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5일자 오피니언면 '에디터칼럼'에 이 신문 심상복 경제부분 에디터가 쓴 <'전설의 고향'을 보았던가>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가대하며 소개합니다.

    친구가 “비 오는 날 밤 공동묘지에서 귀신을 봤다”고 하면 당신은 뭐라고 대꾸하겠는가. “이 사람, 싱겁긴. 요즘 세상에 귀신이 어딨어?”라며 무시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같은 귀신 얘기를 공신력 있다는 어느 방송이 했더니 세상이 뒤집어졌다.

    방송의 귀신 보도는 배경음악부터 음산하게 깔고 시작됐다. 카메라는 멀리서 소복 입은 여인을 잡았다. 입술은 붉은 것이 선혈 같았다. 이어 방송은 귀신이 사람을 홀려 묘지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러곤 결정타를 날렸다. 한국 사람은 귀신에 잘 홀릴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고.

    설마 했던 시청자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귀신에 잡혀갈지 모른다는 공포가 자라났다. 그때 사람들의 약해진 마음을 비집고 드는 부류가 있었다. 그들은 처녀가 귀신에게 끌려갔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난 이제 겨우 열다섯 살이에요. 더 살고 싶어요”라는 여학생의 절규가 이어졌다. 사회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공포가 기하급수적으로 확대재생산되면서 나라가 뒤집어졌다.

    나는 지난 두 달간 미국 쇠고기를 놓고 벌어진 이 땅의 소요를 귀신이 주인공인 ‘전설의 고향’에 비유하고자 한다. 예로부터 귀신 얘기는 많았지만 확인된 건 하나도 없다. 마찬가지로 지금껏 미국 쇠고기를 먹고 인간광우병에 걸린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 핏빛 입술에 소복 입은 여인도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빨간 립스틱에 흰옷을 입고 그냥 밤거리를 가던 여자였다. 방송이 광우병 소인 양 수없이 틀어댄 그 소는 다른 원인으로 인해 걷지 못하던 소였다.

    귀신이 사람을 묘지 속으로 끌고 들어갔다던 얘기도 사실과 달랐다. 아파서 죽은 것이지 귀신과는 관계가 없었다. 사망한 미국 여성은 인간광우병과는 무관한 것으로 확인됐다. 논문을 인용해 귀신에 잘 홀릴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던 대목은 논문 저자에 의해 부정되었다. 방송 직후 괴담을 생산하고 퍼 나른 이들은 방송과 죽이 잘 맞는 일군의 무리들이었다. 그 덕에 이 개명천지가 보기 좋게 귀신에게 농락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사람들, 이제 참 허탈하게도 생겼다. 미국 쇠고기를 먹으면 뇌에 구멍이 송송 뚫린다고 그토록 목이 터져라 외쳤건만 헛수고였다. 국민 건강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했건만 미국 쇠고기를 파는 정육점 앞에는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는 것이다.

    이제 쾌재를 불러도 될까. 천만의 말씀이다. 난 더 큰 자괴감만 느낄 뿐이다. 이 귀신 소동에 대해선 온 나라가 참담함을 느껴야 할 것 같다. 엄청난 싸움이 벌어졌지만 승자는 아무도 없다. 져도 적당히 진 게 아니다. 모두들 참혹하게 패했다. 사회 지도층도, 서민도, 국회도, 대통령도, 언론도 마찬가지다.

    “무슨 헛소리야. 여기 승자가 있잖아.” 일군의 무리들은 이렇게 주장할지 모른다. 보수 집단에 치명타를 먹였다고. 그러나 좋아하긴 이르다. 침묵하는 다수는 이번에 그들의 소름 끼치는 ‘작전’을 똑똑히 보았다.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뻔뻔함도 목격했다.

    악성 소문이 어떻게 생성되는지도 확인했다. “더 이상 이명박의 개 노릇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저들은 시민을 개 패듯 패라고 명령했습니다.” 전경을 가장해 인터넷에 이런 글을 올린 대학 강사가 붙잡혔다. 그들의 이런 선전전에 또 속을 사람은 이제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들 역시 패자다. 그들의 패배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중앙일보도 적으로 여긴다. 보수신문이 좌파정권을 공격하는 바람에 10년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보수는 사회안정을 바라는 집단이다. 쇠고기를 먹고 사람들이 픽픽 쓰러지고, 나라가 패닉(공황) 상태에 빠지는 걸 결코 원치 않는 사람들이다. 그런 상황을 누구보다 걱정하는 이들이 보수다. 그런데도 진보를 가장한 그들은 역선전을 퍼뜨렸다.

    나는 그들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비난하지 않는다. 갈등과 사회불안을 조장하기 때문에 문제 삼는 것이다. 그들은 없는 사실을 지어내 공포를 부추겼다. 국민 건강을 내세우고 있지만 명분일 뿐이다. 많은 국민이 걱정했던 30개월 이상 쇠고기는 추가 협상을 통해 들여오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그들의 평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어떤 결과물을 내놓아도 그들의 주장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신들이 원하는 정권을 세우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