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장원급제, 사간원에서 일하며 최익현 상소 두둔하다 파직1894년 왕의 밀명 받들어 의병 조직한 뒤 저항…나라 빼앗기자 단식 순국
  • 나라가 망할 때는 보통 ‘매국노들’이 득세한다. 구한말 그 매국노들의 목을 베어 달라고 상소를 올린 '진짜 선비'가 있다.

    국가보훈처(처장 박승춘)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함께 명성황후 시해 후 ‘선성의진’을 결성하고, 을사조약 파기와 을사오적 처형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던 이만도 선생을 8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 ▲ 이만도 선생의 비. 그는 나라를 빼앗기자 조정에 '역적들의 목을 베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 이만도 선생의 비. 그는 나라를 빼앗기자 조정에 '역적들의 목을 베어달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만도 선생은 퇴계 이 황의 11세손이다. 1842년 1월 28일 경북 봉화군 봉성면에서 태어나 14세 때 선대 고향인 안동 도산면 하계마을로 돌아왔다. 24세가 되던 1866년 정시 문과에서 장원급제한 후 성균관 전적, 홍문관 부교리, 사헌부 장령과 지평, 사간원 사간 등을 지냈다.

    1876년 강화도 조약이 맺어지자 선생은 최익현이 올린 개항반대 상소를 두둔하다 파직 당했다. 1882년 한미수호조약으로 나라가 혼란해지자 낙향했다. 같은 해 6월 임오군란이 일어난 후 공조참의와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거절했다.

    1894년 6월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자 서상철이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몰두하던 선생에게 거병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왕의 명령이 없는 거병을 할 수 없다”고 판단, 거절했다.

    9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왕의 밀령이 전달되자 선생은 거병을 준비했다. 그러나 함께 거사를 도모하던 이용호가 일본군에 붙잡혀 거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선생은 조상의 묘역인 일월산 자락으로 피신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단발령 소식까지 들려오자 안동지역에서는 통문이 돌기 시작했다. 선생은 가장 앞선 예안통문에 참여하고, 의병을 일으켜 선성의진을 이끌었다. 그러나 의진을 구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안동의진이 패하고 선성의진도 와해됐다.

    선생은 대장에서 물러나 의진을 정비하고, 집안 후손인 이중린, 이인화, 이중언 등이 대장으로 의진을 이끌어 3월 태봉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선생은 아들 이중업을 통해 ‘청참오적소(請斬五賊疏. 다섯 역적의 목을 베소서)’라는 상소를 올려 을사늑약 파기를 강력히 주장했다. 상소를 올린 선생은 영양 일월산 서북쪽 산촌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910년 나라가 망하자 선생은 9월 17일 단식을 시작했다. 단식 21일째 되던 날 경찰이 와서 강제로 음식을 먹이려 하자 선생은 크게 소리쳐 꾸짖으며 그들을 물리쳤다. 10월 10일 선생은 단식 24일째 되던 날 순국했다.

    선생의 동생 만규는 의병에 참가하고 파리장서에 서명하였으며, 아들 중업은 아버지를 따라 의병에 참가했다. 1910년대에는 항일투쟁을 이끌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