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2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신우 논설위원이 쓴 시론 '선동과 혁명의 산물'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이야기로 담아 남에게 들려주는 일을 해오다 보니 알게 모르게 수많은 사람들을 눈여겨 봐온 셈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는다면 주저없이 노무현 대통령을 꼽고싶다.

    필자가 노 대통령에게서 받은 가장 큰 인상은 그가 법조 출신임에도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법의식이 뒤틀려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토록 준법정신이 결여된 법조인이며 정치인도 드물 듯싶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대상이 국민이든 아니면 자신의 후임자든 상관없이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상대방을 법으로 묶어두려는 욕망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법을 경시하고 무시하려 드는 노 대통령의 성향은 그가 ‘자신의 무오류성’에 집착하고 있음을 입증해주기도 한다. 즉 자신이 틀렸다기보다 오히려 세상과 법이 잘못돼 있다는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이다.

    몇가지 예를 들어보자.

    노 대통령은 2일의 참여정부평가포럼 강연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공직선거법 위반이라고 결정하자 오히려 선관위 결정의 근거법인 공직선거법 제9조를 거침없이 공격하고 나섰다. “모호한 구성 요건은 위헌이다. 세계에 유례가 없는 위선적 제도”라는 주장이었다. 법을 위반해 놓고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 법의 잘못인 만큼 전혀 개의치 않겠다는 태도였다.

    하지만 대통령의 이같은 자세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는 2003년에도 권력자로서의 자신이 법마저 초월하고 있음을 과시하고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의 파업이 나라를 온통 흔들고 있었음에도 대통령은 “일시적인 폭력에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면서 툭하면 “법은 정당할 때 지키고 정당하지 않을 때는 지키지 않아야 한다”는 발언을 하기까지 했다.

    2004년 봄 선관위가 자신에 대해 선거법 위반 결정을 내리자 이때도 마찬가지였다. “사실과 다른 모함, 억지 주장에 밀려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무시한다”며 노골적으로 국가의 법체계를 깔아뭉개려던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정당할 때만 법을 지켜야 한다면 그럼 그 법이 정당한지는 누가 판단하는가, 국가와 법의 요구가 사실과 다른 모함이라 한다면 그것이 사실과 다른 모함인지는 누가 판단하느냐고 되묻는다면 어리석은 짓이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런 노 대통령이기에 정권이 바뀐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판단과 결정이 뒤집어지는 것은 결코 참을 수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기회있을 때마다 새로운 규제의 틀로 묶어두려는 성향을 보인다. ‘헌법보다 고치기 어려운’이라는 현 정부의 정책 표어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최근에도 노 대통령은 13일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임기가) 두 달이 남았든, 세 달이 남았든 내가 가서 도장 찍어 합의하면 후임 사장(대통령)이 거부 못한다”고 발언했다. 그래서 그것에 맞춰야겠다는 것이다.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기자실 통·폐합 문제에 대해서도 똑같은 자세다. “다음 정권으로 넘어가면 기자실이 되살아날 것 같아서 제가 확실하게 대못, 대못으로 대못질을 해버리고 넘겨주려고 한다.” 자기 임기 동안은 자기 맘대로지만 후임 대통령 역시 자기 마음대로 해야겠다는 무서운 독선 아닌가. ‘무한한 자기확대 욕구’의 노골적 표출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작가 김훈은 2002년 대선 직후 노 대통령의 출현에 대한 기성인들의 반응을 자신의 기자생활 마지막 기사로 남겨놓고 있다. 그때 김훈은 공교롭게도 소설가 이문열과 조정래를 동시에 인터뷰했다. 이 자리에서 이문열은 “선동성에 노출된 젊은이가 다수가 되었다”고 털어놓았으며 조정래는 “이것은 혁명이다.… 젊은 세대들은 정치에 대한 환멸을 희망으로 전환시켰다”고 가치를 부여했다.

    두 작가의 노 정권에 대한 평가는 이렇듯 달랐지만 단 한가지 눈길을 끈 공통된 개념이 있다. ‘선동과 혁명’이라는 단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