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일본소설 ‘우동 한 그릇’은 엉터리다?

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1.02.11 15:24:43

일본의 세시풍습을 이야기하다 보니 늘 마음에 걸려온 께름칙한 일 한 가지가 다시 떠오른다. 도리 없다. 풀고 넘어가는 수밖에....
<우동 한 그릇>이라는 번역소설이 있다. 원작이 출판된 일본에서는 오래 전에 생명이 다 하여 자취를 감추었건만, 한국 서점에서는 오랜 세월 독자들의 인기를 끈 롱 셀러였다.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책이 갑자기 매장된 이유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원작자의 도덕성을 외국에서까지 거론할 필요는 없으리라. 문제는 이 책의 제목이다.
일본어 원서 명은 <잇빠이노(一杯の) 가케소바>이다. ‘한 그릇의 가케소바’인 것이다. 가케소바는 ‘소바’의 한 종류이다. 소바를 한국어로 옮기자면 메밀국수다. 면 종류가 다양한 일본에서는 소바도 여러 종류가 있다. 흔히 우리가 아는 메밀국수, 네모 난 나무 도시락 위에 얹힌 물기 없는 면을 양념 스프에 담갔다가 꺼내 먹는 것이 ‘자루소바’이다. 가케소바는 처음부터 국물에 말아진 상태로 먹는다. 일본어로는 국물을 ‘끼얹는다’는 뜻의 ‘가케루’에서 따와 가케소바가 되었다. 우리가 통상 즐기는 국수를 떠올리면 알기 쉽다.
소바는 특히 섣달 그믐날 저녁에 먹는 세시 음식이다. 그걸 두고 ‘도시코시(年越し) 소바’라고 부른다. 하필 소바를 먹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생일이면 명이 길어지라고 국수를 먹던 옛 우리 풍습처럼, 소바도 가늘고 길어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아 먹는다고 한다. 혹은 소바가 잘 잘라지니까 지난 한 해의 고생을 잘라버린다는 뜻을 담았다고도 한다. 소설 <우동 한 그릇>의 내용도 그렇다. 가난한 주인공 모자(母子)가 섣달 그믐날 소바 한 그릇을 나눠 먹으며 가난하지만 정겹게 한 해를 보내는 모습이 작품의 도입부요, 이를 통해 눈물겨운 스토리가 전개된다.
그걸 ‘우동’이라고 해버렸으니 이를 어쩌나? 우동 역시 면으로 만든 똑같은 일본 음식이니 서로 사촌간이로되 소바와는 분명 출신성분(!)이 틀린다. 만드는 재료가 다르니 이름이 다른 것도 당연하다. 더구나 작품 내용에서처럼 한쪽은 세시음식이어서 일부러 등장시켰음에도 깡그리 무시되고 말았다. 왜 그랬을까? 마치 한국에서 설날에 떡국이 아니라 팥죽을 먹는다는 식의 터무니없는 오역(誤譯)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니 그저 찬탄을 금하지 못할 따름이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우동이면 어떻고 소바면 어떠랴....!? 부아를 삭이고 섣달그믐의 일본사회를 다시 엿본다. 저녁 7시 무렵이 되면 가족들이 텔레비전 앞에 슬금슬금 모여 앉는다. 인기가수들이 홍팀과 백팀으로 편을 갈라 벌이는 노래자랑을 즐기기 위해서이다. 중간에 10분간의 뉴스 시간을 빼고 자정이 다 될 때까지 근 5시간가량이나 이어지는 와이드 가요 쇼 프로그램 ‘고하쿠 우타 갓센(紅白歌合戰)’. 가정에 따라서는 한 그릇의 소바를 새참 삼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먹기도 하고, 다 끝난 뒤 밤참으로 즐기기도 하는 모양이다. 물론 모든 가정이 다 그렇다고 단정할 자신은 없다.(단 자정을 넘긴 뒤에 소바를 먹는 것만은 금기시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라디오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에 무조건 항복한 1945년 12월31일에 전파를 탔다. 반응이 신통찮았던지 그만두었다가 1951년 1월3일에 다시 시작했다. 이것을 제1회로 친다. 같은 해 12월31일에 두 번째 방송을 하면서 날짜가 섣달그믐으로 못 박혔고, 제4회 때부터 라디오에서 텔레비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프로그램이 일본인들로부터 ‘고하쿠(紅白)’라는 애칭으로 불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끈 것은 1959년의 황태자(=현재의 아키히토 천황) 결혼식과 1964년의 도쿄올림픽으로 TV 수상기가 급속히 보급되고 컬러 방송이 이뤄지면서부터라고 한다. 그 무렵에는 시청률이 80%를 넘었다니 “고하쿠를 봐야 비로소 한 해가 바뀐다는 기분이 들었다”는 그네들의 이야기를 실감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일본이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면서 고하쿠의 인기도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니까 덩달아 놀 거리가 많아졌던 것이다. 따분하게 집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새해를 맞느니 온천이나 하러 가자는 국내파에서, 아예 외국으로 튀자는 해외파까지 나들이 인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시청률이 하강 곡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일종의 설맞이 특별 이벤트로 자리 잡은 고하쿠의 인기는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올해의 출연자’가 화제에 오르는 것만 해도 예사롭지 않다. 심지어는 사회를 누가 맡을 것인지도 뉴스가 된다. 한류 붐이 절정에 이르렀던 2004년의 경우, 11월말이 되자 '출연자 확정'이라는 기사가 주요 언론을 장식했다.
한류 열풍을 반영하듯 보아가 3번 째 출연에다, 류(RYU)는 드라마 ‘겨울 연가’(일본명 ‘겨울 소나타’)의 주제곡 ‘처음부터 끝까지’를, 그리고 NHK가 방영한 또 한 편의 한국 드라마 ‘아름다운 날들’에 가수 지망생 역을 맡았던 이정현이 ‘헤븐’을 부른다고 했다. 또 ‘아름다운 날들’의 주연 탤런트 이병헌은 당일 특별 출연하여 한국어로 “문화교류를 통해 우정을 이어가자”고 제의함으로써 청중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다.
NHK 홀의 화려한 조명이 꺼지자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그제야 저마다의 한 해를 마감했다. 정월 초이튿날, 시청률 조사결과가 드러나면서 고하쿠가 구설수에 올랐다. “고하쿠 시청률, 과거 최저인 39.3%. 처음으로 40% 아래로 내려가” 1월2일 <아사히신문> 인터넷판에 오른 기사의 타이틀이었다.
기사에 의하자면 고하쿠의 시청률은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70%를 넘었다고 한다. 21세기로 넘어오면서 간신히 40%대는 유지했는데, 그마저 깨트려지고 말았다는 것이다. NHK로서는 지난 해 잇달아 터진 자체 스캔들(가령 고하쿠를 담당해온 책임 프로듀서가 공금유용으로 구속되었다) 등으로 추락된 이미지를 되살리느라 한류 붐까지 끌어들였으나 별무소용이었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게다가 똑같은 시간대에 민간 방송 2개 채널이 최근에 와서 인기가 치솟는 ‘K-1’(시청률 20.1%)과 ‘PRIDE’(시청률 10.8%) 등 격투기를 중계함으로써 곶감 빼먹듯이 시청자를 빼앗아갔다는 지적도 나왔다.
일본인들을 누구보다 잘 아는 권위 있는 일본 신문들이 이구동성으로 ‘고하쿠에 그늘이 지다’는 투로 한탄하니 아마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래도 고하쿠의 여전한 위력에 놀라고 만다. 방송사 언저리에 조금이라도 발걸음을 옮겨본 이들은 다 알지만, 시청률 39.3%는 시체말로 ‘애들 장난’이 아닌 것이다.
참고로 비교해 보자. 일요일 황금시간대에 방영되는 NHK 대하 드라마 ‘신센구미(新選組)’의 평균 시청률이 17.7%, 일본인들 스스로가 더 깜짝 놀란 ‘겨울 연가’의 최고 시청률은 20.6%였다. 우리나라에서 방영된 드라마의 시청률은 폐인(廢人)이라는 유행어까지 만들어낸 ‘다모’가 20%대, 근년의 최고 히트작 ‘대장금’이 50%대였다지 아마.....
(너무 남의 집안 수저 숫자까지 들먹이는듯하여 께름칙하지만, 한국가수 동방신기가 출연한 2008년 섣달그믐날의 고하쿠 평균 시청률은 마침내 42.1%로 올라섰다. 그 덕에 담당 프로듀서가 목탁을 손에 쥐지 않아도 되었다. 40%대로 올라서지 않으면 머리를 깎겠노라고 맹세했다니까!)

그렇게 소바를 먹고 고하쿠를 즐기다 잠이 든 일본인들은 설날 아침에 반가운 연하장을 받는다. 우체국에서 아르바이트까지 동원하여 때맞춰 배달해주는 연하장 가운데에는 이른바 관제(官製) 연하엽서가 상당수를 차지한다.
해마다 11월 1일이면 우체국 창구에서 판매하는 연하엽서는 1900년에 첫선을 보였다니 그 역사가 자못 유장하다. 그런 만큼 일본인들이 주고받는 연하엽서의 수효도 보통이 넘는다. 2009년도의 발행량이 41억 3천6백만 장을 넘었다. 그나마 불황의 여파에다, 전자메일 카드로 대신하는 인터넷 세대가 증가한 탓으로 해마다 줄어든 게 그렇단다. 여기에다 연하엽서가 아닌 일반 연하장까지 합치면 도대체 일본인들은 한 해 평균 몇 통씩이나 연하장을 보내는 지 계산조차 쉽지 않다.
연하엽서에는 또 복권번호 같은 것이 적혀 있다. 설날이 지난 다음 추첨을 통해 경품을 주는 제도이다. 발매 반세기를 맞았던 1950년부터 시행했는데, 그 해 1등 당첨 상품이 재봉틀이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2009년에는 1등이 국내여행이나 마사지 의자, 사무용품 세트 중에서 하나를 고르도록 바뀌었다. 이밖에도 2등이 체중계나 전자사전, 3등은 유명 브랜드 식품재료, 꼴찌인 4등은 기념 우표세트를 준다고 했다.
단지 김칫국부터 마시려 들지 마시라. 1등은 1백만 장 가운데 하나, 2등은 셋이라는 당첨 확률부터 먼저 기억해 두는 것이 속 편하리라. 그래도 그게 어딘가. 연하엽서로 새해 인사 받아서 즐겁고, 운 좋으면 경품까지 받을 수 있으니 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기로다!


도서출판 기파랑 펴냄 '일본 상식문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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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욱 일본문화연구소장 : y2cho8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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