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아일보 21일자 칼럼인 이재호 논설실장의 <그게 다 상호주의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對北) 상호주의에 대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그제 제13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출범식에서 한 연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상대방이 하는 대로 우리도 똑같이 대응해야 한다는 상호주의로는 위기의 반복과 대결 구도밖에 얻지 못한다”고 했는데 본질을 왜곡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준다.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감정적 대응을 앞세우는 경박한 상호주의로는 (북핵 문제를) 풀 수 없다”고 한 대목도 마찬가지다. 

    상호주의(reciprocity)의 사전적 의미는 ‘상대방이 나에게 하는 것만큼 나도 상대방에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미국이 우리 국민에게 입국 심사를 까다롭게 하면 우리도 미국인에게 그만큼 까다롭게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상호주의는 모든 국제 관계의 기본이다. 그렇다고 해서 상호주의를 ‘하나를 주면 반드시 하나를 받아야 하는 것’처럼 기계적으로 이해 할 필요는 없다. 상호주의는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적용되기 때문이다.

    대칭적 상호주의와 비(非)대칭적 상호주의가 대표적인 예다. 전자가 1 대 1의 주고받기 식이라면 후자는 서로의 형편에 따라 차등을 두는 방식이다. 남북관계가 그런 경우에 속한다. 양(量)과 질(質)을 기준으로 나눌 수도 있다. 양의 상호주의보다 질의 상호주의가 더 합리적이겠지만 계량하기 어렵다는 난점이 있다. 적용의 ‘폭’을 기준으로 해서 대(大)상호주의와 소(小)상호주의로 분류하는 학자도 있다. 전자가 큰 틀에서 이뤄진다면 후자는 더 작은 틀에서 이뤄진다.

    盧대통령도 충실한 상호주의자

    관대함(tolerance)이 기준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지만 기왕 주기로 한 것이라면 그냥 줄 수도 있고, 안 줄 수도 있다. 속도와 타이밍의 상호주의도 있다. 예컨대 북한에 쌀을 지원할 때 1개월 안에 다 보낼 수도 있고, 6개월간 나눠 보낼 수도 있다. 춘궁기에 줄 수도 있고, 추수기에 줄 수도 있다. 시기는 북의 약속 이행 정도를 고려해 결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처럼 대북정책은 본질적으로 상호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게 돼 있다. ‘남북관계(關係)’라는 말 속에 이미 ‘상호(서로)’라는 의미가 내재돼 있다. ‘상호’가 없다면 ‘관계’도 없다. 노 대통령부터 충실한 상호주의자다. 작년 7월 북이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 즉각 대북 지원을 중단한 게 그 증거다. 올 4월 남북 경제협력추진위 회의에서 쌀 40만 t 차관 제공에 합의하고서도 북의 2·13합의 이행 여부를 지켜본다며 3개월이나 끌다가 최근에야 육로로 실어 보낸 것도 그렇다.

    결국 상호주의는 다 같은 상호주의인데 노 대통령이 말하는 상호주의는 ‘비대칭에, 좀 더 관대한, 큰 틀에서의 상호주의’이고, 한나라당이 말하는 상호주의는 ‘대칭에, 좀 더 엄격한, 작은 틀에서의 상호주의’일 뿐이다. 노 대통령은 후자를 가리켜 ‘경박한 상호주의’라고 조롱했지만 독선이다. 어떻게 자신의 상호주의만 선(善)이고 상대방의 것은 악(惡)일 수 있는가.

    노 대통령은 오히려 엄격한 상호주의자들에게 감사해야 한다. 그들의 감시와 견제가 없었다면 지난 4년간 북에 지원한 1조4246억 원보다 훨씬 많은 돈과 물자를 북에 퍼 주었을 것이고, 북의 핵무기 보유량도 덩달아 늘었을 것이다. 온돌방이 워낙 냉골이어서 한쪽에선 급히 불을 땠지만, 자칫 장판까지 태워 버릴까 봐 늘 조심하라고 그들이 주의를 줬기에 큰 화재 없이 이만큼 온 것 아닌가. ‘유연하면서도 원칙이 지켜지는 상호주의’가 정책으로서 훨씬 정합성이 있다고 믿는 이유다.

    햇볕정책의 허구(虛構)에 비춰 보아도 상호주의는 포기해선 안 된다.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이솝 우화에서 ‘햇볕정책’을 빌려 왔기에 나도 ‘우화적’으로 얘기하겠다.

    햇볕만 쪼이면 통일이 되는가

    햇볕, 햇볕 하지만 1년 365일 내내 햇볕이 내리쬐는 것은 아니다. 기상청에 따르면 서울지역 기준으로 지난 10년간 비가 온 날은 연평균 135.1일이다. 여기에다 흐린 날까지 합치면 햇볕이 나는 날은 연중 100일이 채 안 된다. 그렇다면 우산과 장화도 준비하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다. 대북정책도 마찬가지다. 언제든 상황에 따라 대응을 달리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상호주의다. 햇볕만 쬐이면 당장 관계가 좋아지고 통일이 되는가. DJ가 국민에게 그런 환상을 심어 주더니, 이제 노 대통령이 오도된 ‘상호주의 포기’를 외치며 그 뒤를 잇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