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민일보 10일자 오피니언면에 이 신문 이진곤 주필이 쓴 <'4년 연임제'라는 우상(偶像)>입니다. 네티즌의 사색과 토론을 기대하며 소개합니다.

    “역시 노무현 대통령!”

    정치적 외돌톨이가 되어 이리 저리 떠밀리며 임기를 마치고 말 분이 아니지. 자존심 남다른 노 대통령이 자신의 존재가 빛바래가는 상황을 바라보고 있기만 하려고. 그래서 정치권 인사들은 물론 관심 가진 국민 대부분이, 뭔가 있으리라 예상했던 터였다. 어제 갑자기 불쑥 내밀어진 게 ‘4년 연임제 개헌’.

    취임 하자마자 지역구도를 해소하는 쪽으로 선거법을 고쳐주면 17대 총선 후 과반수 정당이나 정치연합에 내각 구성권을 이양하겠다(2003년 4월2일 국회 국정연설)고 하더니 2005년 6월부터는 ‘연정’ 혹은 ‘대연정’으로 논란의 소용돌이를 일으켜놨다. 2006년은 그럭저럭 넘어가서 안도했더니 새해벽두에 느닷없이 ‘대국민 담화’ 형식으로 개헌을 내밀었다. 자기 존재 확인에 집착하는 생래(生來)의 승부사 면모를 또 과시해 보인 것이다.

    4년 연임제에 대해서만 말하자. 이 제도는 제1공화국 때나 제3공화국 때나 종신집권제의 징검다리 노릇을 할 수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필경엔 당시의 집권자를 비극 속으로 몰아넣고 말았다. 이제는 정치 상황도 국민 의식도 달라진 만큼 그런 걱정은 기우(杞憂)라고들 한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변하지 않은 게 있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갈구다.

    국민의 정의감이 펄펄 살아 숨쉬고 있다고 할 것인가. 문제는 바로 그 정의감이다. 특히 집단적 정의감은 즉흥적이고 충동적이기 쉽다. 2004년의 탄핵 정국을 돌아볼 일이다. 정의감으로 뭉친 민중은 집단적인 분노를 무섭게 분출시켰다. 그에 힘입어 신생 열린우리당은 그해 4월의 총선에서 일약 원내 과반수 정당으로 도약했다. 만약 노 대통령에게 4년 연임의 길이 열려 있었다면 어땠을까.

    4년 연임제가 홀로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진선진미(眞善眞美)한 제도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어차피 제도란 몹시 몸에 끼는 옷이 되게 마련이다. 그것이 불편하다고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하면 끝이 없다. 중심이 확실·확고한 정당체제에 4년 연임의 대통령제가 결합될 때 장기집권의 욕구는 급격히 부풀어오른다. 집권자 개인의 이념이나 신념 따위는 이렇다할 결정력을 갖지 못한다. 집단의 사활이 걸린 문제가 되어버리면 개인의 이성은 마비되게 마련이다. 과거의 정치인들이라고 지금의 정치인들보다 개인적으로 덜 이성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노 대통령의 리더십에 대해서 말인데, 정의감 도덕성 개혁 의지가 문제라고 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렇지만 사회적 국가적 의제를 제시하고 정책화하고 또 추진하는 방법이 민주적이지 못하다는 점만은 꼭 상기시키고 싶다. 지금까지는 어떠했든 임기를 끝낼 무렵에라도 민주적 지도자의 모습을 국민 의식 속에 각인시킬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전하, 여러가지 다른 의견이 제시되어야만 그 중 훌륭한 의견을 선택하여 실행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제기된 주장만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황금을 감정할 때 단지 겉모습만으로는 순금인지 아닌지를 판정할 수 없습니다. 시금석으로 문질러보아야 비로소 판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 원정에 나서려고 하는 크세르크세스 왕(페르시아)에게 삼촌 아르타바누스가 간한 말이다. 헤로도토스가 ‘역사’(박광순 역)에서 전하고 있다. 왕은 당초 전쟁에 관심이 없었으나 주변의 거듭된 부추김으로 원정을 결심했고, 이후 화려한 웅변술로 자신의 결정이 정당하다는 것만 강조했을 뿐 반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는 출병을 강행했고 수많은 사상자를 낸 끝에 패하고 말았다. 제2차 페르시아전쟁(BC 480∼BC 479)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길은 별로 다르지 않다.