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하트마 간디는 인도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옷깃을 여미고 우러러보는 큰 바위 얼굴이다. 20세기의 성인(聖人)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인이었다면, 인도판 악질 친일파로 인간쓰레기 취급을 받아 외국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독립운동도, 민주화 운동도, 환경 운동도,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에서 대학교 꽹과리 운동에 이르기까지 운동이란 운동은 모조리 자신들이 다한 것처럼 마녀몰이 나팔을 불어대는 자들의 잣대에 따르면, 간디는 안중근이 쏜 정의의 총에 맞아 숨진 이등박문보다 극악한 인간일 것이다. 대영제국에 대해 간디가 진심에서 우러나와 바친 말과 행동이 마을과 들판을 온통 휩쓸고 지나간 홍수라면, 일본군 초급 장교나 나약한 글쟁이가 큰 칼 한 번 찬 것이나 씩씩한 시 한 줄 쓴 것은 오돌오돌 떨면서 그 홍수에 오줌 한 줄기 보탠 것밖에 안 된다. 

     간디는 비폭력 평화운동으로 널리 알려져서, 유년 시절부터 세계적 성인의 반열에 오른 노년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현실타협적이었는지, 친영적(親英的)이었는지 한국인에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사실 인도인은 누구나 그것을 알고 있지만,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인도 독립의 목적을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고, 그 수단이 위대한 목적에 조금도 누가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간디는 세 단계의 성장 과정을 거친다. 첫 번째는 오로지 훌륭한 영국 시민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출세밖에 몰랐다. 모든 인도인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귀족 출신으로 꽃마차를 타고 그는 영국으로 유학 가서 변호사가 되었다. 남아프리카에 개업하러 가는 길에 기차의 1등석에 앉아 있다가 3등석으로 쫓겨나면서, 비로소 그는 자신이 대영제국의 위대한 시민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위인전에는 이때부터 간디는 오로지 인도 독립을 위해서 리바이어던 대영제국에 무저항과 비폭력으로 사사건건 반대하는 것에 몸과 마음을 다 바친 것으로 나온다. 천만에! 1899년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영국 군인의 옷을 입었다. 그것도 자진해서 1,100명의 인도인으로 의무대(醫務隊)를 만들어 보어전쟁에서 영국이 이기는 데, 크게 도움을 준다. 인도인의 끈기를 발휘하여 아프리카의 땡볕 속에서도 부상당한 영국군을 들것에 싣고 하루에 30km 내지 40km를 생색 한 번 안 내고 걸었다. 그렇게 그는 인도인을 끌어 모아 ‘사탄의 제국, 식민모국’ 영국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런던에 있던 간디는 버선발로 전쟁청으로 달려간다. 유창한 영어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맹세코, 곤경에 처한 영국을 지지하여 인도인 의병을 만들겠습니다. 늑막염이 아니라면, 제가 지휘하겠는데, 참으로 유감입니다.”
    1915년 인도로 돌아와서는 인도인들 앞에서 간디는 선언한다.
    “저는 대영제국이 제가 사랑에 빠졌던 어떤 이상을 갖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I discovered that the British empire had certain ideals with which I have fallen in love...." ) 

     적의 장점을 솔직히 인정하는 간디의 이 연설에 감명 받아, 그것이 인도 독립을 위한 길이라며 무려 150만 명의 인도인이 자진해서 아프리카와 중동에서 피를 땀처럼 흘리면서 영국의 원수인 독일과 터키를 상대로 싸우고 또 싸웠다. 유럽에서도 싸웠다.

     간디는 이렇게 제2의 성장기를 보냈다. 대영-인도제국 안에서 상대적인 자치를 누리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완전독립은 여전히 꿈도 꾸지 못했다. 시기상조로 보았다. 200년 피지배 굴욕이 조금 더 길어진다고 해서 인도의 자존심이 더 상한다고 보지 않았다.
    1차세계대전 후 영국은 인도인으로부터 군사적 경제적 도움을 크게 받았지만, 간디와 인도인이 원하는 만큼 자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배신당한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독립운동은 이때부터 본격화된다.
    그러다가 제2차세계대전을 맞는다. 간디는 즉시 독일과 이태리와 일본의 파시즘에 반대한다고 선언한다. 세계전쟁을 맞이하여 다시 영국 편에 선 것이다. 그럼에도 인도 총독은 조급증을 발휘하여 간디와 네루가 이끄는 인도의 국민회의에 충분한 동의를 구하지 않고, 인도 군대에게 ‘전쟁 앞으로!’를 명령했다. 이에 간디와 네루가 반발했다. 그래서 그들은 감옥에 갇혔다. 

     제2차세계대전을 맞이하여 인도는 세 가지 의견으로 갈라졌다. 
     첫째는 간디의 의견으로, 영국 편에 서서 인류의 적인 파시즘과 싸움으로써 인도의 완전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간디의 세 번째 성장 단계이다. 간디는 전쟁에 휩싸인 영국이 인도를 독립시켜 줄 여력이 없다고 보았다. 영국이 어려울 때 도와주자고 주장했다.

     둘째는 네루의 의견으로, 파시즘에 반대하여 자유를 주장하는 것은 옳지만, 영국은 인도에게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영국 여왕의 인종차별이나 독일 총통의 파시즘이나 마찬가지다. 그 놈이 그 놈이다. 따라서 인도는 팔짱 끼고 둘 다 망하기를 기다렸다가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셋째는 보세의 의견으로, ‘적의 적은 친구’라는 입장에서 영국의 또 다른 원수인 군국주의자 일본과 손을 잡고 인도 본토로 쳐들어가 독립을 쟁취하자는 것이었다. 인도지나반도에서 일본군에게 패배한 영국군 휘하의 인도군은 보세의 지휘 하에 인도국민군으로 이름을 바꾸어 영국군 휘하의 인도군과 맹렬히 싸웠다.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250만에 이르렀던 영국군 휘하의 인도군은 영국인 장군과 인도인 장군의 지휘를 받아, 영국이 소속된 연합군 편에 서서 성심성의를 다해 싸웠다.
    결국 일본을 인도지나반도에서 몰아냈다. 인도양을 지켰다. 인도를 지켰다. 간디의 뜻을 따른 것이다. 간디가 옳았다. 영국은 크게 감동 받았다. 그리고 250만 대군으로 커진 인도군이 두려웠다. 1947년 영국은 인도를 완전 독립시켜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인도인이라고 하여 제국주의자 영국에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이 있었을 까닭이 없다. 거기서도 친영파를 향하여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없었을 리 없다. 영국-인도 군대는 돈밖에 모르는 반(反)인도 도당이라고 욕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찍이 영국군에 투신하여 1차대전의 영웅으로 떠오른 장군 루드라는 큰 고민을 안고 간디를 찾았다. 그는 인도 독립의 운동이 고조되는 때에 과연 자기가 계속 영국-인도군에 몸을 담고 있어야 되는지 진지하게 물었다. 간디는 즉답을 피하고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렇게 답했다.
    “우리는 가난하고 못 배우고 군대도 없는 국민입니다. 우리는 결코 대영제국과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저는 영국인을 압니다. 그들이 (언젠가는) 우리를 명예롭게 대할 겁니다. 때가 무르익고 우리의 대의명분이 옳고 우리나라가 준비가 되면, 그들은 우리에게 큰 접시에 자유를 담아 줄 겁니다. 아지트 루드라여, 그러면, 우리가 자유로운 나라가 될 그 때, 우리는 군대가 필요할 겁니다.”
    “We are a poor, uneducated, unarmed people - we can never fight the British. But I do not
    despair. I know my Englishman. He will deal with us honourably. When the time is ripe and if our cause is a righteous one and if our country is ready for it, he will give us our freedom on a platter. And, then Ajit, when we are a free country we shall have to have an Army." 

     이처럼 간디는 그릇이 컸다. 시냇물이 아니었다. 강도 호수도 아닌 바다였다. 
     폭력에 바탕을 둔 군대와 간디의 핵심 사상인 비폭력은 단순 논리에 따르면 양립이 불가하다. 그러나 간디는 네루 같은 철부지가 아니었다. 독립에 즈음하여 인도의 장군들이 네루한테 군대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수상 네루는 일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내질렀다.
    “군대는 쓰레기야. 쓰레기라고! 우린 비폭력을 사랑해. 우리한테는 경찰만 있으면 돼!”
    다행히 파키스탄의 침략으로 인도 대군은 살아날 수 있었다. 간디는 카시미르에 군대를 보내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시종일관 모든 전쟁에 반대했지만, 파키스탄으로부터 정의를 얻을 딴 방법이 없다면, 파키스탄이 입증된 자신들의 잘못에 직면하길 부득부득 거절한다면, 계속해서 그 잘못이 아무 것도 아닌 양 우긴다면, 전쟁이 정부에게 남은 유일한 선택이 될 것입니다.”
    "While I have always been an opponent of all warfare if there is no other way of securing justice from Pakistan, if Pakistan persistently refuses to see its proved error and continues to minimize it, war would be the only alternative left to the government." 

     1947년 또 다른 장군 카리아파가 비폭력과 군대 문제에 대해 간디에게 물었다. 비폭력을 강조하면서 군대를 이끌 수 없다는 고민을 털어놓았다. 간디는 이번에도 즉답을 피했다.
    “저 역시 어둠 속에서 그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헤매고 있습니다. 언젠가 답을 찾으면 알려 드리겠습니다.”

     실은 1928년에 그는 이미 답을 얻었다. 간디는 이렇게 썼던 적이 있다.
    “만약 (독립된) 국민 정부가 있다면 나는 어떤 전쟁에도 직접 참가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군사 훈련을 시키는 것에 찬성함이 내 의무가 될 경우는 상정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믿는 정도로 비폭력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개인이나 사회를 강제로 비폭력적인 개인이나 사회로 만드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간디는 그 뜻이 하늘처럼 높고 바다처럼 넓었지만, 이처럼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비겁한 자의 결벽증이 없었다. 어리석은 자의 조급증이 없었다. 저열한 욕망을 숭고한 명분으로 포장하는 위선 증후군이 없었다. 천 리 길을 단숨에 달리려다가 한 나절도 안 되어 폭 꼬꾸라지는 바보가 아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절대 좌절하지 않고, 절대 목표를 잃지 않고, 때로는 우회하고, 때로는 쉬어가며, 때로는 뒷걸음도 치면서, 때로는 사람들의 손가락질도 받으면서 짚신을 신어도 좋고 맨발도 좋고 완전 독립의 아스라한 길을 향하여 평생 뚜벅뚜벅 미련한 황소처럼 걸어갔고 마침내 생전에 독립을 쟁취했다. 200년 만의 위업이었다. 

     인도인은 이런 간디를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마하트마(위대한 영혼)라고 부른다.
    10억 인구 중에 단 한 명도 간디보고 인도판 악질 친일파라고 손가락질하지 않는다.
    10억 중 단 한 명의 좀생이도 없다. 한국인도 간디는 하나같이 존경한다.

    그러나 간디는 하늘처럼 높이 받들면서 그에 비하면 친일이라는 것이 바다 위의 좁쌀 하나에도 못 미치는 반세기 전의 사람들을 향해서, 그들이 후에 대한민국에 조금이라도 공헌을 세웠다 싶으면 특히 세계가 놀라는 위대한 업적을 쌓았다 싶으면, 제 부모를 살해한 원수인 양 10년이고 20년이고 30년이고 물고 늘어진다. 그러면서 세계 10대 선진 부국에 고철 한 조각 보탠 것 없이 폭포수 입과 무지개 말만으로 그들은 노동자농민의 머리 위에 새 귀족의 잔치 상을 차려놓고 회장 보이와 사장 호스티스의 시중을 받으며 황금 잔에 명예의 향기를 철철 담아 연신 러브 샷을 외치며 대낮부터 마셔대고 은수저로 부의 산해진미를 마음껏 퍼 먹는다. 

     세계 어떤 나라의 법률보다 훌륭한 대한민국의 법률 어김을 가문과 패거리의 무한 영광으로 생각하여 공중부양과 이단옆차기와 도끼 휘두르기의 무법천지를 만든다. 그러면 법의 수호자는 요설을 늘어놓으며 이들에게 기각의 면죄부를 발급한다.
    그러는 한편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일제보다 수십 배 아니 수백 배 가증한 김씨공산왕조의 대를 이은 60년 공포 정치와 약탈 경제와 억압 사회와 야만 문화에 대해서는 한없는 인내심과 포용력을 발휘한다. 한쪽에선 독특한 양비론으로 물 타기 하고, 다른 쪽에선 특이한 정통론으로 마교의 교주를 찬양한다. 나같이 곰처럼 미련한 사람의 눈에도 그들의 본심이 훤히 보인다. (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