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간토학살 90년> ①"일본군대가 학살 주도"
    "기관총, 죽창으로 임신한 여자까지"…900여명 목격담 담은 `증언집' 나와



    (도쿄=연합뉴스)  "10명씩 조선인을 묶어 세워 군대가 기관총으로 쏴 죽였다. 아직 죽지않은 사람은 선로 위에 늘어놓고 석유를 부어 태웠다"

    "(9월) 3일 낮이었다. 다리 아래에 조선인 몇명을 묶어 끌고 와서 자경단 사람들이 죽였다. 너무 잔인했다. 일본도로 베고 죽창으로 찌르거나 해서 죽였다. 임신해서 배가 크게 부른 여자도 찔러죽였다. 내가 본 것으로는 30여명이 이렇게 죽었다"

    "역 근처에 큰 연못이 있었다. 조선인 7∼8명이 그곳으로 숨자 자경단 사람이 엽총을 가져와 쐈다. 조선인들이 (연못) 저쪽으로 가면 저쪽에서 쏘고, 이쪽으로 가면 이쪽에서 쏴서 죽였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인 1923년 9월1일 발생한 간토대지진때 도쿄 일원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조선인 학살이 어떻게 자행됐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당시 목격 증언 등이 세권의 증언자료집으로 정리됐다.

    ◇ 조선인 희생자 80여명의 인적사항도 발굴돼 = 6천명 이상으로 알려져온 조선인 사망자 숫자에 비해서는 턱없이 적지만 희생자 80여명의 인적사항도 발굴됐다.

    세권의 증언집은 일본 시민단체 `간토대지진때 학살된 조선인 유골을 발굴해 추도하는 모임'에 의해 당시의 학살 실태를 총망라하는 귀중한 증언기록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 모임의 니시자키 마사오(西崎雅夫.53)씨가 3년간 도쿄의 공립 도서관 거의 전부를 뒤져 당시 일기, 자서전, 향토자료 등에 나와 있는 조선인 학살 관련 증언 등을 찾아내 만들었다.

    A4 사이즈 약 260장 분량의 증언집에는 니시자키씨가 새로 발굴한 300여건의 증언 등 900여건의 목격 증언 등이 담겨있다. 대부분이 일본인이고 개중에는 학살에서 살아남은 조선인 등의 직접 증언도 포함돼 있다.

    "조선인 사체는 들것으로 운반한 것이 아니라 어시장에서 큰 생선을 옮기듯 남자 2명이 쇠갈고리로 발목을 찍어 경찰서까지 질질 끌고 갔다. 내 양쪽 발목의 상처가 그때 생긴 것이다. 한국에 귀국해서 보니 내 고향에서만 12명이 학살됐고 그 중 내 친척만 3명이 목숨을 잃었다"

    경남 거창군이 고향인 신창범(愼昌範)씨의 생전 증언이다. 신씨는 도쿄 아라카와(荒川) 제방에서 죽창, 일본도로 무장한 일본인 자경단에 쫓기다 기절한 후 경찰서에 안치된 사체더미에 묻혀있다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목격증언 가운데는 일본인 신문기자, 경찰 관계자의 증언도 있다.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이름 등 인적사항이 판명된 80여명의 조선인 희생자 명단과, 학살이 자행된 도쿄 각지의 동네와 장소 등을 일일이 표시한 `학살사건 지도'도 만들어졌다.

    일본 정부의 철저한 사실 은폐 등으로 당시 학살된 조선인은 유골 수습은커녕 이름조차 파악되지 않고 있는 상황하에서다.

    ◇ 일본 관헌이 유언비어 전파 선도 = 세권의 증언집은 당시 국가가, 일본의 관헌이 있지도 않은 유언비어 전파와 학살에 주체적으로, 선도적으로 관여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조선인들이 대거 습격한다는 상부 정보가 있어 밤 10시를 기해 전투를 개시한다는 중대 명령이 떨어졌다"(당시 도쿄의 한 근위연대 1중대 소속 병사)

    "조선인폭동에 주의할 것을 알리고 다니라는 부탁을 (도쿄) 경시청으로부터 받았다"(신문사 근무)

    "경찰이 확성기로 `방금 조선인 습격이 있었다'고 방송하고 다녔다" 등의 증언이 그것이다.

    군대가 조선인 학살에 압도적으로 많이 관여했다는 사실도 증언집을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일본의 보수 우익세력들이 교과서에서 군대와 경찰이 학살에 관여했다는 기술을 삭제하려는 것이 명백한 사실 왜곡이자 은폐임을 증언집은 잘 대변해주고 있다.

    증언집에는 일본 관헌의 조선인 학살·학대에 관한 목격 증언이 100여건 나와있다. 이 가운데 태반이 군대가 관여한 것이다.

    특히 군대의 조선인 학살은 간토대지진 발생 다음날인 9월2일부터 4일사이에 많이 이루어졌으며 기관총으로 학살했다는 증언이 적지않았다. 대지진 발생 직후부터 일본의 군대가 계엄령을 빌미로 신속하게 투입돼 조선인학살을 주도했다는 이야기다.

    니시자키씨는 "당시 일본군대가 계엄령하에 총, 총검, 기관총으로 무장한 데다 명령에 따라 치안유지, 구체적으로는 있지도 않은 `조선인폭동' 진압에 최우선으로 행동한 결과 군대가 많은 조선인 학살사건을 일으켰다"고 분석했다.

    그는 "이렇게 많은 사건을 저질렀음에도 조선인 학살죄로 처별된 군인·헌병·경찰관은 한명도 없고 학살된 사체 처리 등 학살 실태를 은폐한 점, 유언비어를 관헌 스스로가 확대한 점에 명백한 국가 책임이 있다"고 지적했다.

    ◇ 간토대지진 조선인 학살 = 1923년 9월1일 오전 11시58분 규모 7.9의 대지진이 도쿄 등 일본 간토(關東)지방을 강타, 10만5천명 이상(행방불명자 포함)이 사망했다.

    이 대지진의 혼란 상황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켰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넣고 다닌다'는 유언비어가 순식간에 퍼지면서 도쿄, 요코하마(橫浜), 지바(千葉), 가나가와(神奈川) 등 간토 일원에서 조선인들이 학살됐다.

    일본의 군대·경찰과, 유언비어를 믿은 민중들에 의해서였다. 주민들도 죽창, 일본도 등으로 무장한 자경단을 조직, 동네의 조선인들을 찾아내 학살했지만 희생된 조선인들의 유골은 행방조차 모르고 있는 상태다.

    당시 몇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됐는지는 일본 정부의 진상은폐로 정확히 드러난 것이 없다. 다만 대지진 발생 4개월후인 1923년 12월 5일자 상하이(上海) 독립신문에 실렸던 6천661명이 그나마 신뢰할만한 희생자 숫자로 통용돼 왔다.

    이 숫자는 그해 10월 조선인 유학생 등이 `재일본 간토지방 이재동포 위문반'이라는 이름으로 간토 일원의 학살 현장 등을 은밀히 조사, 살아남은 조선인들로부터 들은 이야기 등을 토대로 집계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 경찰의 미행과 당국의 은폐로 당시 조사가 충분히 이뤄지지 않은데다 희생자 집계가 일부 중복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정확한 희생자 숫자라고는 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일본내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희생자 숫자로 통상 `수천명'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연구자들은 조선인 학살의 배경으로 당시 일본정부가 `조선인 폭동'의 유언비어를 유포해 이를 군대를 출동시킬 수 있는 계엄령 발포의 빌미로 삼는 동시에, 간토 대지진에 대한 주민의 불만과 분노 등을 조선인에게 덮어씌운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 주민들 역시 3.1 독립운동의 여파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조선인의 복수가 언젠가 있을 것이라는 잠재된 우려 심리와 조선인에 대한 민족적 편견, 멸시감이 강한 상태에서 경찰 등 관헌이 유언비어를 유포시키자 순식간에 광기의 조선인 학살로 치달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