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우치다 日영사 회고.."본국 통신 차단..'왕비행방 모른다' 보고""대원군 당일밤 주저..억지로 선두에 세우고 조선인 살해하도록 꾸며""일본인이 피묻은 칼들고 경성거리 걷는 것 외국인도 봤을 것"
  • 정확히 115년전 오늘. 명성황후가 일본인의 손에 의해 살해되는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그 정확한 사건과 경위에 대해 여러가지 설이 분분한 가운데, 우치다 사다즈치(內田定槌)의 회고록 ’부임지 주요사건 회고’에는 명성왕후 시해를 주도한 일본 미우라 고로(三浦梧樓) 공사가 사건을 조직적으로 은폐하려고 한 사실이 생생히 기록돼있다.

    또 일본측이 이번 사건을 ’조선인이 주도한 살해사건’으로 가장하기 위해 대원군을 앞세워 왕성으로 들어가려고 했으나 대원군이 주저했다는 내용과 일본으로 소환된 시해사건 가담자들이 무죄로 방면된 과정도 담겨있다.

    1865년 후쿠오카(福岡縣) 코쿠라(小倉)에서 태어난 우치다는 1889년 외무성에 입부한 외교관으로, 1893년부터 영사의 신분으로 경성에 근무했다. 우치다는 1939년(소화 14년) 작성한 회고록에서 “재임 중 나의 경험 가운데, 세상에 그다지 알려지지도 않았고 또한 후세에 역사로 남지도 않을 것 같은 일이 있는 바, 이에 관한 기억들을 적어보려 한다”고 밝혔다.

    ◇ 미우라 공사의 은폐시도 = 1895년 10월8일 새벽. 영사관에서 지내던 우치다는 총성에 잠을 깼다. 피묻은 칼을 든 무리들이 “어젯밤 궁에 침입해 왕비를 죽였다”고 보고하는 모습을 보게된다.

    곤혹스러워진 우치다는 공사를 만나면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있을 것이란 생각에서 공사의 방으로 달려갔는데, 공사는 방에서 등불을 밝힌 채 절을 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일이 발생했다”고 보고하자 미우라 공사는 “조선도 드디어 일본의 것이 됐다. 이제 안심이다”라는 반응을 보였다.

    이미 조선인은 물론 외국인들도 일본인이 피묻은 칼을 듣고 대낮에 거리를 걷고 있는 모습을 본 상황이었다. ’일본인이 이 사변에 관계한 것을 숨길 수 없다’며 어떤 방법을 강구하면 좋겠느냐고 묻자 공사는 ’나도 지금 그것을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느긋한 모습을 보이던 미우라도 사실을 알고 달려온 러시아 공사가 다녀간 뒤에는 걱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외무성에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에 본국에 전보를 치려한다. 그러나 이미 전신은 공사관의 명령으로 금지돼 있었다. 결국 영사관보인 호리구치(堀口)에게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설득해 이같은 사실을 일본 정부에 보고토록 했다.

    ◇ 대원군 사건당일 밤 주저, 비참한 명성황후 시신처리 과정 = 나중에 사건의 전모를 알아보니까 사건을 꾸민 이들은 ’국왕의 부친이자 왕비와는 견원지간인 대원군’을 끌어들이는 게 좋다고 판단 하에 대원군을 끌어들이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직접 호리구치가 대원군의 집으로 가 필담(筆談)을 나누며 그의 동의를 얻어낸다.

    이들은 한밤중에 일본 병사와 경찰관이 대원군을 선두에 세우고 궁에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도록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사건당일 밤이 되자 대원군이 주저한다. 호리구치가 직접 저택에 가서 대원군을 재촉해보지만 꾸물거리는 이미 날이 밝기 시작한다. 결국 대원군을 억지로 끌어내 궁으로 향하지만, 이들이 궁에 도착했을 때 호위병들이 발포해 저항했다고 회고록은 전한다.

    일당들은 이를 물리치고 궁안으로 들어가지만 궁녀들이 많이 누워있어 누가 왕비인지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다만 다른 여자들의 비호 속에 도망가는 여인이 있어, 그가 왕비라고 생각해 살해한다.

    사체 처리 과정도 잔혹했다. 명성황후의 사체는 처음에 뜰 안의 우물에 던져졌다. 그러다 죄가 탄로날 것을 두려워한 일당들은 다시 궁 안의 소나무가 많은 벌판에서 석유를 뿌려 태웠다고 한다. 그러고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이튿날 사체를 연못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좀처럼 가라앉지 않자 다시 꺼내 소나무 벌판 가운데에 묻었다고 전한다.

    ◇ 범인들의 무죄 판결 = 미우라 공사로부터 ’어젯 밤 왕성에서 변이 있어 왕비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보고만 받았던 일본 측은 호리구치의 보고서로 사건의 전말을 파악하게 된다. 깜짝 놀라 수습책을 마련하기 위해 코무라(小村) 정무국장이 직접 조선으로 건너온다.

    코무라 국장은 이 사건은 일본에서 처분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관계자들을 모두 일본으로 보낸다. 직접 사건과 관계된 민간인 47명을 일일이 불러 조선 퇴거명령을 전달했는데, 이들은 모두 크게 감사를 표하며 기뻐했다고 전한다.

    일본에 도착한 이들은 히로시마 지방재판소에서 재판을 받게 되지만 모두 무죄판결을 받고 풀려난다. 왕비 살해자는 조선인으로 결정돼 이미 사형에 처해졌으므로 일본 재판소가 사건을 심리할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회고록을 입수한 최서면 국제한국연구원장은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직접 지휘한 미우라가 사건을 감추려 하지만 우치다의 보고로 본국에서도 알게됐다”면서 “그럼에도 일본은 이들을 재판에서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무죄판결을 내렸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이어 “일본 외교관이 내부에서 고발한 구체적 이야기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판결을 내린 것은 일본의 파렴치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태진 국사편찬위원장은 “당시 우치다가 지방출장 중이었던 이유도 있었지만 그의 성향 때문에 미우라가 그를 아예 계획에서 빼버렸다”면서 “우치다는 동학농민운동에 관한 현지 조사 보고서도 작성하는 등 재조선 일본 공사관 내에서도 양심적으로 일을 하려는 인물에 속한다”고 평가했다.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