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하와이 정착 가옥ⓒ윤희성 기자
    ▲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하와이 정착 가옥ⓒ윤희성 기자


    1913년 2월3일, 38세 이승만(李承晩)이 하와이에 도착했다. 조지워싱턴대와 하버드대를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한인 최초로 정치학 박사 학위까지 받은 이승만의 하와이 입도(入島)소식은 호놀룰루 현지의 한인들에게는 화제였다. 1902년부터 1904년까지 하와이 사탕수수, 파인애플 농장 노동자로 이민을 떠났던 한인들은 7천5백여명이 이미 하와이 오아후(Oahu)섬 호놀룰루에 정착해 있었다. 하와이 도착한 이승만을 위해 당시 교민들은 푸누이(Puunui) 거리의 한 가옥을 마련해 줬다.  

    이승만이 하와이에 도착한지 101년이 지난 2014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던 18명의 대학생이 푸누이 거리를 다시 방문했다. 대한민국 건국대통령의 업적을 둘러보는 것과 하와이 이민 1세대가 독립운동을 위해 무엇을 했는지 직접 살펴보기 위해 18명의 대학생들은 하와이를 지난 23일부터 30일까지 방문했다. 하와이 오아후 섬의 호놀룰루는 물론 빅아일랜드(하와이섬)의 힐로시의 한인동지촌까지 한인들의 흔적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들렸다. 

  • ▲ 하와이 호놀룰루 알로하 타워는 한인 이민자들이 처음 도착한 곳이다ⓒ윤희성 기자
    ▲ 하와이 호놀룰루 알로하 타워는 한인 이민자들이 처음 도착한 곳이다ⓒ윤희성 기자



    1902년 대한제국의 한인들은 자유를 찾아 하와이로 떠났다. 1904년까지 7천5백여명의 한인들은 인천항(제물포항)을 떠나 하와이 호놀룰루의 알로하 타워(ALOHA TOWER)에 도착했다. 배는 21일간 태평양을 가로질렀다. 하와이에 도착한 한인들은 사탕수수 농장과 파인애플 농장의 노동자로 정착했다. 이들은 한인 단체를 결성하고 한인 교회를 만들고 한인 학교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913년부터 25년간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활약한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노력이 있었다. 

    1898년 미국에 병합된 하와이주는 8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한인들은 호놀룰루(Honolulu)가 있는 오아후섬에 정착해 훗날 힐로(Hilo)가 있는 빅아일랜드(하와이섬)에 한인촌을 형성해 생활했다. 1913년 하와이에 입도(入島)한 이승만은 한인들을 위해 학교, 교회, 양로원을 짓고 한인단체를 이끌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 ▲ 알리올라니 초등학교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한인여학원과 한인기독교학원을 운영했던 장소다ⓒ윤희성 기자
    ▲ 알리올라니 초등학교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이 한인여학원과 한인기독교학원을 운영했던 장소다ⓒ윤희성 기자



    1915년 이승만은 한인여학원을 설립했다. 1914년 하와이 한인들의 삶을 둘러본 이승만은 소녀들이 갈 학교가 없다는 것에 아쉬움을 느꼈다. 소녀 중 상당수가 학교에 가지 못하거나, 중국인 또는 하와이 본토인에게 팔려 시집을 가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사실을 안 이승만은 이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고 여학생 학교를 직접 만들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직접 부모들을 만나 교육의 필요성을 설득했다. 여학생에게 공부를 시킨다는 것은 당시 혁신적인 사고였다. 집요한 이승만의 설득에 결국 45명의 소녀를 중심으로 한인여학원이 설립됐다. 

    1918년 한인여학원은 남학생들도 받기 시작했다. 남녀공학이 된 한인여학원은 이름을 한인기독학원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기독교인인 이승만은 신앙을 바탕으로 한인의 주체성과 리더십을 가르쳤다. 80~90명으로 학생수도 상당했다. 140명까지 늘어난 한인기독학원은 당시 현지 언론은 '한인들의 교육열'을 극찬하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한인기독학원은 현재도 알리올라니(ALI'IOLANI) 초등학교로 남아있다. 9년째 알리올라니 초등학교를 이끄는 랜 미야모토(LEN MIYAMOTO)교장도 이승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랜 교장은 이승만이 교장으로 일하던 당시 사진을 꺼내며 학교의 역사에 대해 학생들과 교사들에게 자주 설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 ▲ 알리올라니 초등학교 교장 랜 미야모토씨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사진을 꺼내 보였다ⓒ윤희성 기자
    ▲ 알리올라니 초등학교 교장 랜 미야모토씨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사진을 꺼내 보였다ⓒ윤희성 기자

    한인기독학원은 1922년 알리올라니 캠퍼스를 떠나 인근에 칼리히(KALIHI) 지역의 한 언덕에 새 교실과 기숙사를 지어 학교를 옮겼다. 학생수가 많아져 확장 이전한 것. 1923년 완공한 칼리히 캠퍼스는 1947년 폐교될때까지 200~3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칼리히 캠퍼스 부지는 1955년 팔렸다. 이승만은 이 부지 매각 대금인 15만달러를 인천에 공과대학을 설립하는 자금으로 투자했다.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따서 '인하'라고 이름 지었고 이게 오늘의 인하대학교다. 

  • ▲ 하와이에 있는 인하공원은 인천과 하와이의 인연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소다ⓒ윤희성 기자
    ▲ 하와이에 있는 인하공원은 인천과 하와이의 인연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소다ⓒ윤희성 기자

    2003년 인천과 하와이는 자매결연을 맺었고 지난해에는 인하대학교에서 하와이에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이 공원에서는 하와이 교민들과 인하대학교 학생들이 매년 행사를 가지는 명소가 됐다. 이승만이 25년간 하와이에 살면서 가장 주력한 사업은 교육사업이었다. 독립운동의 하나로 시작된 교육사업은 언젠가 독립이 되면 나라를 이끌 인재를 준비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뜻이었다. 

  • ▲ 하와이에 있는 인하공원은 인천과 하와이의 인연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소다ⓒ윤희성 기자



    하와이 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마치며…

    기자는 지난달 23일부터 30일까지 하와이 현지를 방문했다. 이승만 건국대통령을 비롯해 한인들의 독립운동 사적지를 돌아보며 이승만의 선견지명을 느낄 수 있었다. 대한제국이 망하고 국가를 잃은 한인들은 일본인으로 살아가거나 만주와 상해 등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을 펼쳤다. 

    하와이에 정착한 이승만은 단순히 무장투쟁이 아닌 장기적인 비전을 보고 독립과 건국을 준비했다. 만인이 평등한 미국의 건국이념에 깊이 연관돼 있는 기독교 사상을 접목시켜 기독교 국가를 만들겠다는 포부는 그를 하와이에서 25년간 교육사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상놈과 양반이 있는 신부제 사회의 철폐를 부르짓다 한성감옥에 수감돼 6년간 사형수로 살았던 청년 이승만의 불타는 개혁의지는 하와이에서도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 ▲ ⓒ윤희성 기자
    ▲ ⓒ윤희성 기자



    이승만이 쓴 '일본내막기(Japan Inside Out)'는 1941년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PEARL HARBOR)을 기습공격할 것이라고 예상했고 책이 나온 뒤 6개월 후 실제로 일본은 미국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했다. 이 공격은 미국이 받은 최초이자 마지막 공격이었다. 미국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고 일본은 항복을 선언했다. 일본의 패망으로 한반도는 독립을 맞았다. 그리고 이승만은 한반도에 자유가 숨쉬는 대한민국을 건국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태어나 자라면서 기자는 단 한 번도 하와이가 이런 역사적 장소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건국과정은 물론 독립운동의 역사도 몰랐던 무식한 기자는 하와이에서 마주친 역사의 현장에서 고개를 숙이고 반성을 해야 했다. 부족한 기자에게 하와이 출장의 기회를 준 뉴데일리에 고마웠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역사적 현장을 발굴하고 탐방단을 꾸린 (사)건국이념보급회(회장 인보길, 사무총장 김효선)에게도 감사했다. 학생들의 경비를 지원해준 국가보훈처와 하와이라는 휴양지에 역사탐방을 떠나겠다고 나선 18명의 대학생들에게도 감사함을 느낀다. 

    [서울=윤희성 기자 ndy@new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