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년 전 오늘, 朴正熙 대통령이 金載圭의 총탄을 가슴과 머리에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가장 정확하게 관찰한 사람은 申再順 여인이다. 그는 필자에게 이런 증언을 남겼다.
     
     “그 날 밤 대통령께서는 좀 취하셨던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몸을 가누지 못하시거나 말이 헛나올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인자한 아버지 같았어요. 피를 쏟으면서도 ‘난 괜찮아’라는 말을 또박또박 했으니까요. 그 말은 ‘난 괜찮으니 자네들은 어서 피하게’ 하는 뜻이었습니다. 一國의 대통령이니까 역시 절박한 순간에도 우리를 더 생각해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분의 마지막은 체념하는 모습이었는데, 허무하다기보다는 解脫(해탈)한 모습 같다고 할까요. 총을 맞기 전에는 ‘뭣들 하는 거야’라며 화를 내셨지만, 총을 맞고서는 그 현실을 받아들이겠다는 자세였습니다. 어쨌든 일은 벌어졌으니까요.”
     
     朴 대통령의 피살은 그로선 불행한 일이었으나 국가와 역사의 입장에서는 꼭 그러하였다고 볼 수 없다. 10.26 사건은 朴 대통령의 위대한 리더십으로도 해결할 수 없었던 몇 가지 모순을 해결하였다. 정권의 교체가 이뤄졌고, 새 정권은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1980년대의 活況期를 열었으며, 이 덕분에 민주화 과정도 공동체의 틀을 깨뜨리지 않는 범위안에서 관리될 수 있었다. 朴 대통령이 10년을 더 살았다고 하였을 때 그런 발전과 변화가 가능하였겠는가? 나는 부정적이다.
     
     무엇보다도 朴正熙 대통령의 죽는 모습이 좋았다. 超人처럼, 英雄처럼 죽었다. 가슴에 총탄을 맞고도 "난 괜찮아"라고 또박 또박 말하면서 죽었다. 그 장면을 신재순씨가 촬영하듯이 목격하여 증언함으로써 우리는 죽음의 美學, 남자의 美學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박정희의 運命이 마지막 순간의 증언자로서 신재순씨를 불러다가 그 자리에 놓은 것이란 생각이 들 정도이다.
     
     朴正熙의 死後 30년 그는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민족사의 最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이런 높은 평가는 지식인들이 아닌 서민들의 主導에 의하여 이뤄졌다. '5000년 가난의 恨을 해결해주신 분'이란 말 한 마디 앞에서 그에 대한 識者層의 비난은 無力化되고 만다.
     
     박정희의 화려한 復活은 두 사람의 기여 없이는 불가능하였다. 李承晩과 全斗煥. 이승만의 農地개혁, 교육확충, 韓美동맹이 근대화의 기관차가 달릴 수 있는 궤도를 깔았다. 전두환의 事後수습과 경제안정과 민주화 조치(單任, 改憲)가 있었기에 박정희의 유산은 보존, 계승, 발전될 수 있었다. 그는 前任者와 後任者를 잘 둔 분이다.
     
     그는 이승만과 함깨 자기성공의 희생자였고 김정일은 김일성과 함께 자기실패의 受惠者이다. 한국인의 幸運은 박정희 죽음의 타이밍이었고, 북한사람들의 不幸은 김일성의 長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