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친북좌파보다 무서운 위장우파   
     
     결정적인 순간에 위장우파가 대한민국의 등에 비수를 꽂을 것이다.

    최성재     

      베트남이 무력으로 적화통일되고 독일이 평화적으로 자유통일된 가장 큰 이유는 위장우파의 활약 여부였다. 월남에선 정치중립을 가장한 베트콩보다 무서운 위장우파가 정부 곳곳에서 암약했다. 이들은 어떤 국가 비밀도 바로 월맹으로 넘겼다. 정보전에서 월남과 미국은 월맹에 상대가 안 되었다. 미국이 아무리 세계 최고의 기술을 동원하여, 인공위성 사진과 전화 감청(監聽)으로 각각 물리적 정보인 영상정보(IMINT: Imagery Intelligence)와 신호정보(SIGINT: Signal Intelligence)를 파악하더라도, 그것은 사람이 직접 주고받는 인적 정보(HUMINT: Human Intelligence)에 의해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서독에도 동독의 비밀경찰 슈타지(Stasi)가 관리하는 간첩이 수두룩했다.
    통일 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서독에서 벌어진 거의 모든 시위의 배후에는 이들 간첩이 있었다. 심지어 총리 비서실에도 간첩이 있었다. 유명한 기욤(Guenter Guillaume)이 바로 그 자다. 기욤 사건으로 동방정책(Ostpolitik)을 추진하던 브란트는 1974년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독일은 미국과 달리 사회주의가 폭넓은 지지를 받았고 정책도 사회주의적 요소가 매우 강하여 사회주의 시장경제란 새로운 용어를 낳기도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화적 방법과 정당한 절차에 따른 자유민주의 틀 안에 가능했다.

    서독에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엄격히 구별되었다. 따라서 넓은 의미에서 서독은 우파였다. 서독 국민은 분배와 평등을 중시하는 사회주의는 대부분 수긍했고 그런 이념을 내세운 정당들에게 정권도 여러 번 넘겨주었지만, 사유 재산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를 엄격히 통제하는 일당 독재의 동독 공산주의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따라서 빌리 브란트가 아무리 데탕트 정책을 잘 이끌었다고 하더라도 그의 비서가 동독의 간첩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독일 국민들은 싸늘한 눈총으로 그를 정치적으로 사살했다.  

     서독은 동독과 달리 공산당이 일방적으로 제정한 자의적(恣意的)인 법률이 아니라 여러 정당으로 구성된 의회에서 토론과 다수결에 의해 제정된 절차적(節次的) 법률이 세계 어떤 나라보다 잘 지켜진 법치 국가였다. 따라서 이 법을 어기거나 부정한 자는 설 자리가 없었다. 아무리 슈타지의 요원들이 각종 시위를 주도하고 여론을 호도하려고 해도, 서독 국민들은 그것이 불법집회나 폭동으로 변질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공산주의에 대한 환상도 갖지 않았다.

    동방정책이 실시된 1972년보다 훨씬 전인 1965년에 이미 동독에서 100만 명이 서독에 와서 한 달간 머물 수 있었다. 100만 명의 1만분의 1인 100명이 인간 동물원에서 반평생에 딱 한 번 피붙이를 만나 속엣 말은 단 한 마디도 못하고 하루 이틀 만에 후딱 헤어진 게 아니었다.
    자유왕래는 후에 동서독 합해서 한 해에 1000만 명이 넘어섰다. 눈으로 직접 보고 귀로 직접 볼 수 있는 상황에서 동독 공산당이 아무리 국민들에게 세뇌교육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동독 공산당 고위급이 경비병의 철통 보호 아래 서독의 재벌보다 호화롭게 살았다는 것이 통일 후 드러나자, 동독 주민들은 엄청난 배신감을 느꼈다.) 날마다 여성 평등을 주장하면서 관리직의 90%가 남성에게 돌아간다면, 사람들은 아무도 그 말을 믿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은 사회학에서 나오는 유명한 예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서독에선 위장우파가 적지 않았지만, 이들의 영향력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평등과 분배가 동독보다 서독에서 오히려 더 잘 구현되고, 더하여 자유가 누구에게나 보장되어 있으니, 동서 베를린 어디든 사람들은 이미 통일되기 오래 전에 서독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월남은 엉망이었다. 부정부패와 무능이 만연했다.
    위장우파가 공공연히 활동해도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다. 오히려 신고를 배신으로 보았다. 주적인 월맹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학생과 승려와 지식인과 농부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퍼져 있었다.
    낮에는 자본주의, 밤에는 공산주의! 이것이 대세였다.

    세계 최강국이자 세계 최고부국 미국은 수렁에 빠졌다. 더군다나 월맹의 뒤에는 소련과 중공이 무기와 식량을 무한정 지원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전쟁이었다. 미국은 깃털 월남을 버리고 대신 몸통 중공과 머리통 소련을 둘로 갈라놓기로 결정했다. 미군이 빠져나가자 월남의 위장우파는 월맹이 사이공을 함락시킬 수 있는 최상의 조건을 만들고 그 1급 비밀을 속속 월맹에 전달했다. 월맹과 베트콩과 위장우파에 포위된 월남은 어린애의 손에 들려진 밥그릇처럼 순식간에 뒤엎어졌다.  

     한국은 서독만큼은 아닐지라도 자유와 평등이 폭넓게 보장되어 있고 풍요가 골고루 분배되어 있다.
    부족한 게 많지만 상대적으로 한국은 북한에 비하면 이상 국가(idea)이다. 독재와 부정부패와 무능은 북한과 짝할 수 있는 체제는 일찍이 동서고금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스탈린과 모택동도 독재와 무능에선 김일성이나 김정일과 짝할 만하지만, 부정부패에서는 두 폭군에겐 어림없이 못 미친다.

    그럼에도 한국에선 무조건 북한을 편드는 친북좌파가 비일비재하다. 특히 논리로 무장된 지식인 중에 많다. 알에서 깨어나 어미가 아닌 다른 동물을 처음 본 오리새끼가 그 동물을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다니는 것처럼 이들은 반항을 멋으로 알던 사춘기 시절 어느 날 민주 학교 자주 교실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편집광적인 어떤 이론의 칩을 머릿속 가장 깊은 곳에 이식한 구제불능이다.  

     한국은 1980년대 말에 이미 법치 수준도 거의 선진국에 근접했다. 상황은 오히려 그 후로 나빠졌다.
    1990년대부터는 위장우파가 시위와 선거와 대중매체를 통해 마음껏 활개 치기 시작했다. 법률은 떼법의 하인이 되었고 헌법은 국민정서법의 하녀가 되었다. 법치지수가 20년간 거의 나아진 게 없다.
    경제 부문에선 법률이 잘 지켜지지만, 정치 부문에선 법률이 도무지 지켜지지 않는다. 대통령은 하나같이 정치 사면을 남발하여 법을 준수한 대다수 국민을 조롱하고, 입법부는 어깨와 주먹, 공중부양과 고함의 면책특권으로 법을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사법부는 심심하면 북한과 관련된 것이면 악착같이 찾아내어 과거에 스스로 내린 판결을 뒤집어 정의를 거꾸로 매단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선 위장우파의 가면을 벗고 노골적으로 친북좌파의 생얼을 드러냈다.

    마침내 국민이 눈에서 경계의 빨간 불을 키기 시작했다. 노무현 정부 후반기부터 국민은 크고 작은 선거에서 친북좌파를 모조리 응징했다. 방송과 인터넷에서 아무리 히스테리를 부려도 국민들은 김대중당과 노무현당에는 일부 지역을 제외하곤 여지없이 철퇴를 가했다. 드러난 친북좌파를 상대하기는 상대적으로 쉬웠던 셈이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우파 정당에 들어가기만 하면 국민과 보수언론이 우파로 인정해 주는 허점을 이용하여 위장우파가 멀뚱멀뚱 팔짱을 끼고 지켜보고만 있다가 자신이 기여한 바가 전혀 없는 우파 정당에 속속 들어가서 아예 그것을 접수해 버렸다.

    청와대도 국회도 사법부도 위장우파가 의사소통이니, 화해니, 여권 안의 야당이니 하면서 주도권을 쥐고 있다. 그들이 구체적으로 누군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들은 가면을 안 벗는다. 행동과 정책으로 정체를 드러내지만, 국민들은 긴가민가하면서도 계속 속는다. 알아도 도대체 표를 줄 집단이 안 보인다.  

     위장우파였음을 스스로 인정한 자는 이부영과 손학규 정도이다.
    한나라당에선 원희룡, 이재오 정도가 위장우파임을 행동과 정책으로 잘 보여 준다.
    청와대에선 김정일에게 극존칭을 쓴 외교부 장관 김성환이 심히 의심스럽다.  

     대한민국은 결정적인 순간에 위장우파에 의해 반 동강 나고 폐허가 될 것이다. 등에 비수가 꽂힐 것이다.
    대한민국이 쥐도 새도 모르게 어뢰 한 방에 두 동강 나서 가라앉은 천안함처럼, 또는 벌건 대낮에 북괴로부터 폭격 당해 무인도로 변하는 연평도처럼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위장우파를 속출해서 전선(戰線)을 분명히 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