간부로부터
이런 휴대전화 메시지가 들어왔다.

  
  <감사합니다. 끝까지 저희를 응원해 주시고 아낌 없는 성원과 진실된 기사만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1만 해경직원들은 조갑제닷컴을 결코 잊지 않을 겁니다. 오늘 여야합의는 곧 국회를 통과하겠지만 그동안 대표님 덕분에 중앙언론사도 반성하고 해경해체 반대를 주장한 것을 저희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뜨겁게 저희를 사랑하시고, 보듬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 험난한 길이 있겠지만 더 열심히 이 나라, 이 조국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오늘 결정은 반드시 번복될 날이 올 겁니다>는 답신을 보냈다. 
  
  오늘자 조선일보는 社說에서 <애당초 海警·소방청 해체 발표가 성급했다>는 제목으로 朴槿惠(박근혜) 정부의 海警해체를 비판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결정은 합리적이지도 않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
해경은 세월호 참사의 초기 구조에 실패한 책임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기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과 운영의 문제라고 봐야 한다. 사고가 날 때마다 기구를 이리저리 옮긴다면 온전한 부처가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해경은 기본 업무 중 하나가 해난 구조와 우리 어선 보호이지만, 해양 주권(主權)을 수호해야 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우리와 바다를 맞댄 나라들은 모두 해경을 키우고 있는데, 우리만 해경을 구조(救助)와 안전 중심 조직으로 바꾼다는 것이 과연 현명한 방향인가.>
  
  社說은 또 <소방방재청은 10년 전 1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청원 서명운동을 벌여 독립청으로 발족했다>면서 <재난 현장에 목숨을 걸고 들어가야 할 사람들의 처우를 개선하지는 못할망정 어렵사리 이뤄진 조직 독립이 수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이 신문은 <더구나 소방청은 세월호 사고와 직접 관계도 없다>면서 <정부는 31일 소방청 해체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소방청장과 차장을 동시에 경질하는 극단적 조치까지 취했다. 무리한 행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비판했다.
  
  社說은 이어서 <이미 야당은 다음 대선 때 정권을 잡으면 해경과 소방청을 모두 원상 회복시키겠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면서 <與黨의 후보도 같은 공약을 내걸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신문은 <불과 3년 후에 뒤집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이로 인한 낭비는 또 누가 책임질 것인가>라고 끝냈다.
  
  이 조선일보 사설은 늦은 감이 있다. 지난 7월 하순 조선일보 사설은 해경을 무리하게 비판했다. 조선일보 社說(사설) 제목은 <검·경의 無能, 숱한 괴담 낳고 '정부 不信' 키운다>였다. 이런 대목이 있었다. 
  <해경은 세월호가 침몰할 때 제 발로 걸어나온 사람 이외엔 단 한 명도 구조해내지 못했고, 안전행정부·해양수산부 공무원들은 실종자 숫자도 정확히 헤아리지 못했다.>
  
  쓴 대로 해경은 제발로 걸어 나온 사람을 다 구했다. 배가 절벽처럼 기울고 있어 구조 가능 시간이 40분 정도밖에 안 되었는데도, 제 발로 船室(선실) 바깥으로 걸어나온 사람을 다 구한 것은 욕할 일이 아니라 칭찬할 일이다. 문제는 해경이 제발로 걸어나온 사람 말고도 제발로 걸어나올 수 없는 사람들, 예컨대 船室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유리창을 깨고 여러 명을 구했다는 사실이다. 아래 글을 읽어보면 알 수 있고 동영상에도 잡혀 있는 사실이다. 
  
  사실이 그런데도 조선일보는 너무나 자신만만하게 <해경은 세월호가 침몰할 때 제 발로 걸어나온 사람 이외엔 단 한 명도 구조해내지 못했고>라고 호통을 쳤다. 언론의 생명인 사실확인을 소홀히 하고, 잘못된 판단을 근거로 과격한 주장을 한 것이다. 해경은 동네북이니 사실확인을 할 수고도 필요 없이 마구 때려도 된다는 안이한 태도가 느껴진다. 아니면 언론의 誤報(오보) 선풍에 언론이 스스로 넘어간 경우인지도 모르겠다. 
  
  뉴욕타임스라면 다음 날에 이런 訂正(정정)을 했을 것이다. 
  [<해경은 세월호가 침몰할 때 제 발로 걸어나온 사람 이외엔 단 한 명도 구조해내지 못했고>라는 어제 문장은 사실과 다르기에 바로잡습니다. 해경 구조대는 제 발로 걸어나오지 못한 乘船者(승선자) 여러 사람들을 구출하였음이 확인되었습니다.]
  
  별 생각 없이 타성적으로 쓴 것 같은 이런 문장 하나가 海警人(해경인)의 가슴에 못을 박아 원한을 산다. 박근혜 정부가 최대의 실책으로 기록될 해경해체를 강행하게 된 데는 조선일보의 부정확한 보도도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뒤늦게나마 조선일보가 해경해체를 비판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해경해체의 핵심인, 명칭 변경과 수사 정보 기능의 박탈(초동수사권은 해경, 그 이후 수사권은 경찰청으로 再분리)은, 해경의 정체성과 통합성과 안보기능에 중대한 타격을 주어 우리가 60년 동안 육성해온 소중한 제도 하나를 말살하는 바보짓이다. 
  
  검사 출신을 重用(중용)하는 박근혜 정부가 선동언론에 넘어가 해경, 119 구조대(소방청), 국군 지휘부 등 안보 치안 종사자들을 난폭하게 다루고 공무원 집단 전체를 '官피아視' 한다면 다음 선거 前에 이들의 반격으로 좌파가 집권할 수 있는 비밀통로가 뚫릴지 모른다. 공무원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 표는 약 500만이다. 대한민국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士林(사림), 科擧(과거) 급제자 등 소위 먹물 먹은 양반계층(士)이 권력을 잡고 商工계층과 李舜臣(이순신) 같은 군인들을 멸시하던 조선조의 정치행태로 돌아간 듯하다. 책상머리에서 펜대를 굴리면서, 해경, 군인, 119처럼 현장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신판 양반계층이 기자, 검사, 판사, 교수, 정치인, 지식인, 종교인이다. '배운 무식자' 그룹으로 분류되어야 할 사람도 많다. 바다와 선박을 잘 모르는 대통령에게 '해경해체'라는 自害的(자해적) 속삭임을 들려준 자, 그대가 역적이다. 
  
  
  /////////////////////////////////////////////// 
  *대통령의 해경해체 발표 당일 이를 비판한 글
  
  해양국가가 해경을 해체? 朴대통령의 非理性的 결정을 개탄하다!
  
  언론의 선동 보도에 굴복하고, 해경의 구조가 실패하였다는 誤判에 근거한 과격한 처방은
그의 지도력을 치명적으로 약화시킬 것이다. 
  
  趙甲濟 
   
  "해경을 희생양으로 바쳐 대통령의 인기를 지켜주려는 發想에 朴 대통령이 넘어간 것인지, 朴 대통령의 독단적 발상에 전문가들이 굴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책임은 朴 대통령이 져야 한다." 
   
  
   오늘 대한민국 대통령은 言論(언론)의 선동에 굴복, 진실·正義(정의)·자유를 근간으로 하는 헌법정신과 국가이익에 배치되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 특히 세계적인 해양국가로 성장한 대한민국을 海警(해경) 없는 나라로 만들겠다고 선언하였다. 海警 해체는 海軍(해군) 해체와 비견되는, 너무나 非이성적이고, 과격하고, 감정적인 결정이다. 물론 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되어야겠지만 오늘 朴 대통령의 연설은 그의 지도력을 회복 불가능한 수준으로 약화시킬 위험성이 있다. 
   
   그는 바다와 배를 모르는 기자들의 과장과 왜곡과 날조 보도를 그대로 수용했다.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해경은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습니다. 사고 직후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人命(인명) 구조활동을 펼쳤다면 희생을 크게 줄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해경의 구조업무가 사실상 실패한 것입니다>는 말은 우선 사실과 다르다. 
   
   평온한 바다에서 過積(과적), 急變針(급변침) 등의 사유로 큰 배가 갑자기 기울어 한 시간 반 만에 전복된 것은 세계 海難(해난) 사고 역사상 유례가 드문 경우이다. 그만큼 구조가 어려웠다는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해경은 구조요청을 받은 뒤 40분을 前後(전후)하여 세월호에 구조헬기와 구조정을 보내 배가 뒤집어지기까지의 40여분 사이 172명을 구조하였다. 
   
   언론의 보도태도를 보면 왜 전원 구조하지 못하였느냐는 식이다. 해경은 결정적 제약 조건하에서 구조활동을 해야 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暴論(폭론)이다. 
   
   1. 船長(선장)과 선원이 먼저 배를 버리고 탈출, 船內(선내)의 지휘체제가 무너졌다. 바깥의 海警과 긴밀하게 협조, 구조 작업을 이끌어야 할 船內의 사령탑이 없어졌으니 해경은 자신들의 정보와 수단에 의존하여 自力으로 탈출하려는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구조할 수밖에 없었다. 
   
   2. 해경은, 배가 처음 30도 이상으로 기울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속도가 붙은 듯 급하게 넘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시간에 쫓기면서 구조하여야 했다. 구조선이 도착하였을 때는 船體(선체)가 이미 60도로 기울어 사실상 절벽이 되었고 40여분 뒤 완전히 전복되었다. 바다와 배에 無知(무지)한 기자들은 왜 해경이 船室(선실)에 들어가지 않았느냐고 온갖 비방을 쏟아놓지만 평평했던 바닥이 수직의 벽이 되고 종국에는 하늘처럼 천장이 되는 상황에서 그런 이상적인 구조 작업은 인간의 힘으론 불가능하였다. 제한된 인력으로 제한된 시간에 무리하게 船室에 들어가려고 했더라면 구조대가 구조대상이 되었을 것이고 살릴 수 있던 사람을 놓쳤을 것이다. 다수 구조 전문가들도 船室 진입은 불가능하였다고 이야기하는데 박근혜 대통령은 그것이 가능하였다고 전제하고, 해경을 비방하는 기자들의 억지 주장을 고스란히 받아들여 해경의 구조작업을 실패라고 규정, 해체를 결정했다. 실패라고 규정한 것은 허위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고 그 誤判(오판)을 근거로 하여 해경 해체라는 중요 국가 정책을 결정한 것이다. 2중의 잘못이다. 
   
   3. 해경 해체는 국가의 안전 및 안보와 관련된 주요 기관을 없애는 일로서 해양국가에선 유례가 없는 일종의 暴擧(폭거)이다. 해양국가에서 해군이 안전 사고를 냈다고 육군에 흡수시켜버리는 것과 같은 결정이다. 
   
   朴 대통령은 <앞으로 수사·정보 기능은 경찰청으로 넘기고, 해양 구조·구난과 해양경비 분야는 신설하는 국가안전처로 넘겨서 해양 안전의 전문성과 책임을 대폭 강화하겠습니다>라고 했는데 지극히 전문성이 있는 해경 업무를 바다를 잘 모르는 비전문가에 맡겨 전문성과 책임을 강화하겠다는 모순이다. 그동안 해경이 잘한 일은 전적으로 무시하고 불가항력적 상황에서 최선을 다한 구조를 실패라고 규정하니 처방이 이렇게 과격하고 감정적이며 비이성적이다. 領海(영해)를 침범하는 중국어선에 올라가 血鬪(혈투)를 벌이는 해경, 천안함이 폭침될 때 해군보다 먼저 달려가 전원 구조한 해경, 연락을 받자마자 주변 선박에 비상을 걸고 全速(전속)으로 세월호에 접근, 172명을 구조한 해경은 대한민국 해경이 아니고 무슨 유령국가의 해경이었던가?
   
   4. 주자학과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신분 차별을 받아들인 조선조는 반도국가임을 잊고 內陸國(내륙국) 행세를 하면서 해운과 漁業(어업)과 무역을 멸시하고 폐쇄정책을 폈고 그 결과는 망국과 식민지였다. 뱃사람들은 바다와 배를 모르는 육지의 양반들로부터 '뱃놈'이라고 불리면서 거의 賤民視(천민시)되었다. 그들의 운명을 바꾼 것은 대한민국의 建國(건국)이었다. 대한민국이 분단된 조건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출범, 수출입국 정책을 펴니 남한은 사실상 섬이 되었다. 李承晩(이승만), 朴正熙(박정희)는 이런 조건을 逆(역)으로 활용, 민족의 생존과 번영의 무대를 바다와 해외에 걸었다. 그리하여 한국은 무역, 해운, 조선 등 해양 분야에서 세계적인 신흥강국으로 急浮上(급부상)하였다. 해양정신의 재발견인 것이다. 
   
   5. 이번 세월호 침몰을 보도한 언론은 뱃사람을 멸시하고 해외진출을 억제하던 조선조의 닫힌 양반처럼 바다도 海運(해운)도 모르면서, 그 無知(무지)를 덮기 위하여 海警을 난도질하였다. 무식하므로 용감했던 것이다. 해경에 대한 인민재판 식, 마녀사냥 식 보도는 사실과 현실과 과학을 떠난 공상소설 수준이었다. 이런 선동 보도를 견제하고, 반박하면서 목숨을 건 수색 작업을 펼치는 海警을 지켜주어야 할 정부와 대통령은 선동 언론에 굴복, 해경의 등에 칼질을 하더니 해경 해체라는 전근대적 수구적 처방을 내어놓았다. 해경을 희생양으로 바쳐 대통령의 인기를 지켜주려는 發想(발상)에 朴 대통령이 넘어간 것인지, 朴 대통령의 독단적 발상에 전문가들이 굴복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모든 책임은 朴 대통령이 져야 한다. 
   
   6. 오늘 對국민 선언은 일시적으로 朴 대통령의 인기를 회복시킬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그의 리더십에 치명적 타격을 가할 것이다. 검찰 조사, 國政(국정)조사 이전에 대통령이 나서서 爭點(쟁점)이 있는 사안에 대하여 '해경의 구조가 실패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대통령이 사법부의 역할을 한 셈이다. 이는 三權(삼권)분립의 원칙, 無罪(무죄)추정의 헌법적 원칙에 위배될 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목숨을 건 수색 작업을 펼치는 해경에 피눈물을 나게 하는 지극히 비윤리적 행동이다. 해경의 구조가 실패하였다는 公言(공언)으로, 박근혜 대통령은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죽게 하였다는 선동세력의 공격에 아무런 방어 수단 없이 노출되는 처지가 되었다. 自業自得(자업자득)이다. 
   
   진실이 아닌 허위, 합리가 아닌 감성, 國益(국익)이 아닌 인기에 근거한 국가 정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前科者(전과자)가 20%나 되는 국회가 理性(이성)을 발휘하여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을 견제해주기를 바라야 하는 처지가 비참하다. 
   
   *덧붙임: 대통령이 공식적으로 '관피아'라는 말을 썼다. 기자들이 만든, 과장된 용어를 국가의 공식문서에 담았다. 한국의 관료가 마피아라는 뜻이다. 대통령은 그렇다면 마피아 두목인가? 언론의 선정적 造語(조어)를 이성적이어야 할 국가가 수용하면 國家(국가) 이성은 마비된다. 
  ,,,,,,,,,,,,,,,,,,,,,,,,,,,,,,,,,,,,,,,,,,,,,,,,,,,,,,,,,,,,,,,,,,,,,,, 
  
  세월호 조타실로 진입했던 海警(해경) 朴相旭 경장:
“제발 사실대로만 써주세요. 부탁입니다”
  
  李東昱(조갑제닷컴 편집위원) 
  
   
   ■ 조타실로 진입 성공했던 海警 朴相旭 경장의 이야기
      
   “텅 빈 조타실 내부엔 붙잡을 게 하나도 없었다.” 
   “영웅처럼 써 주지 마시고 부디 사실 그대로만 써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 총성이 울리는 戰鬪(전투)나 범죄 혹은 대형 사고가 발생하면 보통 사람들은 공포에 질려 그곳에서 도망치지만 오히려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사람들이 있다. 군인, 경찰, 구조대원, 그리고 선진국에서는 記者(기자)도 포함된다. 그들은 건강한 신체와 건강한 정신의 소유자로서 他人(타인)의 생명을 구하고 지키기 위해 惡(악)과의 싸움을 마다 않는 善(선)한 戰士(전사)들이다. 우리는 이런 戰士들을 얼마나 키우고 어떻게 대접해 왔는가. 
   
   ○ 언론들은 목숨 걸고 조타실로 진입한 海警(해경)에 의심의 눈길을 던지기 바빴다. ‘왜 조타실만 들어가고 선체 내부진입은 못했냐’는 것이다. 사실 확인 없는 의심에서 출발한 세월호 유언비어는 머지않아 ‘선원만 구하고 승객을 방치했다’는 ‘海警과 船主(선주)간 유착설’을 만들어 냈다. 그 결과 제일 먼저 현장에 도착해 가장 많은 생명을 구한 123정 승무원들과 헬기 승무원들은 그 후 관계기관의 조사를 받아야 했다. 현장을 무시한 채 책상머리에서 이론을 만들고 유포시킨 조작 전문가들이 용감한 戰士를 파렴치犯(범)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목숨 걸고 조타실로 진입에 성공했던 朴相旭(박상욱) 경장의 이야기는 다르다.    
   정리: 李東昱 편집위원 
   
   
   “경사진 철판바닥을
젖은 구둣발로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海警 (공채) 216기에 2009년 7월76일자로 임용된 해병대 출신의 朴相旭 경장(37)은 기자에게 자신이 겪었던 구조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몇 번의 조사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의 기억이 많이 정리되었다고도 했다. 다음은 박 경장의 이야기를 정리한 내용이다.> 
   
   몇 시인지도 모릅니다. 123정으로 급하게 달려가다 보니 큰 배가 기울어져 있는 이상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던 겁니다. 파도는 안 치는데 배는 기울어져 있었고 간간이 사람들이 바다로 뛰어내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있는 쪽에서는 큰 여객선 치고는 의외로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았고 컨테이너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봤습니다. 
   
   123정에서 세월호의 船首(선수)쪽으로 접안시켜 제가 세월호로 올라탔습니다. 123정에서 발진한 고무보트로 이형래 경사도 세월호로 올라왓습니다. 근무복에 단화를 신은 채였지요. 좌현 쪽으로 기울어진 세월호의 3층인지 4층인지 모르지만 아직 거기까지는 물이 차 오지는 않았을 때였습니다. 
   
   제가 조타실을 올려다 보고 있을 때 李 경사는 난간에 설치된 구명벌을 발로 차 두 개를 떨어뜨렸는데 한 개만 퍼졌습니다. 그 다음에는 더 이상 구명벌을 떼내지 못할 정도로 기울었습니다. 즉시 李 경사가 5m 정도 위의 船內(선내)로 진입하려 했지만 얼마 못 버티고 아래 난간 쪽으로 미끄러졌습니다. 
   
   그 때 李 경사가 진입 시도하려던 곳이 조타실입니다. 제가 있던 船首 쪽에서 조타실 정면이 잘 보였습니다. 분명 몇 사람이 보였습니다. 동남아인으로 보이는 외국인도 두어 명이 있는 것 같았고요. 그런데 배가 左舷(좌현)으로 기울어져 있어서 붙잡고 오를 만한 것이 안 보였습니다. 제가 오를 곳을 찾고 있을 때 李 경사가 좌현 쪽에서 접근하려다가 실패한 거지요. 경사진 철판 바닥을 젖은 구두를 신고 오른다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뭐라도 잡을 게 있었다면 완력(腕力)으로 매달리기라도 하면서 오를 텐데 그런 게 하나도 없었어요. 
   
   “사람들이 공중에 붕 떠있는 느낌”
   
   그러는 사이에 저는 기울어진 조타실 창문으로 어떤 아주머니를 봤습니다. 구명조끼도 걸치지 않았는데 완전히 공포에 질린 표정, 사색(死色) 그대로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보였다 안 보였다 했는데 이 아주머니는 저와 눈이 계속 마주쳤습니다. 그래서 소리 쳤지요. 
   
   “내려오세요.” “내려오세요.” “그냥 내려오세요.”...
   
   고함을 질렀지만 아주머니는 꼼짝을 못해요. 처음엔 답답했다가 나중엔 어떤 감정이 솟구치더군요. 화가 났다는 표현은 안 맞는 거 같고 그게 뭔지 모르겠는데, 제가 옆에 있었다면 그냥 확 밀어버리고 싶었습니다. 차라리 어디 한 군데 부러지는 게 낫지, 저대로 가만있다가는 침몰하는 배와 함께 익사할 게 뻔했거든요. 너무나 위험한 상황이었고 너무나 답답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다시 외국인들이 보이는데 마치 공중에 사람들이 붕 떠 있다는 느낌이었습니다. 기울어진 조타실 창문으로 사람들을 봐서 그럴 겁니다. 
   
   우리로서는 조타실에 보이는 사람들이 선원인지 승객인지 구분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배에서 처음 본 사람들이었으니 구해야 했고요. 어떻게든 사람들을 빨리 구해내야만 하는 절박한 순간이라고 느꼈으니까요. 조금 전 이형래 경사가 조타실로 올라가다 주루룩 미끄러지는 걸 지켜보던 123정에서 계류삭(繫留索)인 ‘홋줄’을 건냈습니다. ‘홋줄’은 배를 부두에 정박시킬 때 육지의 ‘비트’라 불리는 쇠기둥과 배의 ‘비트’끼리 연결하는 두터운 밧줄인데 우리 ‘홋줄’은 직경이 약 5cm 정도 됩니다. 이걸 李 경사가 받아서 아래에서 조타실로 던져 올렸지요. 다행히 조타실 내 승객 중 한 사람이 이 줄을 받아서 문 짝 어딘가에 고정 매듭을 만들었습니다.
   
   李 경사를 보며 이제 곧 올라가겠구나 했는데 아니었습니다. 조타실과 연결된 ‘홋줄’에서 줄줄이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李 경사는 오르던 걸 포기한 채 조타실에서 탈출해 내려오는 사람들을 받아서 123정으로 옮겨 타도록 도와주는 일에 전념합니다. 저도 그 일에 몰입했지요.
   
   기억나는 것이, 123정으로 옮겨 타려면 발판을 밟고 올라서야 하는데 여자들이 근력(筋力)이 없어서인지 자기 신체를 지탱할 힘이 없더군요. 제가 발 하나 하나를 발판에 옮겨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123정과 세월호와의 높이가 달라져 가더니 세월호가 너무 낮아지는 겁니다. 이 장면이 동영상에 나오던데 우리는 그 때까지 123정에 옮겨 타는 사람들이 선원인지 승객인지 구분할 틈이 없었습니다. 아마 이 과정에서 선원들이 옮겨 탄 듯합니다. 
   
   “텅 빈 조타실에서 홋줄 매듭은 끝나고…”
   
   이렇게 옮겨 태우고 나니까 더 이상 승객들이 안 내려 오는 겁니다. 그 때 저는 세월호에 타고 있었는데 123정에 승선하고 있던 대원들이 저더러 뭐라고 손가락질을 하면서 소리를 치는 겁니다. 헬기 소리 때문에 도무지 알아먹을 수가 없었는데 하도 긴박하게들 소리치는 모습을 보면서 제 나름대로 해석했지요.
   
   ‘아, 조타실로 들어가서 남은 승객들에 대한 모든 조치를 다 취하라고 지시하는 모양이구나.’
   
   저는 조타실 아래쪽으로 이동해 승객들이 타고 내려 온 밧줄을 잡고 올라갔습니다. 그게 조타실 左舷 측문입니다. 머리 위로 기울어진 방으로 들어가는 거지요. 이미 바닥은 벽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사진 採證을 한 어떤 분의 말씀에 의하면 그 때 바닥이 적어도 70도에서 80도는 돼 보였다고 했지만 저로서는 그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줄을 잡아야만 겨우 두 발을 바닥에 댈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줄을 단단히 잡은 채 조타실 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조타실은 텅 비어 있었습니다. 더구나 문 안쪽에서 ‘홋줄’ 매듭은 끝이 나고 있었습니다. 뭐라도 잡을 게 있었더라면 그걸 잡고 船室 내부로 더 들어갈 수 있었을 테지만 船室 벽은 대부분 두꺼운 철판이거나 합성수지계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둘 다 표면이 매끄럽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게다가 더 이상 잡을 것이 안보이니 무엇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아예 줄을 놔 버렸습니다. 몸이 거의 선 채로 미끄러져 내려갔지요. 아래 난간 쪽에 몸이 부딪히면서 정지할 수 있었지만 빨리 이동할 수 있는 방법이었습니다.
   
   보통 저희 같은 구조대원이나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이 근육을 많이 키우는 이유가 있습니다. 웬만한 충격을 견디기 위해서 입니다. 충격으로 근육이 파열되면 타박상은 입게 되지만 임무는 완수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약한 근육을 가지면 충격을 근육이 막지 못해 골절상을 입게 되고 그렇게 되면 임무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구조대상이 돼 버립니다. 그날 저희 대원 모두가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지만 우리로서는 그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조사받을 때 보니까 저희가 일부러 선체 내부 진입을 안했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누구라도 들어갈 수 있다면 들어가지 안 들어가겠습니까? 매끈한 바닥이 벽으로 변하고 있는데, 손톱이라도 걸 데가 있다면 모를까 잡을 곳이 하나도 안 보이는 겁니다. 그래도 의심나면 船體 비슷한 걸 세워두고 한 번 올라가 보라고 해 보세요. 하여간 저는 더 이상 어떻게 버틸 수도 없어서 줄을 놓고 미끄러져 내려 온 겁니다.
   
   “눈에 안 보이는 거대한 힘과 싸우는 중”
   
   그때 ‘윙 브릿지’라 부르는 左舷 날개 쪽에서 승객 한 분을 발견했습니다. 구명조끼도 없이 난간을 붙잡고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겁니다. 급히 제 구명조끼를 벗어 입혔습니다. 저는 맨몸으로 수영해 갈 자신이 있었거든요. 물에 빠진 사람들을 구해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뭐든 잡으면 절대 놓지 않으려 한다는 거지요. 구명복을 입히려 하는데 난간을 붙잡고 놓질 않으니 무척 애를 먹어야 했습니다. 겨우 제걸 입히면서 보니까 비닐봉지가 뜯어지지도 않은 세월호 승객용 구명조끼 한 벌이 구석에서 뒹굴고 있는 겁니다. 얼른 이걸 집어서 뜯고 제가 걸쳤습니다. 그리고 승객에게 말했지요.
   
   “자, 같이 뛰어 내립시다.” 
   
   우리는 그렇게 해상투신(海上投身)을 한 겁니다. 나중에 뉴스 영상을 보는데 바다로 뛰어내리는 승객이라고 설명하던데 그게 두 사람입니다. 한 사람은 승객이고 다른 한 사람은 저였습니다. 바닷물로 뛰어들었지만 솔직히 물이 찬지 뜨거운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 걸 느낄 만한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물속에서 구두를 벗어버리고 승객의 호흡을 유지한 채 수영을 하려다 보니까 옆에 단원고 학생 세 명이 떠 있는 겁니다. 
   
   침몰 중에 있는 큰 배 옆으로 작은 배는 접근할 수 없습니다. 法이 아니라 自然의 힘을 아는 사람들의 經驗입니다. 큰 배가 침몰하는 순간에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 웬만한 어선들도 빨려들거든요. 그러면 세탁기 속의 소용돌이처럼 물살이 생겨서 매우 위험해집니다. 123정 같은 110톤급 함정도 소용없습니다. 그래서 초기에 어선들도 구조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들었지만 가까이 근접하지 못한 겁니다. 모두 공포에 질린 채 사태를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장을 모르고 방송만 보면 구조하는 모습이 답답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현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거대한 힘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거기에 걸리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합니다. 다행히 그 상황이 오기 전에 123정의 고무보트가 신속하게 다가와서 학생들과 우리를 건져 올렸습니다.
   
   고무보트에서 123정으로 옮겨 탄 뒤에 저는 신발을 대신할 운동화를 찾아 신었습니다. 그리고 승객용 구명조끼를 벗고 배에 있던 해경용 구명조끼로 갈아입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고무보트가 쉴 새 없이 승객들을 건져 날랐습니다. 고무보트가 이때부터 어선에도 승객들을 나눠 태웠을 겁니다. 
   
   우리는 고무보트에서 123정으로 승객들이 올라오도록 잡아당기곤 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우리 배에 타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지요. 무조건 실어야 했습니다. 시시각각 침몰 순간은 다가오니까 이탈 시간을 놓치면 우리 배도 침몰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호흡이 정지된 승객이 실려 왔습니다. 먼저 온 승객은 젊은 남자였는데 李 경사가 저와 같이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습니다. 그때 우리 배에서 근무중이던 義警 중 하나가 환자의 팔 다리를 주물러 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한 오 분 정도 했을까요? 갑자기 구토를 하면서 호흡이 돌아왔습니다. 이 친구는 소생(蘇生)한 겁니다. 
   
   잠시 뒤에 또 한 사람이 의식불명인 채로 배로 옮겨졌습니다. 학생이었는데 제 기억이 맞다면 이름표가 ‘정찬웅’이었을 겁니다. 이형래 경사와 제가 즉각 심폐소생술을 시작했습니다. “바다에 떠 있어 건졌는데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고 구조대원 중 누군가가 전해 주었습니다. 뇌진탕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의 神이 끌어가기 전에 제가 살려내야 한다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도해도 이 친구는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폐 소생술이 예상외로 무척 힘이 듭니다. 제가 지치면 李 경사가 시도하는 식으로 교대로 했지만 더 이상 바이탈 사인(Vital sign·호흡, 맥박, 체온, 혈압 등 活力 징후-注)이 생기질 않아서 헬기로 후송시켜야 했습니다. 그럴 때의 절망감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중에 뉴스를 들으니 사망했더군요. 
   
   유리창 부수고 구조하다
   
   이런 와중에 누군가가 “선실 유리창 안에 사람들이 있다!”고 소리쳤습니다. 우리 배가 船首 쪽으로 돌면서 발견한 모양이었습니다. 제가 급히 망치를 들고 세월호로 옮겨 탔습니다. 이형래 경사와 이종훈 경사 그리고 제 곁의 한 분은 구조된 승객이라 기억하는데 그 분도 저와 같이 유리창 깨는 작업을 함께 했습니다. 제가 들고 있던 30cm 정도 되는 나무자루에 주먹 만한 쇠뭉치가 달린 망치였는데 이걸로 몇 번 가격해도 유리창이 멀쩡했습니다. 아마 가격할 때 자세가 불안정해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기울어진 바닥에서는 망치질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번에는 이종운 경사가 망치를 들고 저는 123정에서 전해준 쇠파이프 지주봉을 들고 때렸습니다. 지켜보던 123정에서 鐵製 지주봉을 뽑아 저에게 전해 준 겁니다. 함정에 추락방지용으로 설치한 鐵製 봉이었지요. 제 옆에 서 있던 승객도 망치를 건네 받은 뒤에 같이 몇 번을 내리 쳤습니다. 그래도 유리창은 멀쩡했습니다. 그때 제 곁에 있던 승객이 망치를 내리치는 순간 ‘퍽’ 하고 유리창이 깨져 나갔습니다. 거의 동시에 船室에서 두 손이 번쩍 올라왔습니다. ‘만세 자세구나’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오는 손 마다 잡고 끌어냈습니다. 하지만 이도 두 사람이 끝이었습니다. 세 번째 사람부터는 손이 잡히질 않았습니다. 배가 더 기울어지면서 사람들의 손이 유리창 부근으로 다가오질 않는 겁니다. 이번에도 123정에서 ‘홋줄’을 건네 주었습니다. 이걸 내려주어 사람들이 줄을 잡고 올랐습니다. 이들을 끌어올리면서 오른 손등에 아픔이 느껴졌습니다. 보니 피가 제법 나오고 있었습니다. 유리창을 깨면서 파편에 베인 줄 알았습니다. 다음날 퉁퉁 붓기 시작해서 병원엘 갔더니 부분 근육 파열이란 진단을 받았습니다. 기억해 보니 유리창을 깨던 도중에 123정과 세월호 사이에 제 손이 끼었던 겁니다. 경황이 워낙 없어 그 장면을 기억해내는 데도 시간이 걸린 모양입니다. 
   
   나중에 조사받으면서 다른 쪽 유리창을 안 깼냐고 하는데 우리로서는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인원은 제한돼 있었고, 그래서 視覺도 제한됩니다. 더구나 유리창 위로 물결이 일렁이면 뻘물이어서 잘 안보이게 되는데다가 전반사(全反射)로 인해서 보는 각도에 따라 하늘만 비치는 경우가 많았거든요. 
   
   유리창을 깨고 선실에서 승객을 구출해 낼 무렵에 배의 기울기가 점 점 더 심해져 갔습니다. 
   船首쪽으로는 컨테이너들이 계속해서 물위로 떨어지고 있었고요. 이때쯤 123정에 탄 구조자들을 다른 어선으로 분산해서 진도 팽목항으로 실어 날라야 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저는 123정 정장님의 지시대로 낚싯배 한 척을 맡아 28명의 구조자들을 옮겨 태운 뒤 팽목항으로 인솔하는 임무로 전환했습니다. 
   
   부모 잃은 여섯 살바기 少女
   
   팽목항으로 가는 도중에 구조자들을 보니 모두가 혼이 빠진 모습이었습니다. 학생들은 체온이 떨어져 입술이 진한 보라색으로 변한 채 벌벌 떨고 있었고 노인 한 분은 기진해서 일어나 앉지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더 가슴 아픈 장면은 6살짜리 여자아이였습니다. 다행히 그 아이는 구조되었지만 부모님의 生死가 그 순간까지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엄마를 찾는 그 아이의 우는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한 채로 제 가슴을 아리게 합니다. 
   
   제가 그날 시계를 본 기억이 없습니다. 팽목항에 도착한 뒤엔 기자 4명을 태우고 다시 123정으로 복귀합니다. 다시 돌아온 바다에 세월호는 이미 배를 벌렁 뒤집은 채 가라앉고 있었고 인근 해역에는 수많은 경비정과 해군 함정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더 이상 水上 구조는 없었던 겁니다. 이제부터 탁한 물속을 더듬어서 찾아야 하는 水中 수색이 남아있을 겁니다. 잠수요원들의 분투를 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겁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첫 날 구조에 참여했던 이야기입니다. 
   
   끝으로 조갑제닷컴 기자님께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영웅처럼 써 주지 마시고, 부디 있는 사실 그대로만 써 달라는 겁니다. 전부 구조하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그런데 海警이 해체된다니까, 그래서 제가 더 조심스럽습니다. 제발 사실 그대로만 알려 주셔도 저희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까요? 정말 사실 그대로만 전해질 수 있는지,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