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일보 15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강인선 논설위원이 쓴 '무능해서 슬픈 대통령'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11일 4년 연임제 개헌 제안에 대한 기자회견을 했다. 보고 있으니 서글픈 느낌이 들었다. 대통령이 “임기단축 않겠다”든지, “정략적 제안이 아니다”라고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국민과 대통령 사이엔 기본적인 신뢰도 없다’고 고백하는 듯했다.

    대통령 비서진은 TV와 라디오 프로그램에 총출동해 개헌 홍보에 나선다고 한다. 홍보가 불신의 강을 건너는 배가 될 수 있을까? 2차대전 직후 약 2년 반 동안 해리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저녁시간에 모든 라디오 방송을 활용해 정책홍보를 여덟 번 했지만 청취율은 30~40%대로 늘 비슷했다. 단 한 번 57%까지 치솟은 적이 있었다. 트루먼이 고기가격 통제를 해제하겠다고 했을 때였다.

    정치학자 리처드 뉴스타트는 “대통령의 연설을 듣는 청취자의 수는 미국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느냐에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대통령의 설득력은 국민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제대로 짚어줄 때 발휘된다는 것이다. 또한 국민들은 대통령이 주장하는 바를 실행에 옮길 능력이 있다고 믿을 때 비로소 관심을 갖는다고 했다. 홍보의 수단이나 양의 문제가 아니다.

    세상의 모든 대통령은 호의와 기대 속에 태어난다. 반대세력이 아무리 강해도, 그가 대통령이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더 많은 덕에 당선되는 것이다. 그것을 왕창 까먹는 방법은 대통령이란 자리를 시시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미국에서 ‘게으르고 무능한 대통령’으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가 그랬다.
     
    전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막강한 지원 덕에 당선된 태프트는 대통령으로 일하는 데 별로 열의가 없었다. 기회 있을 때마다 “사실은 대법원장이 더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의 존 네이터 기자가 “태프트가 마치 사기를 당해서 억지로 대통령이 된 사람처럼 행동했다”고 할 정도였다. 태프트는 툭하면 “미국에는 날 싫어하는 사람이 너무 많다”고 불평했다. 속마음이 정말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임기를 다 마치고 재선 도전까지 했다가 실패했으니 태프트가 대통령직에 초연한 것도 아니었다.

    대통령이 국민의 신뢰를 허무는 또 한 가지 방법은 ‘지금 이 순간, 여기’를 무시하는 것이다. 정치인은 20년 후가 아니라 현재에 산다. 역시 미국 역사가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한 지미 카터는 무언가 높은 것을 추구하긴 했는데, 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자기만 훌륭하고 멀리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국민들이 ‘재선(再選) 불가’로 무능을 심판하자, 카터는 뒤늦게 인정받고 싶어했다. 차기 대통령 취임식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는데 굳이 국정연설까지 했다. 카터는 “지난 4년간 이뤄진 진전 덕분에 미국은 4년 전에 비하면 더 강하고 풍요로우며 인정 넘치는 자유로운 나라가 되었다”고 했다.

    “부동산 말고는 꿀릴 것 없다”는 노 대통령 발언과 비슷한 얘기다. 노 대통령이 좀 성급한 것 같다. 임기가 아직 1년도 넘게 남았는데 비슷한 얘기를 했으니까. 카터는 그 연설에서 차기 대통령에게 감세 계획을 연기하라고 훈수까지 두었다. 미국인들은 코웃음을 치며 “임기 때 잘할 것이지”라고 했다.

    실패한 대통령에 관한 연구서를 읽다 보면 역시 서글픈 느낌이 든다. 대부분 “알고 보면 그는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다만 나쁜 대통령이었을 뿐이다”라고 마무리된다. 나쁜 의도에서가 아니라 시대와 국민의 요구를 읽는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패한 대통령이 된다는 것이다. 나쁜 사람은 자기 인생을 망치고 말겠지만, 나쁜 대통령은 수많은 사람에게 악영향을 끼친다. 그것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