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갱이의 사위와 빨갱이의 원수의 딸

    빨갱이가 사라진 게 아니라 빨갱이란 용어가 사라져서,
    빨갱이의 철천지원수의 딸에게만 연좌제가 선별적으로 적용된다.

    최성재

     

    모든 국민은 자기의 행위가 아닌 친족의 행위로 인하여 불이익한 처우를 받지 아니한다.
      - 헌법 제13조 3항  

    2002년 초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 중 이인제가 노무현은 빨갱이의 사위라고 폭로했다.

    2002년 4월 송정호 법무장관이 국회에서 노무현의 처 권양숙의 아버지 권오석에 대해 역사적 사실을 입증했다.

    6.25 초반 경남 창원군 진전면이 인민군 세상이 되자 붉은 완장을 차고 9명(변재환 박사 등 유족회의 주장에 따르면 11명)의 양민을 학살한 권오석이 다시 세상이 바뀌자 도피하다가 잡혀서 복역한 사실을 밝혔다.
    권오석이 1950년 말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 중 1956년 폐결핵과 두 눈의 실명 등의 사유로 형 집행정지가 되어 풀려났다가, 1961년 3월 27일(장면 정권 시절) 재수감되었다는 내용이었다.
        - 변재환 박사의 증언

  • 코너에 몰린 노무현은 고개를 숙이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몸을 좌우로 흔들더니, 회심의 미소를 짓고 있던 이인제의 명치를 향해 느닷없이 카운터펀치를 날렸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아내를 버리란 말입니까?” 

    이로써 노무현은 연좌제의 코너에서 벗어났고, 이인제는 풀썩 주저앉으며 도리어 헌법(제13조 3항)의 가치를 훼손한 자로서 자충수의 궁지에 몰렸다. 열렬한 박수를 받으며 노무현은 챔피언 벨트를 향해 한 걸음 성큼 다가섰다.

    2012년 9월 24일 박근혜는 고개를 깊이 숙였다. 링에 오르기도 전에 두 상대가 번갈아 날리는 ‘연좌제’ 잽과 관중이 퍼붓는 끝없는 ‘유신공주’ 야유에 기진맥진하여, 공인으로서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은 일절 안 받고 대신 자식으로서 아버지 박정희의 부채는 만분지일이나마 갚겠다며 고개를 깊이 숙였다.

    전초전에서 기선을 제압한 상대는 둘 다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검투사의 맛보이기용 피 흘림을 기어코 보고 말겠다고 아우성치는 관중의 야유도 차츰 잦아들었다. 불씨가 사그라진 것은 아니다. 소리가 약해지긴 했지만, 한쪽에선 ‘진정성이 없다!’고 야유를 보내고, 다른 한쪽에선 숫자는 적지만 천둥 같은 선지자의 목소리로 ‘왜 고개를 숙였느냐? 왜 카운터펀치를 날리지 못했느냐?’고, 이제 더 이상 투지를 상실한 ‘사과녀’를 지지하지 않겠다고 노발대발한다.

    왜 노무현은 카운터 펀치 한 방으로 위기에서 벗어나서 마침내 챔피언이 되고 그 후에도 조금씩 사실을 왜곡하며, 애통하는 유족한테는 끝내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아도 되었던가?

      왜 박근혜는 33년 지론을 버리고 머리를 숙여야만 했을까?

    그것은 우우, 관중 때문이었다. 부글부글, 여론 때문이었다. 와글와글, 언론 때문이었다. 노무현은 카운터펀치 한 방으로 군중심리에 몸을 맡긴 관중으로부터 환호를 받았지만, 박근혜는 심판의 무시무시한 눈총과 관중의 끝없는 야유에 심신이 그로기 상태에 빠져, 까딱 잘못하면 링에 아예 오르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로마 콜로세움의 관중처럼 코리아 종합경기장의 관중이 원하는 것은 피, 피다. 분수처럼 내뿜는 붉은 피다. 로마 시민처럼 서울 시민도 선전선동에 약하다. 브루투스가 연단에 올라서면 독재자 카이사르가 흘린 피에 통쾌해 하다가, 안토니우스가 연단에 올라서면 불세출의 영웅 카이사르가 보여 준 뜨거운 애국심과, 그가 나눠 준 산더미 같은 전리품과, 역시 그가 나눠 준 바다같이 넓은 토지에 새삼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야심가이자 변절자이자 최상위 0.01% 귀족의 귀족 원로원의 앞잡이 브루투스가 콱 쓰러지며 흘릴 피에 전율한다.

    박정희는 한국의 카이사르다. 김재규는 한국의 브루투스다. 브루투스가 공화정을 더 사랑하여 사랑하는 카이사르를 죽였다고 말하자 로마 시민들이 환호했듯이, 김재규가 민주주의를 더 사랑하여 사랑하는 박정희를 죽였다고 말하자 한국 국민은 환호했다. 그러나 한국의 안토니우스가 김재규를 체포하여 그 죄목을 낱낱이 들추자, 한국 국민은 돌변하여 한국의 카이사르를 위해 눈물로 홍수를 이뤘다.

    여기서부터 한국은 로마와 사정이 달라진다. 제2의 브루투스, 제3의 브루투스, 제4의 브루투스, 제5의 브루투스가 나타나 안토니우스를 물리친 것이다.

    그러자 박정희는 거듭거듭 부관참시되었다.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었으나 독재자로서 민주주의를 후퇴시켰다고 모든 역사책에 또록또록 기록되었다.

    신문과 방송도 마찬가지다. 여기에 조선과 동아도 예외가 아니다. 조선과 동아는 가장 공정한 심판을 자부하면서 박근혜에게 인정할 건 인정하고 사과할 건 사과하라고 유언무언의 압력을 가했다.

    극히 일부 온라인 언론이 전혀 사과할 필요 없다고, 그것은 연좌제를 금지하는 헌법에도 어긋날 뿐 아니라, 박정희는 엄한 아버지였을 뿐 악한 독재자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마지막 절규는 관중들의 야유에 묻혀 박근혜의 귀에는 다가가지 못했던 듯하다. 심지어 당내에서도 절대다수가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버리라고 권유했다. 고립무원(孤立無援), 사면초가(四面楚歌)!

    한국에는 아직 옥타비아누스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태리 반도의 작은 로마가 아니라 유럽과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걸친 대제국의 기초를 세운 사람은, 사실상 초대 황제는 카이사르였음을 패도적인 무력만이 아니라 압도적인 논리로써 민심을 사로잡을 옥타비아누스가, 조변석개(朝變夕改)하는 여론이 아니라 세대불변(世代不變)하는 민심을, 천심을 사로잡을 아우구스투스가 나타나지 않았다.

    박근혜가 옥타비아누스가 되기는 어렵겠지만,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의 길로 나아가는 길은 닦을 수가 있다.

    박정희 덕분에 경제영토를 한껏 넓힌 대한민국은 이제 세계2대 경제강국 G2를 상대로 구조적 무역흑자 체제를 구축했지만, 사정이 로마보다 복잡하고 고약하다. 국토가 여전히 분단되어 있기 때문이다.
    안보가 갈수록 취약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전쟁의지를 시험하는 20년 사상전에서 완패하여, 북한의 구닥다리 대포 한 방에도 속절없이 당할 뿐만 아니라 적이 원하는 대로 자중지란을 일으켜 60년 평화와 번영의 안보 울타리, 한미동맹을 스스로 허물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 후보 3인의 3중주 복지 타령으로 제2의 아르헨티나가 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안보 불감증으로 제2의 월남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빨갱이의 총본산 북한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고, 빨갱이를 수시로 내려 보내 박정희를 암살하려고 꾀했던 악의 총본산 북한이 한국판 제3, 제4, 제5의 브루투스가 헌납한 햇볕정책을 역이용해 핵무기를 개발하고서 호시탐탐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빨갱이를 일망타진하고 안보의 철벽을 높이 쌓았던 박정희는, 빨갱이의 철천지원수 박정희는 죽어서 ‘호국의 용’이 된 게 아니라 ‘민주의 적’이 되어, 선거의 여왕으로 이름을 떨친 딸이 선거의 여제로 등극하려고 막 대문을 나서는 순간, 꼼짝없이 연좌제에 걸려 고개를 깊이 숙였지만, 눈을 지그시 감고 지켜볼 따름이다.

    빨갱이가 사라진 게 아니라 빨갱이란 용어가 사라져서, 빨갱이의 친족에게는 헌법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고 엄격히 실현되어 연좌제가 감히 적용되지 않지만, 한 술 더 떠서 민주화 유공자로 신분이 세탁되는 수가 비일비재하지만, 빨갱이의 원수의 친족은 괘씸죄에 걸려, 헌법 위의 떼법에 묶여, 독재자의 원죄를 머리에 히잡처럼 덮어쓰고 연좌제의 독거미 줄에 칭칭 감겨 어딜 가든 가슴에 주홍글씨가 새겨진 푸른 옷을 입고서 고개를 깊이 숙여야 한다.

    대한민국은 이제 적이 누구인지 모른다. 밖에도 적, 안에도 적, 사방에 적이지만, 적이 누군지도 모른다. 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오랜 친구는 남이 되거나 적이 되고 있다.

    통일의 기운은 날로 높아 가는데, 그것은 자유통일이 아니라 연방제통일(적화통일)의 기운이다. 무력통일이건 평화통일이건, 적화통일의 기운이 날로 높아 간다. 다만 다들 김일성의, 김일성에 의한, 김일성을 위한 햇볕정책의 마약에 취하여 남북통일은 어느 날 갑자기 넝쿨째 절로 굴러오는 자유통일인 줄 착각하고 있을 뿐이다.

    친구란 공동의 적을 가진 사람이다. (A friend is one who has the same enemies as you have. Lincol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