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전쟁 징비록 <자유를 위한 희생>

    <징비록>의 교훈

    이현표 /뉴데일리 논설위원,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

  •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이 남긴
    세계 전쟁문학사에 길이 남을 불후의 명저 이름이다.

    [징비]란 스스로 벌을 받아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 책은
    421년 전, 왜적의 침략으로 6년 반 동안 나라와 국민이 겪은 더없는 고통을,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고자
    양심적인 관리가 피눈물로 쓴 참회록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본이 여럿 있지만,
    이재호의 <징비록>(1960)은
    원문, 훌륭한 한글 번역, 그리고 주석이 어우러진 양서라고 할 수 있다. 


  • 상권 279쪽, 하권 746쪽의 방대한 분량 중,
    일반 독자로서는 <징비록>의 본문이자,
    전쟁이 일어난 배경과 전황을 기술한 상권(279쪽 중 원문과 주석을 빼면 100여 쪽 분량)만
    읽더라도 충분한 교훈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1969년,
    전문가들이 <징비록>을 국보로 지정한 이유가 따로 있겠지만,
    필자는 너무도 사실적인 내용,
    놀라울 정도로 논리적이고 연역법적인 기술방식,
    그리고 우리 민족의 가장 위대한 영웅 이순신 장군의 삶이 담겼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리고 <징비록>에는
    또 한 가지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할 중요한 대목이 있다.
    바로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빚어지는 민족의 비극이다.
    유성룡은
    왜적의 만행은 물론이고,
    명나라 지원병의 횡포를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래와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루는 명나라 장수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싸울 수 없다며
    자기네 사령관인 이여송에게 돌아가자고 보고했다.
    이여송은 나(유성룡), 호조판서 이성중, 경기감사 이정형을 불러 뜰아래 꿇어앉히고
    군법에 의해서 처리하겠다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나는 간곡히 사죄하면서,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을 비통해했다.”
       -198쪽


    “임금(선조)이 청파의 들까지 나와서
    이순신 장군이 머무는 고금도로  가는 명나라 장수 진린을 몸소 전송했다.
    나는 진린의 병사가 제멋대로 우리 수령을 두들겨 패서 욕보이며,
    심지어 찰방 이상규의 목을 노끈으로 매어
    얼굴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땅바닥에 끌고 다니길래
    통역을 시켜서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264쪽


    이여송과 맥아더?


    임진왜란 후 4세기를 훌쩍 넘은 한반도!
    남쪽에는 세계 10대 경제 강국 대한민국,
    북쪽에는 세계 최빈국 북한이
    휴전선을 경계로 분단되어 있다.

    그런데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국가에서 풍요롭고 자유롭게 사는 국민 중에
    이여송과 맥아더 장군을 비교하는 자들이 있다. 



  • ▲ 6.25전쟁 발발 직후인 1950.6.28일 수원 공항에서 만난  

    초췌한 모습의 이승만 대통령과 결연한 표정의 맥아더 장군(필자 소장)


    이들은
    1950년 외세를 끌어들인 북한 공산집단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의 발발 책임이
    미국과 대한민국에 있다고 떠들어댄다.
    북한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소련의 지시와 지원을 받아 한반도 적화를 노리고 저지른
    끔찍한 반인륜적 만행이라는 역사적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무튼 이들의 궤변은
    6.25전쟁 직후부터 북한 김일성 집단, 소련과 중국 공산주의자들의 흑색선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 사회에는
    이여송을 맥아더가 아니라 소련의 북한점령군 사령관으로
    김일성을 하대한 스티코프,
    6.25전쟁 당시 중공지원군 총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휴전회담 중공 대표 세팡(謝方) 등과
    비교하는 것이 옳다고 따지는 분들을 찾기 힘들다.

    도대체 우리 사회의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지식인들은
    왜 공산주의자들의 흑색선전을 접하고도 그저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근본적인 원인은 6.25전쟁을 몸소 겪은 우리 선배들이
    유성룡의 <징비록> 같은 통절한 기록을 별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를 도운 미국인들이 쓴 한국전쟁에 관한 징비록이 많지만
    아직도 우리가 알지 못한 채 묻혀있기 때문이다.


    6.25한국전쟁 징비록


    우선 우리의 경우를 한 번 되돌아보자!

    소련과 중공이라는 외세를 등에 업고
    대한민국의 자유와 인권을 말살하려는 북한 공산집단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개시되자,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대통령을 비롯한 고위공직자들은
    국민보다 자신들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여 피란하고,
    전쟁 준비에 소홀했던 군은 후퇴를 거듭해 나라가 적의 손아귀에 넘어갈 뻔하지 않았던가?

    다행히 미국을 비롯한 유엔군의 도움으로 자유와 인권을 가까스로 지킬 수 있었으나,
    애통하게도 불법침략자들에 대한 마땅한 응징을 하지 못하고 휴전을 맞지 않았나?

    그러나 오늘까지
    이승만 대통령을 비롯한 당시의 고위관리-군인들이 통절하게 스스로를 반성하고
    후세에 다시는 그런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경계하는 징비록을 남긴 것을
    필자는 거의 알지 못한다.

    반면에 6.25전쟁으로 초래된 상상을 초월한 국민적 고통과 희생에 대해 책임 있는 분들이
    스스로 자신을 벌하고 반성하기보다는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을 물리치는 데 나름대로 공헌을 했다는 자기 자랑,
    그리고 잘못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자기변명이 담긴 책과 기록들을 남기지는 않았는지 우려된다.

    한편, 미국인들에 의해서 집필된 적지 않은 한국전쟁 징비록 중에서
    다음과 같은 저술은 주목할 만하다.

    한국전쟁에 관한 최초의 단행본인
    종군여기자
    마거리트 히긴스의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 1951),
    종군기자
    오에치피 킹의 <종이호랑이 꼬리>(Tail of the Paper Tiger, 1961),
    휴전회담 미국 측 첫 번째 수석대표
    조이 제독의 <공산주의자들의 협상방법>(How Communists Negotiate, 1955),
    두 번째 미국 측 수석대표
    클라크 장군의 <한국전쟁 비사>(From the Danube to the Yalu, 1954)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 탁월한 네 권의 책 중에서 <한국전쟁 비사>는 1955년,
    <자유를 위한 희생>은 2009년에 한글번역판이 각각 번역돼 출간됐으나,
    나머지 두 권은 번역본이 나오지 않았다.

    반면에 지난 15년 동안 시중에는 우리와 미국 등 침략의 희생자가 아닌,
    북한과 중공 등 침략자의 시각에서 6.25전쟁을 다룬 선전-선동적이며
    다분히 역사를 왜곡하는 저술들이 다수 등장했다.

    이것이 오늘의 대한민국 국민 대부분이 6.25전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현주소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 젊은이 중 다수가 6.25전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이유다.
    이것이 정치계, 학계, 언론계 등에 침투한 일부 친북세력이
    이여송과 맥아더를 비교하고,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부르기를 거부하며,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원인이다.

    한 가지 예로 친북세력은
    휴전회담의 북한 수석대표 남일을
    미국 측 수석대표 조이 제독을 통쾌하게 몰아 부친 영웅적인 인물로 묘사한다.
    그러나 남일이
    자신보다 계급이 낮은 중공 대표 세팡(謝方, Hsieh Fang)의 눈치를 살피던
    허풍쟁이라는 사실은 얘기하지 않는다.

    이와 관련해서
    조이 제독의 한국전쟁 징비록 <공산주의자들의 협상방법>의 내용 중 일부를
    번역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남일은 단지 명목상의 수석대표였으며,
    실제 모든 권한은 중공의 세팡에게 있었다.

    남일은 미국에 대한 적대적인 장광설을 늘어놓기 전에
    세팡으로부터 승인(고개를 끄덕임)을 얻는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다.
    세팡은 휴전회담에서 실질적인 공산 측의 대표였다.

    깡마른 몸에 궁색한 모습의 그는,
    두뇌회전이 빠른 위험한 인물이었으며,
    날카로운 눈을 쉴 새 없이 깜빡였다.
    그는 말 수는 적었지만,
    남일처럼 준비된 자료를 앵무새처럼 그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즉흥적이고 유창하게 얘기했다.”

       -<How Communists Negotiate>, 12-13쪽




  • 히긴스의 <자유를 위한 희생>-한국전쟁 징비록 겸 교과서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 1951)>은 종군여기자 마거리트 히긴스가 6.25전쟁 발발 이틀 후부터 6개월간 전쟁터에서 몇 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며 기록한 비망록이자 징비록이다.
    이 책으로 히긴스 기자는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자유를 위한 희생>은 한국전쟁에 관해 국내외에서 발간된 그 어느 저술보다도 시사적이고,
    객관적이며, 유익하고, 매력적이며, 흥미진진하고, 교훈적이다.

    왜 그러한가?

    첫째, 6.25전쟁에 관한 저술 중 이렇게 빨리 나온 책은 없었다.
    저자는 1951년 1월 1일에 책의 서문을 썼다. 1950년 12월 중순까지 저자가 전쟁터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다.

    둘째, 이 책은 맥아더 장군을 위시해 이등병까지의 미군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 한국 언론인, 한국군, 북한군 및 중공군과의 수많은 인터뷰가 담긴 한국전쟁 징비록이다.

    셋째, 전투를 하는 군인이 아니라 뉴스를 전하는 기자가 전쟁의 현장을 놀라우리만치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이는 6.25전쟁터의 근처에도 가보지 않은 저자들의 글이나 말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넷째, 남성이 아니라 여성의 눈으로 본 기록이다.
    저자는 여성으로서 차별대우를 받으며 취재했음을 여러 곳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차별은 이 책이 갖는 매력의 하나가 되고 있다.

    다섯째, 생생한 실화인 동시에 섬세하고 감수성 넘치는 문학작품이다.
    발간과 동시에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독일어 등 수개 국어로 번역된 것은 이런 이유에 기인한다.

  • 여섯째, 이 책은 단순한 6.25전쟁 르포를 넘어서 전쟁, 자유민주주의, 국가존립의 이유,
    국가 간의 동맹, 남녀차별의 사회적 문제, 인간적 유대감, 애국의 의미, 삶과 죽음에 관한 교과서 아닌 교과서이다.

    <자유를 위한 희생>의 저자 히긴스는 누구인가?

    머거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0-1966)는 길지 않은 세월을 불꽃같이 살다간 여인이었다. 그녀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사랑하고, 일하며, 후세에 교훈이 되는 알찬 기록을 남겨 놓은 인물은 흔치 않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아버지, 프랑스인 어머니 사이에서 1920년 9월 홍콩에서 태어난 히긴스는
    6살의 나이에 미국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했다. 미국 사립 명문 고등학교와 UC 버클리 대학, 콜롬비아 대학원을 졸업한 그녀는 1942년 6월 뉴욕 헤럴드 트리뷴의 정식기자로 채용됐다.  

    1944년 동 신문의 런던 특파원, 1947년부터 3년간은 베를린 지국장으로 근무했다.
    이때 그녀는 우아한 매력, 뛰어난 춤 솜씨와 바이올린 연주실력 등으로 남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녀가 공군 소장인 남편을 만나게 된 것도 베를린에서였다.

    히긴스가 기자로서 탁월함을 인정받은 것은 바로 6.25전쟁 때문이었다.
    전쟁발발 한 달 전 그녀는 일본 도쿄 극동지국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미국 언론의 관심이 극동에 있지 않았으므로 그녀는 인사상의 불이익을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행운의 여신은 히긴스의 편이었다.

    북한의 남침으로 그녀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된다.
    히긴스는 전쟁 발발 이틀만인 1950년 6월 27일 김포에 도착한 후, 12월까지 6개월 동안 미군과 함께 전장을 누볐다. 그녀는 실제로 몇 번이나 죽음을 모면하기도 했다.
  • 이런 그녀를 미군 장병들은 ‘혈관 속에 얼음물이 흐르는 여자’,
    ‘드레스보다 군복이 더 잘 어울리는 여자’, ‘화장품 대신 진흙을 바른 여자’라며
    사랑하고 존경했다.
    히긴스는 6.25전쟁 취재로 이름을 날린 후, 베트남 전쟁 등 여러 분쟁지역을 취재했다.

    히긴스의 죽음은 열정적인 삶만큼이나 드라마틱했다.
    베트남 전쟁 취재 중 풍토병을 얻어, 1966년 1월 워싱턴 DC의 미 육군병원에서 마흔 다섯 해의 삶을 마감한 것이다.

    미국정부는 종군기자로서의 탁월한 업적을 기려 그녀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했다.

    히긴스는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에서 결론조로 말했다.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한 승리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이 책을 들고 미국 전역을 다니며 이렇게 호소했었다.
    “우리는 한국을 도와야 합니다.”

    그녀의 호소는 미국의 젊은이들이 미지의 나라인 한국을 위해서,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한국인들을 위해서 달려오도록 하는데 기여했다. 그리고 그들의 고귀한 희생으로 우리는 자유를 지켰다.

    늦었지만, 한국정부는 2010년 히긴스 기자에게 외교훈장 흥인장을 추서했으며, 그녀의 딸과 손자가 방한하여 훈장을 수령했다.

    이현표(뉴데일리 논설위원, 전 주미한국대사관 문화홍보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