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의 민족과 이명박의 중도실용 탓
  •  “민족이 이념보다 앞선다. (나는 민주의 수호신이다.)”(1993년 김영삼)
     “이념의 시대는 갔다. (나는 중도실용의 선구자다.)”(2008년 이명박)
     
      건강은 절대 빌리지 못하지만, 머리는 언제든지 누구한테라도 빌릴 수 있다고 학신(확신)한 김영삼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아랫것들이 써 준 대로 앵무새보다 밝은 목소리로 힘차게 대통령 취임사를 읽었다. 실은 아랫것들인 부총리 겸 통일부장관 한완상 등이 정신연령 13세의 김영삼을 소쿠리 비행기에 태워놓고, 대통령의 권위를 빌려 단번에 이념의 광장을 점령했다. 김영삼이 거룩할사 민족의 제단 아래 씰데없는(쓸데없는) 소리라며 이념 곧 우익, 반공, 자유민주를 줄줄이 꿇어앉히고 느닷없이 뒤통수를 쇠망치로 쳐서 때려눕히자, 친북좌파는 즉시 만세를 부르며 빨갱이 딱지를 떼고 민족 어깨띠를 두르고 민주 완장을 차고 퀴퀴한 하수구에서 텅 빈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그때부터 반공과 빨갱이란 말은 금기어(禁忌語)가 되어 버렸다. 고어(古語)가 되어 버렸다. 사어(死語)가 되어 버렸다. 뜻이 정반대로 바뀌어 버렸다. 반공과 빨갱이는 군사독재의 부끄러운 잔재로 매도되었다. 대신 민족화해와 민주투사는 문민정부의 자랑스러운 표상으로 떠받들어졌다.
     
      “나보고 빨갱이래! 미친~, 야, 이 수구꼴통아!”
     
      김일성 공산괴뢰하고 하면 그건 케케묵은 이념이고, 이승만 친일독재라고 하면 그건 이념이 아니라 민족의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김일성 공산독재라고 하면 그건 케케묵은 이념이고, 박정희 군사독재라고 하면 그건 케케묵은 이념이 아니라 민주의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김일성의 인권탄압하면 그건 케케묵은 이념이고, 박정희의 인권탄압하면 그건 이념이 아니라 민주의 역사 바로 세우기였다.
     
      김일성의 무시로 공개총살과 20만 강제수용소 수용은 청맹과니의 눈으로 보고, 박정희의 어쩌다 최루탄 발사와 한두 명 가택연금은 전자현미경의 눈으로 보는 전직 미국 대통령이 있었다. 김영삼과 김일성은 인권의 전도사 카터를 중재인 삼아, 손을 꼭 잡고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눈물 합창하려는 순간, 10여년 전에 이미 아들에게 실권을 다 빼앗긴 김일성이 덜컥 죽어 버렸다. 김영삼과 김일성이 민족 운운하기 전에, 신마적 김정일은 김영삼의 대통령 당선 기념으로 화기애애하던 남북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중지하고 민주대통령의 취임을 축하하여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해 둔 상황이었다.
     
      1970년대에 이념서적은 좌익서적을 의미했다. 이념서클(동아리)도 좌익서클을 의미했다. 당시에 대학에서는 그런 동아리를 허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더그라운드’라 불렸다. 지하에서 그들이 읽고 토론하는 책은 하나에서 열까지 좌익서적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미국의 두 차례 천사 역할을 제국주의로 폄하했다. 1980년대엔 좌익 연합서클이 총학생회를 장악하면서 우익이념은 완벽하게 타도되었다. 씨가 말랐다. 어떤 교수도 그들과 맞서서 어용교수의 고깔을 쓰고 이념논쟁을 벌일 수 없었다. 선동과 폭력 앞에 교수들은 침묵하거나 아첨하거나 투신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학 안에서만 그랬다. 그런데, 김영삼은 대학 안에서만 통용되던 것을 전국으로 확대하여 이념을 좌익 금기에서 우익 금기로 바꿔 버렸다. 전에는 이념이라는 말만 나와도 꼼짝 못하던 좌익이 이제는 주도권을 잡고 도리어 우익이 이념이란 말만 꺼내도 시대착오적이라며 벌떼같이 일어나 그들을 에워싸 버렸다.
     
      이해찬이 교육부장관 시절에 고등학교까지 배운 게 하나도 없었다고 단언한 말은 잘 새겨들어야 한다. 고등학교까지 배운 반공과 자유민주 교육은 쓰레기 지식이었고, 대학의 언더그라운드와 감옥에서 읽고 배운 것은 하나같이 좌익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와 주체사상인데, 그것이야말로 ‘참’ 지식이었다는 뜻이다. 일본 전교조의 진교육(眞敎育)에서 따온 참교육도 마찬가지의 의미이다.
     
      이명박 정부는 두 좌파정부가 민심을 잃은 원인을 경제에서만 찾았다. 그 결과가 중도실용이다. 그는 이념의 시대는 갔다고 선언함으로써 친북좌익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햇볕정책의 실패를 대대적으로 논의해야 할 때, 그는 이를 외면함으로써 친북좌익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공식적으로 70억 달러를 갖다 바쳤지만, 편지 한 통 주고받지 못하고 자유왕래 한 명 못하고, 기껏 답례조로 동해와 서해로 김대중 정부에서만 세 번 침략 받았고 노무현 정부에서는 미사일 대량 발사와 핵실험이란 도발을, UN을 경악시킨 도발을 선사받았다. 이명박은 도리어 그들로부터 모든 죄를 뒤집어썼다. 2차 핵실험과 천안함 격침, 연평도 포격은 이명박(그들은 이명박이라고 정식 이름을 부르는 일이 없다만)이 김정일을 민족으로 대우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은 것이라고 역공했다. 뒤집어씌웠다. 친북좌파 정부에서도 그 못지않은 도발이 있었지만, 그들은 모른 척했고 이명박도 모른 척했다.
     
      이명박은 방송과 신문과 문화계와 인터넷과 광화문은 정권교체가 뭔지 전혀 모르게 만들었다. 이념의 광장을 친북좌파에게만 개방했던 것이다. 불법시위는 스스로 지쳐서 그만두고 다른 불법시위를 벌일 때까지 내버려두었다. 경찰이 두들겨 맞아도 가만있고, 우익 노인들이 무차별로 맞아도 가만있다. 초등학생까지 대통령 이름을 시도 때도 없이 상스럽게 바꿔 불러도 가만있다. 국회의원들의 조폭놀이를 무협영화 보듯 한다. 단, 불법시위자 중 누구 하나 작은 생채기라도 날까 노심초사한다. 그들 중 누구라도 다치거나 죽으면 노발대발한다. 총리를 보내 진심으로 사과하게 만들고 보상비를 6.25 전사자의 70배나 준다. 김영삼과 달리 이명박은 머리를 남한테 빌리는 사람이 아니니까, 모르고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박원순에게 서울시장 시절에 4년치 월급을 100% 바치고, 안철수에게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두 자리를 내주는 걸 보아, 이재오와 황석영 등의 친북좌파를 중용하는 걸 보아, 북으로 풍선 한 개 날리지 못하는 걸로 보아, 그의 본심을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이제 이명박 정부는 어제는 시장경제, 오늘은 계획경제, 내일은 복지경제로 갈팡질팡하다가 경제마저 이전의 세 정부보다 나을 게 없는 선무당이라는 게 드러났다. 중도실용은 기회주의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났다. 노무현의 한미FTA는 우익의 노력으로 통과되었지만, 이를 빌미로 선동과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 저들은 노무현 탄핵 때처럼 위기를 기회로 바꾸려고 한다. 이명박 정부는 이미 이에 말려들고 있다.

    이 기사의 출처는 <조갑제닷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