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朴正熙 탄신 96주년 기념 강연 원고

    세계사적 관점에서 본 박정희:
    이승만과 함께 20세기의 대표적 지도자 
  • 趙甲濟  

    박정희 대통령은
    회고록 쓰는 정치인을 경멸하였다.
     그는 全國을 시찰하면서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애"
    라고 말하곤 하였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박정희의 성적표이고
    회고록이고 기념관인 셈이다. 
      
    "그는 알렉산더 대왕과 같은
    호쾌한 영웅도 아니고
    나폴레옹과 같은
    電光石火(전광석화)의 천재도 아니었다.
    부끄럼 타는 영웅이고
    눈물이 많은 超人,
    그리고 한 소박한 서민이었다.
    그는 한국인의 애환을 느낄 줄 알고
    서민의 숨결을 읽을 줄 안 土種(토종) 한국인이었다.

    민족의 恨(한)을 자신의 에너지로 승화시켜
    富國强兵에 성공,
    민주국가와 복지국가, 자유통일로 가는 길을 연
    교사, 군인, 혁명가, 그리고 위대한 CEO였다.

    비장하고도 장엄한 62년 생애였다.
    춥고 배고프고 억울하고 병든 사람들을
    그만큼 사랑한 사람은 달리 없었다."
        
       李光耀가 꼽은 아시아의 3大 지도자
       
    1979년 10월 訪韓한 싱가포르 李光耀 수상은
    발전상을 보고는 라이벌 의식을 갖는 것 같았다고
    당시 그를 안내하였던
    金聖鎭 당시 문공부 장관이 말한 적이 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대통령은
    "응. 지금 싱가포르 하고 있는 걸 보면 잘 하고 있지.
    잘 하고 있지만 거 뭐 조막만한 거 가지고
    그것도 못하면 어떻게 해?"하며 싱긋 웃었다.

    1979년 10월19일 청와대에서 환영만찬이 열렸다.
    李光耀는 朴대통령에게 이런 찬사를 보냈다. 

    "어떤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관심과 정력을
    언론과 여론조사로부터
    호의적인 평가를 받기 위해 소모합니다.

    한편 다른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정력을
    오직 일하는 데만 집중시키고
    평가는 역사의 심판에 맡깁니다.

    대통령 각하,
    만약 각하께서 눈앞의 현실에만 집착하는 분이셨더라면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런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金 장관은
    1991년에 駐(주)싱가포르 대사로 임명받아
    李光耀와 재회했다.

    1994년 1월 19일, 대우그룹 부회장으로 있던 그는
    月刊朝鮮을 위해 李 前수상과 인터뷰를 한 적도 있었다.
    그때 이런 질문을 던졌다. 

    "만약 아시아에서 귀하를 제외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세 사람만 든다면 누구를 꼽겠습니까?"

    "먼저 鄧小平(등소평)을 꼽겠습니다.
    그 노인은 정말 어려운 시대에 험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그는 중국이 막다른 골목에 처해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만약 등소평이 모택동 이후에 정권을 잡지 못했더라면
    중국은 소련처럼 붕괴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누구를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본의 요시다 수상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그는 한국전쟁과 냉전이 시작되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일본이 미국 편에 확실히 서도록 하였습니다."

    "이제 한 사람 남았습니다."
    "글쎄요. 세 번째 사람을 거론하게 되면
    한국의 국내 정치에 영향을 끼치게 될 것 같아서…."

    당시 金泳三 정부는
    문민정부라는 말을 앞세우면서
    前 정권을 격하하고 있었다. 

      
   1961년, 1972년, 1979년의 한국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중 87위로 最下位圈이었다. 

1위는 2926 달러의 미국,
지금은 한국과 비슷해진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은 당시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남미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필자의 가족은
이 무렵 파라과이로 이민을 가기 위한 수속을 밟았는데
다행히 잘 되지 않아 모두 한국인으로 살고 있다.

나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나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그 뒤 52년간
한국이 얼마나 빨리 달리고
높게 뛰었는지는 설명이 필요 없다.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2589 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2800 달러로서 세계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 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10배,
한국은 약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中,日,獨
다음에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기준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
維新期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70년대 말에
우리는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던 것이다. 
   
   고도성장과 균형발전을 겸했다
  
세계은행이 1965-89년 사이
세계 40개 주요국 평균 경제 성장률과
소득분배를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은 경제 성장률에서 세계 1위,
소득분배의 평등성에서도
아주 양호한 국가로 나타났다.

소득 분배의 평등성을 재는 기준은
소득 上位(상위) 20%가
소득 下位 20%의 몇 배를 차지하느냐를 보는 것이다.

한국은 약 7배,
브라질은 약 26배,
말레이시아는 약 16배,
수단은 약 12배,
멕시코는 약 20배,
태국은 약 9배,
필리핀은 약 11배였다.

일본과 대만은 약 5배,
싱가포르는 약 9배,
 홍콩은 약 9.5배. 

이 기간 중 1인당 소득성장률이 年 4% 이상이고,
소득 분배 지수가 10
(즉, 上位 20%의 소득이 下位 20%의 소득의 10배) 이내인
우량국가는
東아시아의 6개국-한국, 대만, 싱가포르, 홍콩, 일본, 태국뿐이었다.

이는 군사정권 때
한국사회의 貧富(빈부) 차이가 더 커졌다는
俗說(속설)을 무효화 시키는 통계이다.

군사정권 때 한국은
전체적인 國富(국부)와 개인소득도
세계에서 가장 크게 늘었을 뿐 아니라
소득분배도 가장 공평하게 되었다. 

南美의 군부는
칠레를 빼고는 경제성장이나 소득 재분배보다는
기득권층의 蓄財(축재)를 위해 일했지만
한국의 군부 엘리트는 특권층보다는
국민 전체를 위해 경제정책을 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1965∼80년 사이,
즉 朴正熙 대통령 시절과 거의 겹치는 16년간
한국의 연(年) 평균 GDP(국내총생산) 증가율은
9·5%로서 세계 9위였다.

1980∼90년의 11년간,
즉 全斗煥―盧泰愚 대통령 시절
한국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10.1%로서 세계 1위였다.

군인출신 대통령이 國政을 운영하던 30년간
한국은 GNP 규모에서 세계 37위(1960년)로부터 15위,
1인당 GNP에선 83위→30위,
무역부문에선 세계 51→11위로 도약하였다.

한국은 人權(인권)문제가
국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
아시아의 두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下位 40%의 성장률이 전체 평균과 비슷 
   
1978년 10월에 한국개발연구권은
1965년과 1976년의 家計(가계)소득 분포를 조사하여 비교했다.

1965년 全國 家計 소득 분포에서
下位 4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19%였다.
上位 20%가 차지하는 소득은 전체 소득의 42.3%였다.

11년 뒤인 1976년
下位 4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17%이고
상위 20%가 차지한 소득비중은 약 45%였다.

즉 경제개발 시기 고도성장으로
貧富격차가 더 심해졌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11년 사이 다소 계층 간 격차가 벌어졌지만
세계적인 비교에 따르면
1976년의 한국은 소득 격차가 가장 작은 나라로 나타났다.

세계은행의 다른 조사에 따르면
1964-1970년 사이
한국의 평균 GNP 성장률은 연간 9.5%였다.
이 기간 소득 下位 40%의 소득증가율도 9.5%였다.

이는 경제성장의 혜택이 특수층에만 돌아가지 않았고
저소득층에게도 똑 같이 돌아갔음을 보여준 것이다.

朴正熙 대통령은 고도성장을 추진하면서도
소득격차가 크게 벌어지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북한공산주의자들이
계급혁명론으로 빈곤층을 공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국의 전통적인 유교 가치관 또한
평등지향성이 강하여
南美式의 빈익빈부익부를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경제개발전략은
고도성장과 균형분배를 함께 이룬 것이다. 
   
   Liberal Authoritarian-자유지향적 권위주의 지도자
   
富者나라가 아니면 民主국가가 될 수 없다는 증거가 있다.
정치학자 아담 프저워스키와 페르난도 리몽기가 만든 통계이다.

1950-1990년 사이
1인당 국민소득 1500달러(현재 가치 기준) 이하인 나라가
민주주의 체제를 시험했을 경우
그 평균수명은 8년밖에 되지 않았다.

1500~3000 달러 사이에선 평균수명이 18년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6000달러 이상인 민주국가가
전복되어 독재로 돌아갈 가능성은 500분의 1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9000달러 이상인 32개 민주국가는
단 한 나라도 체제가 붕괴된 적이 없다.
반면, 그 이하 69개 국가 중 39개가
민주체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약56%의 사망률이었다.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도 되지 않았던
李承晩 정부 시절에
왜 완벽한 민주주의를 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은
(李대통령은 불완전한 민주주의는 했다),
세종대왕에게 왜 직선제로 왕이 되지 않았느냐고
욕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국을 부자나라로 만들고
민주주의를 실천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든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규정하는 것도 무리다.

양식 있는 학자들은
박정희나 이승만을 독재자라 부르지 않는다.
국가제도를 정비하고 경제를 건설하는 데 주력함으로써
자유민주주의가 기능할 수 있도록 준비하였다는 점에서
‘자유 지향적 권위주의적 지도자’,
즉 ‘Liberal Authoritarian’이라고 부르는 이들이 많다.

이승만은 6·25 전쟁 중에도
국회를 해산하지도 선거를 중단하지도 언론을 검열하지도 않았다.
민주주의를 시작한 지 3년째인 나라가
이 정도 하였다면 잘 한 것 아닌가?

朴正熙는 5·16과 10월 유신으로
두 차례 憲政질서를 중단시켰지만
사후에 선거를 통하여
그 조치에 대한 追認(추인)을 받았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朴正熙를 싫어하다가 존경하게 된 카터 선거 참모의 고백
   
朴正熙 대통령을 독재자라고 부르는 것은 과학적이지 않다.
李승만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 건국의 성공모델을 만든 분이고
朴대통령은 제도정비와 경제발전을 통해서
민주주의 국가가 작동할 수 있는 물질적 토대를 만든 분이다.

민주주의는 외양이고 그 속은 안전, 복지, 자유이다.
朴대통령은 안보를 튼튼히 하고 경제를 발전시켜
안전과 복지를 확보했으므로
3분의 2 민주주의를 이룬 것이다.

안전과 복지가 확보되면 인간은 자유를 희구하게 된다.
朴정권에 대항해서 그 자유를 요구했던
소위 민주화 세력은 3분의 1 민주주의를 한 셈이다.

朴대통령의 민주주의에 대한 기여에 대해서는
외국인의 평가를 나의 견해로 삼아 대신 소개한다.

윌리엄 H. 오버홀트가 1990년대에 쓴
‘중국의 부상(浮上)’(The Rise of China. Norton. 1993)이란 책은
한때 카터 선거캠프의 참모였고
反韓的(반한적)인 생각에 빠져 있었던 저자가
朴正熙의 한국을 재평가하면서
開途國(개도국)의 근대화와
중국의 변화를 바라보는 눈이 바뀌게 된 과정을
흥미롭게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씨는
중국의 근대화 전략이
朴正熙 모델을 따르고 있다고 하면서
자신이 왜 朴正熙식 개발전략의 정당성에
설득 당하게 되었나를 고백한다.

이 책 집필 당시 홍콩의 미국 금융회사에서
국제정세 분석가로 일하고 있던 그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고 마틴 루터 킹 목사를 추종하는
民權(민권)운동가로 활약했고
에즈라 보겔 교수의 권유를 받아
하버드에서 중국문화대혁명을 연구하기도 했다.

그는 문화대혁명을 연구하면 할수록
엄청난 규모의 학살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이 문제를 하버드에서 제기해 보아도
毛澤東(모택동) 신봉자들이
강단의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비판만 받았다고 했다.

예일 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허드슨연구소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소장은 유명한 미래학자 허먼 칸이었다.

그는 한국의 근대화 정책을 높게 평가하고 있어
젊은 오버홀트씨와는 자주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오버홀트씨는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에 한국을 방문하고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농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이때의 충격을 그는 이 책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가장 악독한 독재자로 알고 있었던 朴正熙 정권이
농민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여
아주 효율적으로 국가를 근대화하고 있는 모습은,
그가 필리핀에서 목격한
한심한 미국식 근대화와는 너무나 달랐다.

이 경험이 계기가 되어
그는 아시아의 권위주의적 정부를 바라보는
미국학자, 정치인, 기자들의
위선적이고 도식적인 관점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1976년에 그는 카터 후보의 선거참모로 들어가
對아시아정책 그룹을 이끌게 되었다.

한국을 방문한 뒤 생각이 달라진 그에게 있어서는
서구식 우월의식으로 꽉 찬
카터 진영의 참모들이 철없는 사람들로 비쳐졌다.
그때 카터 진영에서는 駐韓미군의 철수를 공약함으로써
독재정권을 응징하는 인권외교의 챔피언으로서
카터의 이미지를 조작하려고 했는데
이게 오버홀터에게는 바보짓으로 보였다.

그는 미국식 인권개념을 한국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역사와 문화의 발전단계 차이를 무시한
미국식 오만이라고 보았다.

이 경험 때문에
그는 1989년6월의 천안문 사건 이후
중국의 인권문제와 중국에 대한 最惠國(최혜국) 대우를
연계시키려는 미국의 정책을 비판적으로 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서구 이념의 사기성은 정치발전은
항상 경제발전보다 선행(先行)하거나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아시아의 권위주의 지도자들의 사기성은
정치적 자유화 없이도 경제적 자유화가
무기한 계속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세계의 현대사를 아무리 뒤져보아도
후진국가가 민주화를 먼저 하고
나중에 경제발전을 하는 식으로
현대적 시장경제로의 성공적인 전환을
이룩한 나라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실패한 모델은
서구의 학자들과 언론으로부터 칭찬을 받아왔고
서구의 원조를 받아왔다.

이런 원조는 정문으로 들어가자마자
뒷문으로 빠져나가 버려 자본의 도피만 발생할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태평양 연안 아시아 국가들의 경우에는
먼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서 근대적인 제도를 만들고
경제를 자유화하며 교육받은 중산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들이 정치적 변화를 원하든 원치 않든
자유와 민주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이 책에서 오버홀트는
후진국이 서구식 민주주의를 하려고 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세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후진국엔 인기주의적 선동으로부터
國益(국익)을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하고 현대화된 국가기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후진국엔 농지개혁이나 국영기업의 私有化(사유화) 같은
개혁을 저지하는 기득권 세력은 강하나
이를 극복하고 추진할 국가주의 세력은 약하다.

셋째, 후진국엔 분별력을 갖춘 교육 받은 중산층이 약하다.

오버홀트는, 이 세 가지를 합쳐서
후진국에서 민주주의의 정착을 불가능하게 하는 문제를
'인기주의의 장벽'(Populist Barrier)라고 이름지었다.
오버홀트는
朴正熙가 바로 이 포퓰리즘을 꺾고
민주주의로 가는 제도와 중산층과 국가적 개혁을
이룩한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집권하자말자 군사비를 삭감했다.
북한의 위협이 있음에도.
이런 일은 민간 정치인들이 절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朴대통령은 敵對(적대)관계에 있던 일본과 수교했다.
이것도 유권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사회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외국인 혐오증이 심한 군중심리를 누르고
외자유치와 무역을 장려했다.

그는 수출을 지원하기 위하여 환율을 인하했다.
이는 南美의 정부라면 할 수 없는 조치이다.
이 나라들의 지배층은 과대평가된 환율을 이용하여
사치품을 수입하고 외국에서 부동산을 사재기하기 때문에.

朴대통령은 외국인의 투자를 환영하고
원자재와 기계류에 대한 관세를 내려
한국기업의 경쟁력을 높였다.

이런 개혁은 사회주의적 성향의 지식인과
과보호에 안주하는 기업인으로부터
동시반발을 살 수 있는 일이라
민주주의를 채용하는 開途國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다. 

朴正熙는 현대식 국가기구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한국군은 미군보다도 더 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그는 무능하고 부패한 장관과 은행가들을 추방하고
연구소를 만들어 미국에서 공부한 학자들을 초빙했다.

그는 이들이 고위 관료가 되도록 하여
세계에서 가장 능률적이고 날씬한 정부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

이에 반해 미국식 민주화를 추진한
필리핀의 아퀴노 대통령은
지지자들의 청탁을 받아 공무원들을 임명하다가 보니
정부는 커지고 효율성은 떨어졌으며
유능한 장관들은 집단이기주의의 희생물이 되었다.
朴대통령의 개혁이
그가 원하지 않았던 민주화의 조건들을 만들어놓았다.>

1970년대에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감동적인 박정희식 근대화를
현장에서 목격한 오버홀트는
동아시아식 개발방식의 타당성을 확인하게 되었고
이 새로운 시각으로써
고르바초프식 서구형 개혁 개방의 실패도
예언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 식 개혁은
정치적 자유화와 경제적 자유화를 동시에 추진하는 것이었고
이것은 서구가 좋아하고 부추긴 방법이기도 했다.

오버홀터씨는
한국의 성공사례와 이를 모방한
鄧小平(등소평)의 중국 근대화 성공사례에서
세계사의 발전을 평가할 수 있는 눈을 떴다는 얘기이다. 
   
달력에 넣을 세계 12명의 지도자:
李承晩, 朴正熙, 레이건, 대처, 드골, 아데나워,
케말 파샤, 등소평, 네루, 요시다, 만델라, , 트루먼. 
   
몇 년 전 점심 식사 시간에 재미있는 토론이 있었다.
한 기업인이 리더십의 모범 사례가 될 만한
세계적 인물들을 12명 골라
그들의 사진을 싣는 달력을 만들어 나눠줄 계획이라고 하였다.

예술가, 군인에 이어
내년 달력은 정치인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20, 21세기에 한정하여
세계사의 발전에 기여한 12명의 지도자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
 同席한 4명 사이에 이야기가 오고갔다. 정리하면 이렇다. 
   
1. 선정 기준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共同善에 기여한 인물이어야 한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히틀러, 레닌, 스탈린, 체 게바라, 毛澤東 같은
독재자나 혁명가들은 탈락된다.
이들이 역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지만
긍정적인 면보다 부정적인 면이 많기 때문이다. 

2. 두 번째 기준으론
그 지도자가 통치했던 나라가
큰 나라이거나 선진국이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3. 세 번째 기준으로는
그 지도자가 물러나거나 죽은 뒤
그의 정치적 유산(이념, 제도, 노선 등)이
계승되어 그로 해서 나라가 발전했다는
평을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

유고슬라비아를
공산국가중 가장 먼저 개방시켰고,
스탈린과 맞서 독자노선을 걸었던
티토는 이 기준에 걸려 탈락했다.

그의 死後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해체되고
內戰과 대학살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티토의 노선이
후계자들에 의하여 제대로 계승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도자에 대한 평가는, 후계자의 成敗에 의하여
큰 영향을 받는다. 

4. 네 번째 기준으론
建國, 獨立, 中興의 지도자들을
높게 평가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결론적으로 결과물을 먼저 보고
그 결과물을 만든 인물을 선정한다는 것이다.

정치에선 動機보단 결과이다.
문학이나 사회운동에선 動機가 중요할지 모르나
정치는 어디까지나 결과로 평가된다.
이런 기준에 따라 서로 추천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먼저 프랭클린 루스벨트.
그는 4選을 하면서 대공황을 극복하고,
미국의 2차 大戰 승리를 주도했다.

해리 트루먼.
그는 東西 냉전에서
자유세계가 이길 수 있는 기초를 놓았고
전략의 기본 방향을 잘 잡았다.

원폭 투하, NATO 창설, 마셜플랜 추진,
트루먼 닥트린, 한국전 참전 등
큼직한 결단을 내린 사람이다.

로널드 레이건.
그는 소련 공산제국을 해체로 몰고간 인물이다.
총 한 방 안 쏘고 악의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영국에선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2차 대전 초기에
홀로 히틀러의 나치독일과 맞서
자유세계의 보루를 지켜냈던 윈스턴 처칠,
그리고 신자유주의 개혁을 성공시킨
마가렛 대처 여사 중 한 사람을 뽑으면 된다. 

프랑스에선?
두 말할 것도 없이 드골 대통령이다.
독일군의 전격작전으로
6주 만에 프랑스가 항복하자
망명정부를 세워 저항을 계속했고,
그 덕분에 2차 대전이 끝날 땐
프랑스가 戰勝國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는 10년간 은퇴생활을 하다가
조국이 위기에 처하여 그를 다시 불러내자
내각제를 대통령 중심제로 개헌하여
5공화국을 10년간 통치하면서
고질적인 정치불안을 제도적으로 종식시켰다.
오늘의 프랑스는 드골이 중흥시킨 나라이다. 

독일에선?
戰後 독일의 부흥을 주도했던 아데나워,
또는 독일통일의 기관차 콜 수상 중 한 명이면 오케이!

일본에선?
戰後 일본을 親서방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시킨
일본 중흥의 기수 요시다 시게루 총리
이외의 인물이 있을 수 없다. 

중국에선?
모택동은 魔王이니 젖혀놓는다.
그렇다면 거대한 개혁 개방의 흐름을 만든
鄧小平일 수밖에 없다.

세계역사상 최대 규모의 급성장이 중국에서 일어나고 있다.
사회주의적 정치와 자본주의적 경제를 혼합한
鄧小平 노선의 승리이다. 

머지않아 세계최대 인구국이 될 인도는?
간디는 정치 지도자로 볼 수 없으므로 제외한다면
인도 독립과 建國의 지도자 네루이다.

가난하고 복잡한 인도를
그래도 민주주의가 기능하는 나라로
만들어 끌고 간 공로는 대단하다.

인도는 인디라 간디 여사 암살, 그의 아들 암살,
종교분쟁 등등 소란스럽기는 해도 민주주의식으로 굴러간다.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이고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큰 민주주의 국가이다.

동남아에선?
월남의 지도자 胡志明을 거론한 이도 있었으나
사회주의 혁명가였다는 점에서 失格되었다.
더구나 통일된 월남은 지금 사회주의 노선을 수정하여
자본주의를 향해서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나 수하르토를 꼽을 순 없다.
부패한 독재자였고 지금 인도네시아의 상황이 모범적이지 않다.

南美에선?
달력에 넣어 귀감으로 삼을 만한 인물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때 세계 5대 富國 중 하나였던 아르헨티나를
포퓰리즘으로 망친 페론을 넣을 수도 없다.
칠레가 가장 잘 나가는 나라이지만
수천 명을 학살한 피노체트는 곤란하다.
공산 혁명가 카스트로나
선동가 차베스를 모범으로 삼을 순 없다.
브라질 대통령 룰라가 앞으로 잘 하면 몰라도. 

아프리카에선?
한 사람이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을 언급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어
중동의 불씨 하나를 껐다.
그 代價는 암살이었다.

그런 점에선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지금 이집트의 상황이 말이 아니다.
사다트를 이은 무바라크가 30년을 지배하였지만,
이집트는 민주화도, 산업화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독재를 오래 했으면 경제라도 발전시켜야 할 것 아닌가?

남아프리카의 만델라가 있다.
남아프리카는 흑인 통치로 넘어간 후
살인사건이 너무 많이 난다. 이 부분에서 세계1등이다.

그럼에도 만델라의 도덕적 지도력이
백인 지배를 큰 유혈사태 없이 끝장 낸 점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할 것이다. 

이스라엘?
단연 건국의 아버지 밴 구리온이다.
문제는 아랍 세력과 저렇게 싸우는
이스라엘 지도자를 영원히 기려야 할 인물로
내세울 수 있는가이다. 

대만?
본토에서 쫓겨나 이 섬으로 건너온
장개석과 그 후계자들이
모범적인 산업화, 민주화를 이룬 일은 높게 평가할 만하다.
그래도 모택동에게 져서 본토를 빼앗긴 인물을
師表로 내 세울 순 없다. 

이슬람圈의 대표 선수는 누구인가.
터키공화국을 거의 혼자서 세운
케말 파샤를 선정하지 않을 수 없다.

1차 세계 대전 때 독일편을 들었다가 패전국이 된
오스만 터키 제국은 해체되고 그리스의 침공을 받았다.
이때 케말 파샤 장군이 군대를 모으고
그리스를 밀어내고 오늘의 터키를 세웠다.

그는 이슬람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성공한 개혁을 했다.
政敎분리, 여성 참정권 허용, 문자개혁 등.
지금의 터키 군부는
이런 케말 파샤의 노선을 수호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
유럽식 선진민주국가는 아니지만
오늘의 터키는
이슬람 원리주의의 영향력을 제어하면서
민주주의를 가꾸어 나가는, 나름대로 열심히 사는 나라이다.

한국에서도 한 사람을 뽑아야 하는가?
물론이다.
한국의 국력이 세계 10위권이므로
당연히 대표인물을 낼 수 있는 자격이 있다.
20세기에 국민국가로 출범한 여러 나라들 중
한국이 가장 성공적이었다는 점에선 이론이 없다.

그렇다면 이 한국의 기적적 발전을 만든 지도자가
12명 안에 당연히 들어가야 한다.
더구나 한국의 발전모델은 후진국과 開途國의 교과서이다.
그렇다면 누구인가?
독립과 건국의 이승만인가,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인가?
두 사람은 거의 同級이다. 

싱가포르의 李光耀는?
한 분이 추천했다.
토론을 해보니 탈락으로 결론이 났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싱가포르의 규모가 작다.
민주화도 안 되어 있다.
한국처럼 후진국과 개도국의 모델이 되기 어렵다.
보편성이 떨어진다. 

마지막으로 러시아를 누가 대표해야 할 것 아닌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
레닌, 스탈린은 자격 박탈이니 고르바초프가 남았다.
그는 소련을 개혁하는 데 실패한 지도자이다.
그러나 그의 실패가 惡의 제국을 무너뜨렸으니
인류가 감사해야 할 사람이다.
그렇다고 달력에 넣어
지도력의 모범으로 기려야 할 사람은 아니지 않는가?
무엇보다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니 말이다.
고르바초프에게 상을 줄 사람은 하나님뿐일 것이다. 

내가 멋대로 달력에 넣을
세계적 지도자 12명을 결정한다면 이렇다.

李承晩, 레이건, 대처, 드골, 아데나워, 케말 파샤,
등소평, 네루, 요시다, 만델라.
두 명이 모자란다.
아무래도 이 달력을 보는 사람은 한국인이다.
한 명을 더한다. 朴正熙!
그래도 한 명이 모자란다.
미국에 한 자리를 더 주기로 한다.
한국을 두 번 살린 트루먼!
내가 너무 情에 약한 것일까? 
   
   민족사의 가장 큰 인물
   
우리 민족사의 가장 큰 인물은 누구일까?
크다는 의미는 세상을 크게 본다는 뜻이다.
'큰 인물'은 세계를 머리에 넣고 정치를 한 사람일 것이다.

나는, 뛰어난 국제 감각으로
나라의 活路를 열고 민족사의 흐름을 바꾼
세 사람을 '큰 사람'으로 생각한다. 
   
1. 金春秋(태종무열왕):
재상 시절에 목숨을 건 통일외교를 했다.
일본, 고구려, 唐을 다니면서 동맹을 모색한 끝에
당시 세계最大강국이던 唐과 손잡았다.
이 羅唐연합군이 그의 在位 때 三國통일의 첫 관문인
百濟를 멸망시켰다. 

2. 李承晩(대한민국 건국 대통령):
기독교 정신에 기초한 무서운 自主정신으로
민족사 최초의 국민국가인 대한민국을
자유의 가치관 위에 세우고
韓美동맹을 구축하여 번영의 생명줄로 만들었다. 

3. 朴正熙(근대화 대통령):
국가제도를 효율적으로 운영한
시스템 관리의 鬼才로서
수출立國이란 對外개방정책을 통하여
놀라운 스케일의 富國强兵을 이룩함으로써
한국을 先進(선진)강대국 문턱까지 끌어올렸다. 
   
박정희 대통령은 회고록 쓰는 정치인을 경멸하였다.
그는 全國을 시찰하면서
"내가 그린 그림을 보는 것 같애"라고 말하곤 하였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박정희의 성적표이고 회고록이고 기념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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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도층 1000명의 한심한 인물觀(2007년) 
민족사의 2대 쾌거인 대한민국 건국과
三國통일의 원훈들을 외면한 조사결과. 
   
주간지 시사저널이 매년 발표하는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
조사 결과가 최근에 공개되었다.

이 조사엔 ‘한국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이란 항목이 있다.
역사적 인물까지 포함한 조사이다. 

이 조사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니고
각계 전문가를 대상으로 했다.

즉, 행정관료,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기업인,
금융인, 사회단체 활동가, 문화 예술인, 종교인에서
각100명씩 1000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이다.
따라서 한국의 지도층이
어떤 인물관과 역사관을 가졌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가장 자랑스런 인물 1위는
세종대왕으로서 28.2%의 지지를 받았다.

2위가 이순신 24.6%, 3위가 김구 24.3%,
박정희가 11.4%로서 4위였다.

이어서 반기문, 김대중, 광개토대왕, 박지성, 안창호, 정약용 順이다.
10위권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몇 사람이 보이지 않는다.

민족사의 2대 쾌거인 대한민국 건국과 신라의 삼국통일 主役들이다.
李承晩 대통령은 박찬호, 최경주보다 한참 뒤인 27등이다.
신라 삼국통일의 3대 主役인 金庾信, 태종무열왕(김춘추),
文武王은 아예 이름이 없다.

조선조를 개국한 이성계는 43위이고 을지문덕, 강감찬은 58위이다.
박지원, 유시민은 들어었는데 민족통일국가의 원훈들은 다 빠졌다. 
   
한국의 지도층은
자신들의 實存을 가능하게 만든
대한민국 建國과 신라의 통일을 무시하거나
어느 면에선 敵對的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7위인데
신라통일대왕인 文武王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요사이 한국인들의 정신을 좀 먹고 있는
고구려 美化와 신라 죽이기의 흐름이
사회 지도층에도 스며 들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역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
역사를 敗者의 입장에서 보는 이들,
역사의 건설자를 낮게 보는
二流인물들이 한국을 대표한다고 한다.

민족혼은 이들 사이에 있지 않고
소수의 知性人과 건강한 생활인들 속에서 살아 숨쉴 것이다.
이승만과 김유신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대로 대한민국 조종실에 들어가선 안된다.
역사관, 국가관, 인생관, 인물관은 밀접하게 연관된다.
인물관을 보면 그 사람의 국가관을 알 수 있다.
그 사람의 수준을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을 기리는가를 보면 그 국가의 품격을 알 수 있다. 
   
   내가 한국의 10대 인물을 순위를 매긴다면 이렇다. 
   1위: 金庾信 태종무열왕 文武王(공동)
   2위: 李承晩 朴正熙 세종대왕(공동)
   3위: 李舜臣 
   4위: 金方慶
   5위: 李秉喆 
   6위: 元曉
   7위: 王建
   8위: 李成桂
   9위: 柳成龍
   10위: 광개토대왕 근초고왕(공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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