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앙일보 11일자 오피니언면 '시시각각'에 이 신문 김두우 논설위원이 쓴 '노욕과 노욕'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대통령선거의 효용 중 하나는 정치권에 대한 정리·청소 기능이다. 1992년 대선에선 정주영 전 현대그룹 창업자와 이종찬씨가, 97년엔 이수성·박찬종씨가, 2002년엔 이인제·정몽준·이한동씨가 추락했다. 기로에 설 때마다 그들은 희한하게도 망하는 길만 선택했다.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와 상대방에 대한 분노가 눈을 흐렸기 때문이다. 2007년 대선에선 누가 '5년 대청소 주기'의 제물이 될 것인가. 가장 유력한 대상자는 후보들이 아니라 현직 노무현 대통령이다.

    사람이 갈 때가 되면 있는 정, 없는 정 모두 떼고 간다고 한다. 지금 노 대통령이 그렇다. 임기가 끝나 가면서 그에게 일말의 미운 정을 가졌던 이들조차 질리고 물리고 넌더리나게 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던 정치적 자산도 다 까먹었다.

    2001년 12월 말에 있었던 일이다. 민주당 출입기자 일부와 망년회 겸 술자리를 함께한 노무현은 2000년 4월 16대 총선에서 부산에 출마했을 때의 일화를 소개했다. "유권자 명부를 만들어 지지자는 ○표, 모호한 사람은 △표, 반대자는 ×표를 해놓고 원 없이 돈(선거자금)을 써 봤다"고 했다. 선거법 위반 사실을 스스로 털어놓은 것이지만 언론은 이 말을 보도하지 않고 지나갔다. 고발 시한이 지난 데다 당시만 해도 대선 후보가 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낙선할 게 분명한 데도 몇 차례 부산에서 출마한 그의 '진정성'이 기자들의 마음을 약하게 만들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가 지난 4년4개월 동안 궁지에 몰릴 때면 전가의 보도로 내밀곤 했던 게 이 '진정성'이다. 실제로 그 말은 어느 정도 국민에게 먹혀들었다. 그러나 이젠 그런 서투르고 설익은 '1차원적 진정성'마저 사라졌다. 오직 자신의 정치적 이익만을 좇는 정치꾼의 모습만 남았다.

    "대의가 중요하지만 대세를 잃어서는 안 된다"며 '범여권 대통합론'을 슬그머니 수용하는 순간 김대중(DJ) 전 대통령을 향해 "해박한 지식과 정보에 대한 탐구욕, 그리고 깊이 있는 사고력과 잘 정리된 가치관"을 가졌다는 등 낯 뜨거운 아부를 늘어놓는 순간 노무현의 장점은 다 없어졌다.

    그는 "정치인들은 언론의 밥 아니냐. 볼펜 들고 카메라 들고 묻는데 어쩌겠느냐. 이를 추파라고 해야 하나, 영합이라고 해야 하나, 굴복이라고 해야 하나"라고 비아냥댔다. 이를 노 대통령에게 그대로 되돌려 줘야 할 때가 됐다. "노무현은 DJ의 밥 아니냐. 호남 민심 들고 햇볕정책 들고 '너 고집 피울래?'하고 묻는데 어쩌겠느냐. 이를 DJ에 대한 추파라고 해야 하나, 대세에 영합했다고 해야 하나, '노욕(老慾)'을 부리는 DJ에 굴복했다고 해야 하나."

    '그놈의 노욕(盧慾) 때문'이다. 그가 한나라당 이명박·박근혜씨에게 저주에 가까운 폭언을 거듭 퍼부은 것도 마찬가지다. 반한나라당 구도를 만드는 게 목표라고? 그건 눈속임용 명분에 불과하다. 실상은 친노 세력을 똘똘 뭉치게 하려는 것이다. 적에게 반사이익을 안겨 주든 말든 반대 전선의 중심에 내가 서 있겠다는 '적과의 동침'인 셈이다. 한나라당의 집권 저지나 진보 세력의 재집권은 부차적 문제다. 1차적으로 레임덕을 막고, 2차적으론 퇴임 후 정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욕심이 그의 눈을 가리고 있다.

    노 대통령은 본인의 말처럼 '세계적 대통령'이다. 욕설과 비속어를 남발하면서 솔직하다고 우기고, 역사에 맡겨야 할 평가를 자신의 재임 중에 스스로 하겠다고 나서는 대통령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다. "국민소득이 3만 달러, 4만 달러가 되면 내 덕인 줄 알아라"고 스스로 얼굴에 금칠 하는 대통령이 어디 있을까. 헌법과 국법을 준수해야 할 대통령이 무법자가 돼 온 나라를 휘저어도 마땅한 대응 방안 하나 찾을 수 없는 게 2007년 6월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대통령의 선거 중립 의무조항을 없앨 수 없고, '대통령 연임제 개헌'을 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노 대통령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