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대용 전 주월공사 ⓒ 뉴데일리
    ▲ 이대용 전 주월공사 ⓒ 뉴데일리

    1950년 10월 26일 새벽, 제6사단 7연대 1중대 이대용 대위는 대원들을 이끌고 압록강에 도달했다. 도착 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압록강에 군화를 적시는 것. 손목시계를 내려다 보며 그는 뒤따르는 대대장에게 무전을 보낸다. “제6사단 7연대 1중대, 2시 15분 압록강 도착”. 10월에 불과했지만, 하늘에서는 하얀 눈발이 휘날리기 시작했다. 전시(戰時)의 첫 눈이었다.

    그로부터 6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22일 서울 중구에서 만난 이대용 장군은 “당시, 압록강까지 북진했던 것을 우리 부대 밖에 없었다”라며 “이제 ‘남북통일’이 이뤄지는구나 생각했다”고 당시를 추억했다.

    1925년 황해도 금천에서 태어나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하고, 6.25와 베트남 전 최전선에서 싸운 그는 뼛속까지 군인이요, 격변의 시대를 몸소 겪은 우리 역사의 산 증인이다.

    ◆ 좌익 친북 성향…내부의 적(敵) 너무 많아

    지난 밤, 수화기 너머로 “6.25 전 젊은이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진중한 목소리를 전한 그는 이날 자리에 앉자마자 깊은 한숨부터 내쉬었다.

    그의 죽마고우이자, 카이스트 교수였던 故 이병호 박사는 철저한 반공(反共)주의자였다. 일제강점기 이 박사의 아버지는 3.1 운동을 벌이다 옥살이를 했고, 그는 아버지의 신분이 발각 돼 만주 건국대(일제 식민지 통치 관리 양성소)의 입학이 취소된 채 평양 대동공전(김일성대학교 공과대학)에 들어갔다.

    이후, 그는 일본의 철저한 감시 하에 결국 5년간 징역을 살기도 했다. 6.25 전이 발발하고 전남 목포로 오게 된 그는, 그곳에서 이화여대 출신이자 전남 목포 여고의 여선생과 만나 결혼하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 역시, 6.25 전쟁에 목숨을 희생당했다.

    그런 그가 홀로 하늘로 떠나간지 7년여의 세월이 지났다.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 현재 카이스트의 교수로 있고, 방송 작가인 부인과 함께 두 딸을 키우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고등학교에 다니던 둘째 딸은 할머니를 찾아 이런 말을 했다. “6.25가 미군이 북한을 침입하라고 지시해서 일어난 거래요”. 순간, 그녀는 기가 막혀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걸까. 우리 아이는 어떻게 이처럼 왜곡된 역사관을 갖게 된 것일까. 결국, 이야기를 출처를 따라가니 그 끝엔 전교조가 있었다.

    바로, 이것의 우리나라의 현 주소다. 이대용 장군은 “가슴이 답답해서 참을 수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야말로, 국가 위기의 상황이다. 참여연대를 비롯한 60여개에 달하는 좌익 친북(親北) 성향의 단체들과 사회 곳곳에 숨어들어 있는 2400여명의 핵심 공산주의 인물들. 우리에게는 내부의 적(敵)이 너무나 많다.

     ◆ 北의 변함없는 염원 '적화통일'…여야(與野) 단합해 안보 사수해야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현재, 천안함 사태를 둘러싼 대립관계가 어쩌면, 평화통일의 기틀을 마련해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그는 “우리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점에 놓여져 있다”며 “6.25 참전용사로서 감회가 남다르다”고 전했다.

    지난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열린 제5차 고위급회담에서 남북한이 화해 및 불가침, 교류협력 등에 관해 공동 합의한 ‘남북기본합의서’가 발휘됐다. 남북한이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군사적 침략이나 파괴, 전복행위를 하지 않으며 상호 교류 협력을 통해 민족 공동 발전과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한다는 것이 골자다.

    그러나,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에서 탈퇴한 이후 남북 관계가 경색되면서 합의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다. 이후 1998년 이산가족 상호 방문 성사와 함께 2000년 6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양 방문으로 '6·15공동선언'이 채택되면서 남북 화해 분위기가 다시금 조성되는 듯 보였으나, 지금은 어떤가.

    이 장군은 “북한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게 없다.”며 “그들의 염원은 오직 ‘적화통일(赤化統一)’ 뿐이다. 천안함 역시 하나의 증거다.”라고 말한다. 그는 “역사적 사실로 비춰볼 때, 우리와의 모든 약속을 어겨온 그들의 속성은 앞으로도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 그는 “남측의 가장 큰 문제가 내부적인 결속이 되지 않는 다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 이 장군은 “국가 안보가 무너져 내렸다”며 혀를 찼다.

    안보란, 다름 아닌 ‘안전보장’의 줄임말이다. 그는 이것이 “국가 최고의 가치”라 말한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은 사회의 경제와 인권, 국제 사회는 어떤 의미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안보만큼은 여야(與野)가 하나로 뭉쳐야 한다. 안보만큼은 국민 모두 한 뜻이 돼야만 한다.

    이 장군은 “외부의 적은 얼마든지 막을 수 있지만, 내부의 적은 뿌리 뽑지 않으면 막아낼 수 없다. 제대로 가려내기 조차 힘든 것이 사실이지만, 이를 해결하지 않으면 결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내부의 친북 세력에 대한 경계심을 나타냈다. 그의 표현대로 이는 마치 ‘몸 속 세균’과 같은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국가 안위를 위해하는 이들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강경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한 나라를 위한 ‘정신전력(精神戰力)’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싸우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모두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다.

    힘을 동반하지 않은 사회와 문제, 경제는 하루아침에 사멸될 수 있다고 말하는 그는 “북한이 ‘되로 주면 말로 받는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지 않으면 제2의 천안함 사태가 언제 다시 일어나게 될지 모른다”고 말한다. 즉, 우리 국민들의 마음을 한데 모아 국력(國力)을 키우는 것 만이 스스로를 안전을 지켜내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 장군은 “호국영령들의 뜻을 받들고, 국가 안보 정신전력에 외부 에너지를 한데 뭉치면 분명 지금의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또한, 그는 국가 안보 의식을 높이기 위해 정부에서 학교가 이를 교육하도록 정책을 새로이 해 줄 것을 당부했다. 지금 당장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1990년대 이후 학교 교육을 받아온 이들이 ‘남북우호’라는 명명아래 6.25와 반공에 대한 올바른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또 다시 현 시대와 마찬가지로 북과의 경계태세에 놓이게 될 때 야기될 수 있는 문제는 지금의 것과 비교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대용 전 주월공사는 어떤사람?>

    1925년 황해도 금천 출생. 1948년 육군사관학교 제7기 졸업. 1955년 육군대학 졸업. 1958년 미 태평양지구 합동참모학교 졸업. 1960년 미 육군 지휘참모대학 졸업.

    제6관구 작전 부사령관. 주월 한국대사관 무관. 주월 한국대사관 경제담당 공사. 예비역 준장. (현) 육군사관학교 총동창회 명예회장.

    저서로 '압록강에서 대동강까지', '압록강 푸른물', '통곡하는 승리자', '사이공 억류기', '국경선에 밤이 오다', '김정일과의 악연 1809일', '6 25와 베트남전 두 사선을 넘다'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