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화일보 12일자 오피니언면 '데스크시각'란에 이 신문 최영범 정치부장이 쓴 <'노무현 디스카운트'>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국제 시장에서 한국 회사의 주식은 멀쩡한 회사라도 실제 가치보다 20% 정도 낮춰본다고 한다. 기업 이익 기준으로 선진국에 비해 낮게 평가받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안보 불안, 경영구조의 후진성, 노동시장의 경직성 때문이라고 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 현상이다. 거꾸로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중동 지역 국가들이 원유를 수출할 때 지정학적 불안을 이유로 유럽보다 한국 등의 국가에는 배럴당 단가를 더 비싸게 받는 것을 말한다. 아시아 프리미엄이다. 디스카운트건, 프리미엄이건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은 극복해야 할 엄연한 현실이다.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연임제로 바꾸자고 한 노무현 대통령의 깜짝 제안에 대한 여론반응이 싸늘하다. 1년전 문화일보와 한국사회여론연구소( KSOI )의 공동조사 때만 해도 개헌에 찬성하는 여론이 응답자의 과반인 60% 가까웠다. 그러나 노 대통령의 개헌 제안 직후 조사에서는 반대여론이 반인 50%를 넘는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을까. 한마디로 노 대통령의 말의 진정성을 의심하는 것이다. 그렇게 돼야 하지만 노 대통령이 얘기하니까 아니라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이른바 ‘노무현 디스카운트’ 현상이다.

    디스카운트 현상을 타개하려면 더 많은 품을 팔고 노력해야 한다. ‘프리미엄’도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노 대통령은 프리미엄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는 듯하다. 오히려 지난 연말부터 “할말하겠다”며 ‘말 폭탄’을 쏟아내고 있다.

    “모든 것이 노무현이 하는 것 반대하면 다 정의라는 것 아니겠습니까. 흔들어라 이거지요, 흔들어라. 난데없이 굴러들어온 놈….” 지난 12월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에서 노 대통령이 퍼부은 독설이지만 노 대통령도 디스카운트 현상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인터넷에 회자되는 말에 얽힌 디스카운트 얘기 한 토막이 눈길을 뜬다. 프랑스 오를레앙 공(公) 아들의 양육관인 장리 백작의 부인에 얽힌 일화다. 백작 부인의 친구 중에 얼굴은 아름다우나 말씨가 상스러운 여자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가 백작 부인에게 엉뚱한 자랑을 했다. “아이! 저는요, 구애자가 너무도 많아서 어떻게 하면 그 자들을 따돌릴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이따금 진땀을 뺀답니다.” 이 말을 들은 백작 부인은 이렇게 비꼬았단다. “그거야 간단하지. 무슨 말이든 한 마디만 지껄이면 모두 달아나 버리고 말 텐데 뭘….”

    디스카운트 현상은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노 대통령의 ‘말’이 4년 동안 누적되고 각인된 학습 효과다. ‘공무원 새끼’ 발언이나 ‘대통령직 못해 먹겠다’는 등 2003년부터 시작된 노 대통령의 막말은 해마다 뇌리에 각인되고 축적돼왔다. 실현되지도 않고, 그렇게 되지도 못한 재신임, 대연정, 임기단축, 4년제 연임 개헌 발언 등 ‘말의 쇼’는 계속됐다.

    에스키모들에게는 세가지 ‘눈(雪)’이 있다. ‘내리는 눈’과 ‘쌓인 눈’ 그리고 ‘집을 짓는 데 쓰이는 눈’의 용어가 각각 다르다. 우리에게 ‘모, 벼, 쌀, 밥’이라고 구별되는 말이, 영어에서는 단지 ‘라이스(rice)’라는 한 낱말로 표현되는 것과 흡사하다. 사물을 가리키는 말이 세분돼 있으면 보다 분명하게 사고하고 인식할 수 있다. 그만큼 말은 사고와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언어는 곧 사고를 규정한다.

    그래서 대통령답지 못한 말은 역으로 대통령에 대한 신뢰와 권위를 약화시킨다. 막말에 가까운 어법은 아무리 진정성이 있다고 해도 신뢰를 얻기 힘들다. 스스로의 신뢰와 권위를 디스카운트시키는 것이다. 작자 미상의 시조 구절이 새삼스럽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많을까 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