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2일자 오피니언면에 전상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사회학 전공)가 쓴 시론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지극히 낮은 지지율 속에 퇴임을 불과 1년여 남겨둔 노무현 대통령이 신년 벽두부터 정치적 공세를 오히려 강화하고 있다. 과연 임전무퇴의 기백이요, 분기충천의 열정이 아닐 수 없다. 얼마 전 ‘6월항쟁’ 20주년을 맞아 친노(親盧) 시민단체 관계자들과 함께한 청와대 오찬장에서도 건배 구호가 ‘위기는 기회다’였다고 한다.

    한 시대의 조용한 마무리를 고대하는 세간의 분위기와 사뭇 동떨어진 것은 ‘노’(怒)대통령 혼자만이 아니다. 이른바 진보 진영 전체가 외형상 불리해 보이는 현재의 여건 속에서도 희망을 계속 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한 달 사이만 해도 그렇다. 여권 내부의 탈당 행각과 신당 모의(謀議), 민주평통의 이념적 개편 구상, 민족문학작가회의의 탈민족화 시도, 과거사위의 긴급조치 판결 판사 실명 공개 그리고 참여정부 동업(同業) 지식인들의 공개적인 ‘노무현 때리기’ 등에는 진보세력의 신장개업을 꾀하는 강한 의지가 어렵잖게 읽힌다.

    이러한 진보 진영의 왕성한 의욕은 전혀 가당찮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지금 ‘착각의 자유’를 누리는 게 결코 아닌 것이다. 우선 시대정신으로서의 진보는 여전히 강력하다. 소위 386세대는 양적으로나 질적으로나 점점 더 우리 사회의 중추에 접근하고 있다. 설령 정치적으로 일보 후퇴가 있을지언정 언론, 출판, 교육, 학술, 종교 등 다방면에 걸친 좌파의 문화적 요새(要塞)는 보란 듯 높고 튼튼하다. 또한 요즘처럼 먹고 사는 게 힘들고 어려울수록 일반 대중은 진보 이데올로기의 매력에 일단 빠져들기 쉽다. 게다가 최근에 한껏 고무되어 있는 민족과 통일 담론에 ‘북풍’(北風)은 언제 어떻게 불어올지 알 수가 없다.

    현재 모습의 한나라당 역시 진보 진영의 입장에서는 별로 버거운 상대가 아닐 성싶다. 노무현 정부는 스스로 실패하였기에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을 ‘구태의연’하게 만드는 데 크게 기여하고 말았다. 반사이익만 챙기느라 국민들이 볼 때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은 한나라당이기에 진보세력이 크게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정권 교체가 이 시대 최고의 개혁’이라는 것이 당 대표 생각이지만 민주화 이후 개혁을 부르짖지 않고 출범한 권력은 하나도 없었다. 정권만 바뀌면 개혁이 이루어진다고 믿을 순진한 국민은 더 이상 아니다. 정권 교체의 질과 내용을 말하지 않고 ‘무조건’ 정권 교체만 내세우는 한나라당의 무례와 오만이 진보세력의 자신감을 오히려 키우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초라한 성적표가 과연 진보 집단의 총체적 몰락으로 이어질지도 속단하기 어렵다.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노무현 정권이 범한 실정(失政)과 무능(無能)의 책임을 자연인 한 사람의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경향이 늘어가고 있다. 하긴 학계에서도 노 대통령에 대한 평가가 정치학의 몫에서 심리학의 차지로 목하 이동 중 아닌가. 요즘처럼 노 대통령의 ‘대통령답지 않은’ 언행(言行)이 더욱 잦아지고 심해질수록 역설적으로 배후와 주변의 진보세력은 그와의 차별화 계기를 보다 쉽게 발견할지 모른다. 이로써 노 정권의 실패는 자칫 ‘진정한’ 진보에 대한 갈망으로 옮겨갈 수도 있는 것이다.

    올 연말 보수세력이 정권 탈환을 반드시 이룩하고 싶다면 자기 개혁과 내부 혁신에 가일층 매진해야 한다. 왜 한나라당 정권이 열린우리당 정부를 대체해야 하는지를 마치 당연한 일인 양 주장할 것이 아니라 국민 앞에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 한나라당과 보수 진영은 더 이상 노 정권의 꼬리를 상대할 것이 아니라 진보 진영, 진보세력, 진보 이념 전체의 큰 그림과 긴 흐름을 보아야 한다. 서산에 지는 해만 쳐다보지 말고 남은 하늘을 골고루 살펴야 하는 것이다. 어둠에 가려 눈에 잘 보이진 않지만 현재 하늘은 결코 맑기만 한 것이 아니다. 낙관적 대세론에 안주하는 기회는 위기를 자초하기 십상이다. 설령 그런 방식으로 권력을 얻게 되더라도 그것이 이 시대 국민의 뜻과 희망에 반드시 부합한다는 보장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